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거지 (3) >
반란군은 병력을 절반도 채 수습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후퇴했다.
이자원은 우선 성환에 머무르며 사로잡은 병력들을 심문해보았다.
그러나 사로잡힌 자들은 대개 말단인지라 딱히 수확은 없었다.
"무거운 군역을 벗을 수 있게 해준다길래 창을 쥐었습니다."
"김 기총 어른께서 그냥 따라오라 하시기에······."
"이자원 장군께서 무슨 일로 군사를 모아 일어나신다길래 참여했습니다요."
마지막 말을 한 백성은 정작 이자원 본인의 얼굴조차 몰랐지만, 그 말에 속아서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전부 헛소문이다."
이자원은 한마디로 일축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더니, 제가 역적질을 하는줄도 모르고 끼어든 자들이 수도 없이 많사오이다."
이완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은 것 또한 죄이지만, 저들을 벌주어봤자 우리군이 얻는 것은 없을 것이오."
오히려 민심이 악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허면 어떻게 처결하실 요량이시오이까?"
"전부 방면토록 하겠소."
이자원이 말했다.
그 말에 이완이 우려를 표했다.
"한번 사로잡은 적도들을 풀어주었다가 다시 저들이 역적에게 가담하면 어떻게 하겠소이까?"
"방금 중군이 말했지 않소. 저들은 역적질인지도 모르고 가담한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이젠 역모임을 알았으니 제 고을로 돌아가더라도 꼬임에 넘어가진 않을 것이오."
"하지만 조정이 추궁한다면······."
"수천에 달하는 백성들이 속아서 가담했소. 조정이 저들의 뿌리를 뽑고자한다면, 그것은 곧 공주와 연산, 이산을 통째로 지워버리겠다는 말과 다름 없겠지."
어차피 역모를 주도한 것은 지금 공주로 도망간 한줌의 양반들 뿐이다.
처단되어야 할 자들도 그들 뿐이었다.
"이미 밑천이 다 드러난 적도들이 공주 같은 대읍(大邑)을 전부 지킬 수는 없을테니, 아마 수비하기 편한 공산성으로 들어갈 것이오이다."
이완은 이자원이 뜻이 강경함을 알자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았다.
먼저 논의해야할 일이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내 생각도 그러하오. 공략하기가 쉽지 않겠지."
"대포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한데, 대장 영감의 생각은 어떠시오이까?"
이완의 말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별파진이 따라 내려왔지 않소? 그들로 하여금 우선 공산성을 포격하도록 하겠소."
우레와 같은 포격전을 감행하고, 안팎의 길을 끊는다.
명분부터가 가짜였던 저 오합지졸들이 그때가 되어서도 굳게 성을 지킬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반사항은 이완이 맡아서 처리하기로 하고, 이자원은 토벌군 수뇌가 머무르고 있는 성환 찰방(察訪)의 건물 사이를 잠시 거닐었다.
그때 이자원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다.
"표정이 어둡군."
그처럼 밤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인지, 우거지상을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박철균이 돌아보았다.
"영감."
박철균이 이자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형님들을 보았소이다."
시세를 잘못 판단하여 반란군에 가담해버린 박철균의 형들도 전장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철균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어찌했나."
이자원의 물음에 박철균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놓쳤사오이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고민하던 박철균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잡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으니 그냥 놓아준 셈이오이다. 아직까지 이놈이 마음을 다잡지 못했나 봅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자들이 역적인가, 아닌가?"
이자원이 말하자 박철균은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역적이지요. 대동법에 반대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명분으로 주상 전하께 칼을 들이밀었으니 말이오이다."
"그렇다."
이자원이 말했다.
"저들은 천리를 배반하고 강상을 어지럽힌 역적들이다. 네 형들은 거기에 가담한 것이고."
"그러니 망설임없이 치라는 말씀이시오이까? 그것이 소관의 가족이라 해도?"
"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손에 죽을 자들이다."
이자원의 말에 박철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가족을 죽였다는 자책감은 좋은 양분이 된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선 그를 뛰어넘는 대의명분이 필요하니까.
끝내는 그렇게 가져다 붙인 이유가 어느샌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 되고 만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다음에는 망설이지 말도록."
이자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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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내기 초관 허응선(許應善)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호란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무과에서 합격한지 어느덧 여러달.
다시 훈련도감에 배치받고, 대장 영감이 지었다는 병서를 달달 외우고 몸을 단련시킨지도 그쯤되었다.
그러다보니 싸움에도 차차 도가 튼 그였다.
"전부 쓸어버려라!"
허응선이 환도를 들고 돌격하자 그 뒤로 병사들이 따랐다.
그들의 눈에 포착된 한 무리의 반란군은 갑작스레 달려드는 훈련도감군을 발견하자 혼비백산했다.
"어서 항복해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너희가 따르는 자는 역적이다! 역모에 엮여 삼족이 멸해지고 싶은게냐!"
어느덧 입에 붙어버린 항복권고 문구를 기계적으로 읊으며 허응선은 칼을 휘둘렀다.
실로 변변치 않은 적들이다. 헤진 옷에 무기라고는 달랑 허약한 죽창 하나 뿐.
훈련도감의 상대가 될리가 없었다.
허응선의 칼이 죽창을 부러뜨리고 어느 운없는 반란군의 머리통을 찍자, 나름 수십 명이 모여있던 무리는 그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달아나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양반은 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허응선은 곧장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타고 있던 노새 위에서 끌어내렸다.
"이, 이놈! 이거 놓지 못할까!"
