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거지 (2) >
이자원은 출진에 앞서 처갓집으로 향했다.
장인장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함께 살고 있는 강석기의 장남이자 손윗처남 강문성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자원은 유주의 방으로 향했다.
“여독을 풀 사이도 없이 출병하시는 게로군요.”
“그렇게 되었소.”
이자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유주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뭐라 입을 열려 할 때, 이자원이 선수를 쳤다.
“회임을 했다 들었소.”
이자원이 어쩐지 어색한 투로 말했다.
딱딱하고 고저없는 억양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유주는 말투가 약간 누그러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 넉달쯤 되었습니다.”
“그렇군.”
이자원은 침묵했다.
잠시간 그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몸조리 잘하시오.”
할말은 많았지만, 나오는 것은 그 한마디 뿐이다.
이자원은 그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벌써 나오시는 것이오이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철균이 물었다.
평소 같으면 얼마만의 해후인데 구시렁거렸을 박철균이었으나, 지금은 말은 그렇게 해도 그가 더 급해보였다.
“준비는 끝냈는가?”
“예, 영감.”
“가지.”
이자원은 말에 올라탔다.
그는 고삐를 잡고 강석기의 집을 눈에 담았다.
담 너머로 유주의 방이 보였다.
‘이미 놓쳐버린 것이다.’
한때 이자원에게 가족은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존재는 사라져버렸고, 무슨 수를 써도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어떤 감정은, 단순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대용품을 갈구하는 나약한 심정이다.
싸움을 앞두고 이런 감상에 사로잡혀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출진한다.”
훈련도감군 2500명, 어영청군 800명.
도합 3300명은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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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이 내려가는 동안 반란군은 상당히 빠르게 움직였다.
“감사 목장흔이 아산현감 최극성(崔克誠)과 합세하여 난군과 맞섰는데, 병력의 수효가 적어 끝내 패퇴하고 현감은 전사했다고 하오이다.”
어영중군 이완이 보고했다.
그는 이자원보다 열 살이 많았지만 이자원에게 깍듯이 존대했다.
제 나이와 경력을 믿고 강짜를 부리던 전 훈련중군 이현달과는 달리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산을 점령하고 나서 적들은 어찌하고 있소?”
“우선 아산을 격파한 역적들은 다시 금강을 넘어 공주로 돌아갔고,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어 합류를 종용하고 있다 들었사오이다.”
이완의 대답에 이자원이 생각했다.
‘충청도부터 확실히 장악할 셈인가?’
적은 병력으로 도성까지 진격하기보단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중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아산에 감사가 있었으니 그를 중심으로 충청군이 모이는 일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적절한 판단이오이다.
아산을 얻어놓고 공주로 돌아간 것은 최대한 우리군을 제 지역으로 끌어들여 격파하려는 속셈이 아니겠사오이까?”
현재 반란군의 병력은 3~4천 수준.
정예도가 턱없이 떨어지는 그들이 정면승부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앞마당인 공주로 토벌군을 끌어들여 지리(地利)를 취하겠다는 뜻이리라.
토벌군을 한번 격파한다면 반란군의 기세가 오를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관망 중인 충청도 양반들이 가담하는 효과를 노려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반란군 입장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그럼 대응 전략부터 수립해야겠소. 우선 도성에서 내가 내려왔음을 충청 각지에······.”
“대장 영감, 중군 영감!”
이자원이 말하던 그때, 박철균이 갑자기 뛰쳐들어와 외쳤다.
“무슨 일이냐?”
“역적들이 다시 북상하고 있사오이다!”
“뭐라?”
박철균의 말에 이완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도대체 왜?
“아산인가?”
이자원이 묻자 박철균이 고개를 저었다.
“직산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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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를 차지한 반란군은 위세가 절정에 달했다.
하루만에 공주와 이산, 연산을 손에 넣은데다 아산에서도 한번 싸워 감사를 물리치고 현감의 목을 베었지 않은가.
“이대로 도성까지 쾌진격하시지요, 행수!”
“간신들의 세가 보기보다 별것 아닙니다!”
권대용에게 반란군들은 앞다퉈 그렇게 권했다.
그 사이에는 박성균과 박중균 형제도 있었다.
권대용 또한 충청도에서 미적대느니 기세를 탔을 때 차라리 빨리 도성으로 올라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김예상은 그런 제안에 단호히 반대했다.
“행수, 우리군은 정예하지 못하여 병력이 수천에 달하나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않은 잡병들이 많소이다. 이런 병력으로 도성을 들이치는 것은 자살 행위올시다.”
