< 설거지 (4) >
"수고했다."
허응선과 이사룡이 홍영진을 사로잡아 돌아오자, 이자원은 솔직한 말로 그들을 치하했다.
이 반란에서 홍영진이 끌어들인 양반만 몇이던가.
당장 공주 점령을 주도한 김예상만 해도 홍영진이 포섭한 자였다.
가만히 놔뒀으면 무슨 짓을 더 벌였을지 모를 자를 잡아왔으니 실로 대공이었다.
"충주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이자원이 홍영진을 보며 물었다.
홍영진이 대답하지 않자 이자원은 냉막하게 말했다.
"이미 너희 패거리들이 모두 아뢰었다. 충주 율동은 도적의 소굴로 이름난 곳이니 그들을 끌어들이려 했다고."
"제길, 이 의리없는 놈들이 미주알고주알 죄다 불어버렸군."
서출(庶出)이라 하더니 입이 제법 걸었다.
하지만 같은 서얼이라 해도 한 사람은 훈련대장이 되어 단상에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역적이 되어 꿇어 앉아 있으니, 그 꼴이 제법 볼만하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충주까지 제법 거리가 될 터인데, 거기까지 손을 뻗은 것은 제법 대단한 일이다."
이자원은 은근히 그를 칭찬했다.
너의 재주는 높이 산다, 이런 표시였다.
"나는 오랑캐와 수없이 싸워 모두 이겨 보았고, 반면 병법을 모르는 역적들은 이미 크게 져서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이다. 조정과 계속 싸우는 것은 실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세이거늘, 이런 판국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을 내어 놓겠느냐?"
이자원의 말에 홍영진의 표정이 변했다.
의리를 위해 목이 잘리겠냐고 묻는 것은, 의리를 저버리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소인이 대장 영감을 위해 무엇을 해주길 바라시오이까?"
"공산성으로 들어가라."
이자원이 말했다.
"네가 데리고 온 충주의 도적들 중 죄를 씻을 생각이 있는 자들을 뽑아 공산성에 들어가서, 성문을 열어라."
생각에 잠겨있던 홍영진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사오이다."
"좋다."
홍영진은 즉시 제 무리들을 쑤셔다가 몇명을 가려뽑아 공산성으로 떠났다.
"정말 저자를 용서하실 작정이시오이까?"
이완의 물음에 이자원이 피식 웃었다.
"그럴리가 있겠소."
홍영진은 보통 역적이 아니라 충청도를 뒤흔든 대반란의 주모자다.
아마 가족들을 건사하는 것 정도가 그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리라.
하지만 이자원은 구태여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박 파총."
"예, 대장 영감."
"오늘밤 성문이 열리면 곧장 어영청군과 함께 공산성을 들이쳐라.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된다."
"명을 받들겠사오이다."
성문이 저절로 열린다면 굳이 천천히 조여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단숨에 들이쳐서 끝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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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31년(1603년) 충청 감사였던 유근이 공산성 안에 감영을 새로 짓고, 이르기를 쌍수영(雙樹營)이라 하니, 훗날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 부른 까닭은 여기에서 이름한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에 그 성지(城池)가 좁다하여 다시 고을 중심에 있는 옛 감영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쌍수영은 한동안 주인없이 비워져 있었다.
그러다 이괄의 난 때 공산성으로 쫓겨들어온 인조가 잠시 행재소(行在所) 삼아 머물기도 하였는데, 지금 권대용은 그것을 핑계 삼아 헛소리를 한껏 늘어놓고 있었다.
"내 꿈에 인조대왕께서 나오셔서 이르기를, '지금 주상은 배움이 짧고 간신에게 휘둘리므로 차마 더 대위(大位)를 맡길 수 없으니, 덕있는 사람으로서 나라를 잇게 하라' 하시었소.
꿈에서 깨어 곰곰히 생각해보건대, 우리가 비록 명의상 간신을 처단한다 하였지만 기실 간신이 날뛸 수 있는 것은 환령(桓靈, 후한 환제와 영제)과 같은 임금 때문이니 인조대왕의 헤아림이 실로 밝으심을 알 수가 있었소."
권대용은 감영에 모인 수뇌부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포격에 감영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의 눈은 퀭했다.
"이곳 공산성은 곧 옛 백제의 사비(泗沘)로, 일세의 왕읍(王邑)이오. 우리 의군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어찌 보면 하늘의 뜻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왕을 삼고 우리의 앞날은 모두 그에게 맡기도록 합시다."
권대용의 말에 김예상과 유탁, 이지혐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연이은 포격으로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거진 망해서 쫓겨들어온 판에 저런 소리라니.
하기야 저 중원의 이자성(李自成) 같은 자도 원래 역사에서는 청군에게 패해서 도망치는 와중에 칭제를 했으니, 궁지에 몰린 사람의 심리가 원래 이러한 것이던가.
"행수의 뜻대로 하시지요."
그러나 가장 상식적으로 보이던 김예상이 먼저 찬성을 하고 나서자, 유탁과 이지혐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이자원마저 토벌군 장수로 온 마당에, 기존 청군측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의미가 없어졌다.'
본래 양반들과 백성들이 대거 가담한 것은 '이자원이 의군을 이끈다'는 선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이 들통난 이상-김예상 자신도 속았지만-동요하는 병력들을 다잡기 위한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다.
차라리 '호서에서 임금을 세우자'는 명분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동향 심리를 자극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양반들이야 뭐, 더는 발을 뺄 수도 없는 입장이고 말이다.
'특히 나는 더더욱.'