"시끄럽다!"
허응선은 그 양반의 미간을 칼등으로 거세게 후려쳤다.
무언가 불길하게 금가는 소리가 나며 양반은 정신을 잃었다.
"거 참, 살살 다루라니깐. 저놈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시오?"
뒤늦게 동료 초관인 이사룡(李士龍)이 터벅터벅 걸어와 말했다.
그는 이자원에게 중군의 비위를 고변한 이정건의 아들로, 역시나 허응선처럼 이번 무과에 입격한 차였다.
"역적 놈인데 죽으면 뭐 어때. 이런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말일세."
허응선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말했다.
반란군이 아산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도성에서 내려온 훈련도감과 어영청군에게 크게 깨졌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한 것인지, 충청도 여기저기서 난군에 합류하기 위해 몰려드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 숫자라고 해봐야 기껏 수십 명에서 많아봤자 100여 명이었기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본군 전체를 움직일 이유는 없는지라, 이자원은 아예 허응선과 같은 신임 초관들을 시켜 이를 적당히 토벌하고 주모자를 잡아족친 뒤, 단순 가담한 백성들은 제 고을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도 일종의 시험 아니겠나?"
허응선이 이사룡을 바라보고 말했다.
대규모 전투도 아니고, 정예도도 낮은 자들이 상대이니 이들 신출내기 초관들의 역량을 시험코자 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죽자사자 그렇게 달려드는거요?"
"물론이지. 그게 아니면 왜 이런 고생을 하겠나? 사람 죽인다고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일세."
"허 형(兄), 그래도 조심하시오. 자식도 있는 사람이 그리 몸을 사리지 않아서야 되겠소이까."
"출세 한번 해보려면 어쩔 수 없지."
허응선이 씁쓸하게 말했다.
'형님이 소문대로 어영중군으로 가셨으면 관운도 그럭저럭 잘 풀렸을 터인데.'
벌열사족 아닌 향반 집안인 까닭으로 문과 나아가기 녹록치 않아 그런지, 혹은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허씨 일문에는 괄괄하고 호탕한 성정을 살려 무과를 준비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는데, 대표적인 이가 금군별장을 지냈던 허득량과 오위 부총관을 지낸 허복량 사촌형제였다.
그런데 두 종형제가 호란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덕에 각기 고관이 될 것이란 소문이 들리고, 또 새 조정에서는 무관을 중용한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그렇잖아도 무과에 뜻을 많이 품던 허씨들은 아예 이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허응선은 육촌형들을 따라 의병에 참여한 덕에 무과에 쉽게 붙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축옥사로 청서의 세가 한풀 꺾이고 허득량의 스승 김상용도 은퇴하면서 허득량이 갈 것이라던 어영중군 자리에는 이완이란 양반이 앉아버린 것이다.
이제 믿을 것은 공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다.
"초관 나리, 연기현(燕岐縣) 쪽에서 한 무리 군사가 또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오이다."
"그래?"
허응선이 반색했다.
하루에 두번이나 공적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연기현은 공주 동쪽에 있는 현으로 예서도 멀지 않았으니, 허응선과 이사룡은 곧장 병사들을 이끌고 그리로 향했다.
연기에 다다라 수십 명 가량의 남자들이 무장하여 줄지어 간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뒤쫓아가보니, 과연 한 무리의 반란군이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간악한 역도들아! 감히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배신하고 칼을 들이미느냐! 모르고 가담한 자들은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되 저항하면 남김없이 죽이겠다!"
허응선은 역시 그렇게 외치며 다시 한번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달려들기만 하면 전의를 상실해버리던 농군들과는 달리 이번 반란군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칼을 들고 허응선에게 맞서오는 것이 아닌가.
"조심하시오!"
뒤에서 따라오던 이사룡이 황급히 말했지만, 채 피할 새도 없이 허응선의 어깨에 적 대장의 칼이 들어왔다.
"이 역적 놈이!"
허응선은 재빨리 검로를 틀어 막아냈으나 그 탓에 자세가 크게 흐트러진 그였다.
틈을 놓치지 않고 적의 대장이 다시금 공격을 감행해올 때, 훈련도감의 병사 하나가 느닷없이 몸통째 돌진해와 그를 넘어뜨렸다.
"큭!"
불의의 습격에 대장이 나동그라지자, 허응선은 그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대장을 사로잡고 보니 어느새 싸움도 정리가 되어가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살았네."
겨우 한숨을 돌린 허응선이 병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자네 이름이 뭔가? 꼭 기억해두겠네."
병사는 올해로 서른 하나인 허응선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기골이 장대하여 장군감으로 보였다.
"소인 안익신(安益信)이라고 하오이다. 이번에 훈국 인원을 충원할 때 취재(取才)에 붙어 들어왔지요."
"안익신이라."
허응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대장 쪽을 쳐다보았다.
제법 무재가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방금 전 잡았던 양반처럼 단순히 역모에 끼어든 이들과는 다르단 예감이 스쳤다.
대장은 허응선의 물음에도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잡은 백성들에게 들어보니 저자의 이름은 홍영진(洪榮振)이라 하고, 충주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하오."
"가만, 홍영진이라면 적의 괴수가 아닌가?"
이사룡의 말에 허응선이 중얼거렸다.
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역적질에 가담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던 큰 도적이 바로 홍영진이었으니, 예상 외의 거물을 사로잡은 것이다.
"어서 대장 영감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네!"
공산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의 우두머리 중 하나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이건 보통 공이 아니다.
허응선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