“허면, 이대로 충청도에서 웅거하며 옛 백제(百濟)라도 일으켜 세우자는 말이오?”
김예상의 말에 유탁이 비꼬았지만 권대용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허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공주는 요지이니 그곳을 지키며 호서의 민심을 모으고, 간신들이 보낸 군대를 한번 깨뜨려 위망을 떨치면 절로 군사 1만을 모을 수 있사오이다.
이곳 충청 땅이 을사년(1628년) 역모를 도모했다 하여 공청도로 이름이 바뀌기까지 하고, 여러 차례 호서 민심이 요동치는 일이 많았으니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만 준다면 많은 양반들이 합세하겠지요.”
들어보니 김예상의 말이 옳다하여 우선 공주로 물러난 권대용이었으나, 시시각각 전해오는 토벌군의 소식을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 이자원이 관군 대장으로 온다고?”
“그렇네. 도성 부민들이 엮여 들어갈 때 분명 그의 이름도 나왔을 것인데 임금이 어찌 그를 기용했는지······.”
권대용은 사색이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자원일세. 김예상의 말을 믿고 공주땅에 머물러있다간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력이 흩어지겠지.”
이지혐이 그렇게 말하자 권대용 또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것은 아직 그리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니, 의군들이 알아채기 전에 이자원과 싸워 결판을 내면 되지 않겠는가?”
“옳은 말이네.”
이기면 된다, 이기면.
싸워서 적을 이기고 나면 이자원이 뭐 어쨌단 말인가.
권대용은 그 길로 즉각 휘하 장수들을 불러 아산으로 재차 나아갈 것을 명했다.
김예상은 역시나 반대했지만 이지혐과 유탁마저 나서자 중과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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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成歡)은 직산 서쪽의 지역으로서, 충청도 6개 찰방역(역로의 중심역)의 하나가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교통로였다.
경기도에서 내려온 토벌군과 공주에서 올라온 반란군이 이곳에서 맞닥뜨린 것은 사실상 필연이었다.
“훈련도감이군.”
저 멀리 나부끼는 군기(軍旗)를 보고 박성균이 혀를 찼다.
결국 도성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었던 것을 보면 동생은 자신의 편지를 묵살한 모양이었다.
“철균이 놈,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의군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 이름까지 조정 귀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중균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박성균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동생을 달랜다기보단 아직 ‘의군’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투였다.
‘막내가 움직여만 줬으면······.’
거사가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고, 또 의군에서 자신의 입지도 올라갈 것이 아닌가.
지금처럼 큰소리만 쳐놓고 가노 몇 데리고 합류했다고 은근히 괄시받지도 않을 것이고.
그 생각을 하자 박성균의 이가 갈렸다.
“역적들은 들어라!”
그때 적군에서 거한 하나가 쩌렁쩌렁 소리를 치며 나섰다.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어렴풋이 들릴 정도였다.
“형님, 저거 철균이 아니오?”
“뭣이?”
박중균의 물음에 박성균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그의 동생 박철균이 맞았다.
“아니, 저놈이 왜 저기 있는게냐?”
“대명 가도총병 겸 조선 훈련대장 이자원 영감께서 친히 역적을 토벌하기 위해 나오셨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조정의 군사에 대항한다면 어깨 위의 머리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자원?”
“이자원 장군께서 기의하셨다고 하지 않았남? 왜 토벌군에 장군이 계신게지?”
“이런 바보 같은 놈들······. 적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라! 이자원 장군은 우리편이다!”
유탁과 이지혐이 외쳤다.
그러나 반란군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지만······.’
그래도 이자원 얼굴을 실제로 본 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번 싸움 한번은 어찌저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권대용이다.
하지만 김예상마저 의문스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은 권대용은 가슴이 뜨끔하여 외쳤다.
“저런 헛소리는 더 들어줄 것도 없다! 공격하라!”
“잠깐, 행수······.”
김예상이 말릴 틈도 없이 떨어진 권대용의 명령에 서서히 전진하는 토벌군을 향해 반란군 포수들이 일제히 총을 당겼다.
- 탕!
- 탕!
그러나 형편없이 빗나가는 총탄이다.
애초에 유효사거리도 벗어난 거리에서 쏘아냈으니 제대로 닿을리가 없다.
하지만 추태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숙련되지 않은 반란군 포수들은 사격통제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멈추어라!”
김예상이 소리쳤지만 발포는 계속되었다.
- 투다당!