그가 공주를 통째로 들어먹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반란이었기에, 어떻게 면피할 구석이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김예상이 그렇게 나오자 유탁과 이지혐 또한 끝내 권대용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왕으로 세우는 것이 옳겠소?"
"당연히 행수께서 하셔야지요."
김예상이 망설임없이 말했다.
그러나 왕이 될 것을 권하는 것치고는 그의 눈빛은 몹시 흉험했다.
'일이 잘못되면 네놈이 앞장서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성이 함락되면 왕을 칭한 그가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김예상은 자신을 속인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저희 생각에도 행수만한 분이 없습니다."
유탁과 이지혐도 나서서 권대용을 추동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대임을 맡도록 하겠소."
권대용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오랜 소원이었다.
그 소원을 정식으로 이루는 것도 아니고, 한이나 풀고 가려고 발악 비슷하게 칭왕하는 판에 사양은 무슨 놈의 사양인가.
"우선 개국(開國)을 했으니 마땅히 국호를 정하고 4대조를 왕으로 높여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잠시 미루어 두도록 하겠소."
권대용은 일단 쌍수감영의 격을 행궁으로 높이기로만 했다.
김예상이 보기에는 아무 의미 없는 짓거리였지만 그냥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차라리 여기저기 입대는 것보다야 저기에 몰두하는 편이 나아보였으니 말이다.
"행수, 아니 전하······. 홍 대장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이지혐의 아우 이지암이 영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는 투로 보고했다.
"홍 대장이? 어서 들라하라!"
권대용이 외쳤다.
암담한 상황이지만 우선 같이 일을 도모한 홍영진이 살아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행수."
홍영진이 인사를 올리자 이지암이 서둘러 그의 귀에 대고 권대용이 스스로 칭왕했음을 알렸다.
그 말에 홍영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빌어먹을, 정말 한조각 남은 갈등마저 없애주는구나.'
그 또한 사람인지라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동지들을 저버리는데는 어딘가 찜찜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없는 사이 칭왕까지 했다니 실로 제정신이라곤 볼 수가 없었다.
"충주에서 출발할 적에는 도적들 100여 명이 따라왔으나, 중간에 훈국군의 매복에 걸린 까닭으로 고작 십 여명만 살아남아 왔습니다."
홍영진은 어쨌거나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고 간략하게 보고했다.
"끝까지 절의를 잃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들어온 것만으로도 크게 치하할 만하네. 홍 대장은 내 수어사(守禦使)로 삼을 터이니 지원군을 데리고 북문에 합류토록 하게."
권대용의 말에 홍영진이 고개를 저었다.
"오면서 보니 공북루(拱北樓)가 있는 북문은 방어가 제법 되어 있지만 남문은 허술했습니다. 여러문을 두루 지키는 것이 중요하니 모쪼록 진남루(鎭南樓)를 맡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음."
권대용이 듣고 보니 그럴듯 했다.
유탁이나 이지혐 같은 자들은 유생으로 장수감이 아니었기에 각 문의 수비를 맡을 장수가 부족한 것도 있었다.
"허면 홍 수어사가 진남루를 맡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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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의 북루(北樓)가 접한 성면은 일견 허술해보이나 금강을 끼고 있어 시석(矢石, 돌과 화살)이 미치지 못해 지키기가 좋은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투사 무기인 경우이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가지고 내려온 홍이포(紅夷砲)가 불을 뿜자, 공산성의 성벽 한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곳을 지키던 공주 속오군들은 그 소리에 혼이 달아나는 듯 했으나 김예상과 그 휘하 속오군 군관들이 다그쳐 수비에 임하도록 했다.
'그래도 금강이 1만 대군의 역할을 해주니 다행이구나.'
김예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포격을 가해오는 관군이었지만 공산성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사실상 반쯤 체념한 김예상으로서도 그 점만큼은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히, 히익!"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김예상이 돌아보니 아직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박성균과 박중균 형제가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을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포섭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치던 동생이 토벌군으로 내려왔으니, 그와 내통할지도 몰라 자기 옆에 두긴 했는데 저정도 정신으로 배신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였다.
"기총 나리!"
부하 현순철이 허겁지겁 뛰어와 외쳤다.
김예상이 받은 벼슬은 도원수였지만, 부하 중 누구도 그따위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고, 김예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냐?"
"남문, 남문이 열렸사오이다!"
"뭣이?"
토벌군의 공세는 북문이 있는 공북루 쪽에 집중되었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판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남문이 열렸다니.
그래도 수백명의 군사가 지키는 남문이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냐?"
"자세한 사정은 모르오이다. 그런데 벌써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사온데 훈련도감 박철균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다고······."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김예상의 고개가 박성균과 중균 형제에게 홱 돌아갔다.
"저놈들을 붙잡아라!"
이렇게 된거, 갈 때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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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총 나리, 어서 오십시오."
진남루 위에 높이 오른 불을 보고 남문에 접근한 박철균은 낮보다 한층 깍듯해진 홍영진의 태도에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리된단 말인가.
"성문을 용케 열었구려."
"소인이 적도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지라······."
신임을 받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그 적도 중 우두머리급이었지만, 박철균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훈국, 어영청! 성문이 열렸다!"
박철균이 뒤에 선 병사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 성 안에 있는 잡병들과는 격이 다른 정예들이다.
금방이라도 성을 함몰하고 적의 머리를 참할 수 있으리라.
"주상 전하께 칼을 들이민 역적들을 토벌하라!"
박철균의 외침에 병사들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함성을 지르며 공산성에 돌입했다.
작가의말
인조실록에 따르면 충주 율동은 도적의 소굴로 이름났으며, 오랫동안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