반란군은 일회 발사 후에도 끊임없이 산발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내 한바탕 난리가 지나가고, 초연이 걷혔을 때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조금의 피해도 없이 코앞까지 육박해온 토벌군 병력이었다.
“도, 도망쳐!”
“빨리 도망쳐라!”
공포에 질린 반란군은 하나둘씩 쥐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자원이 명령했다.
“발포하라!”
- 투다다당!
화승을 팔에 감고 미리 장전해놓았던 토벌군 포수들은 거의 동시에 사격을 개시했다.
방금 전 오합지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발포음에 반란군은 혼란에 빠졌다.
“으아아악!”
“살려줘!”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정예 포수들이 가한 일제사격에 반란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마병을 돌입시키도록.”
그동안 소모된 훈련도감 마병 대신 어영청에서 100여 명 규모의 마병이 따라왔는데, 이자원이 그것을 꺼낸 것이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도망가지 말고 항복하라!”
“어서 이자원 장군께 항복해라!”
박철균은 어영청 마병들과 합을 맞춰 반란군을 유린했다.
- 퍽
그의 편곤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반란군 하나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빌어먹을, 같은 조선 사람끼리.’
박철균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재수없는 명나라 놈들이나 오랑캐들이면 모를까, 손맛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가, 그의 집안이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같은 조선 사람’만 해치워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젠장······.”
한참 종횡무진하던 박철균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혔다. 망건도 벗겨진채 허둥지둥 도망가는 선비 두 사람의 뒤통수가 보인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망설임없이 이 편곤으로 내려칠 수 있을까.
“조금, 조금만 더 살아계시우.”
박철균은 편곤을 늘어뜨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진 모르지만 말이다.
성환 전투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
반란군 병력은 대부분 무너졌다.
그나마 김예상이 확실히 쥐고 있던 공주 속오군 일부와 유탁, 이지혐이 데리고 온 고을 병력 일부만이 후퇴했을 뿐이다.
남은 수는 천오백 가량.
출진했을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성환이 퇴로가 좋았기에 그정도라도 건진 것이었다.
‘······설마하니 이정도까지 상대가 되지 않을 줄이야.’
권대용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적을 쓰러뜨려 넘길 것 같던 휘하의 병력들은 한순간에 도망치고, 그 뒤로 토벌군이 노도처럼 닥쳐왔다.
그런 자들과 싸울 수 있겠는가?
멍하니 있는 권대용의 귀에 별안간 벽력같은 소리가 꽂혔다.
“이자원 장군은 우리편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이 장군이 토벌군을 이끌고 있는 것이오?”
권대용의 앞섶을 김예상이 강하게 잡아챘다.
그는 분명 이자원도 모의에 참여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성을 들이칠 것이라던 그가 훈련도감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러 오다니.
칼부림이라도 벌일 것 같은 김예상의 흉흉한 기세에 유탁과 이지혐이 재빨리 말리고 나섰다.
“자자, 김 대장. 지금은 그런 것을 따져봐야 소용이 없소. 설마 토벌군에게 가서 몰랐다고 변명할 셈이오?”
이지혐의 말에 김예상이 입을 다물었다.
속아서 가담했다고 하나 역적은 역적.
공주를 통째로 들어먹은 그가 몰랐다고 변명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지고 나면 우리 모두 역적이 될 뿐이오. 이 난국을 어찌 수습해야할지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합시다.”
유탁이 이어서 말했다.
그를 속인 주제에 다같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이유로 뻔뻔하게 나오는 주모자들이다.
그러나 김예상 또한 당장 잘잘못을 따져봤자 의미가 없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의지할 사람은 김 대장 밖에 없소. 우리들 가문을 위해서라도 계책을 말씀해주시오.”
마지막으로 권대용이 슬며시 눈치보며 입을 열었다.
“김 대장의 말을 듣지 않아 큰코를 다쳤으니 무슨 수를 내어놓든 따르겠소.”
김예상은 이런 작자들과 일을 도모했나 싶어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고 간신히 말을 짜냈다.
“공산성으로 후퇴합시다. 금강을 끼고 산세가 막아선 곳이니 쉬이 함락되지는 않을 터. 남은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 굳게 지키는 수밖에 없소.”
“그리하면 이길 수 있겠소?”
권대용의 말에 김예상이 한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기고 자시고 간에 당장 살아남으려면 그 수밖에 없지 않겠소.”
혹시 아는가.
갑자기 북쪽에서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살아날 구멍이 열릴지.
그 오랑캐들은 한편 여러가지 이유로 제코가 석자였지만, 김예상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