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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71화 (71/213)

< 설거지 (1) >

병자호란 당시 정세규(鄭世規)가 이끄는 충청도 근왕군은 험천에서 패한 뒤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경상도 근왕군이 쌍령에서, 전라도 근왕군이 광교산에서 승전해 북진할 때 병력 일부가 합류했을 뿐, 주도적인 역할은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랬으니 정세규에 대한 평가는 높을리가 없어,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고 나자 그는 자연히 감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함경감사를 지낸 바 있는 목장흠(睦長欽)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럭저럭 목민관으로서 괜찮게 일을 처리하고 있던 목장흠에게 급보가 날아든 것은 해가 넘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자신의 관할에서 이런 역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경한 목장흠은 서둘러 속오군을 모아들이라고 지시했다.

"내가 비록 문관이나 토포사(討捕使)로서 남원 도적의 괴수 백룡(白龍)을 잡은 적이 있다. 그때 살펴본 바 도적의 세라는 것은 불길과 같아 한번에 꺼트리지 않으면 두고 두고 근심이 되니, 공주의 속오군을 모두 모아들여 이산과 연산의 역도들을 모두 잡아들이리라!"

그러나 일은 그의 뜻대로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반란에 가담한 공주 속오군 기총 김예상의 귀에 고스란히 그 명령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조정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우선 몸을 빼서 행수께 이런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사오이까?"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아우 김예진의 물음에 기총 김예상은 고개를 저었다.

"감사 영감이 우리가 가담했음은 아직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랬다면 벌써 나졸들이 들이닥쳤겠지. 오히려 속오군을 어떻게 동원할지 고민스러운 터였는데, 감사가 직접 명을 내려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구실이 되지 않겠느냐?"

김예상이 기총으로서 속오군 사이에서 인망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사시에만 동원되는 이들 속오군을 그가 사사로이 끌어모은다면 일이 성사되기도 전에 감사의 귀에 들어갈 공산이 높았다.

그런 위험 때문에 차분히 때를 재고 있던 김예상이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이것을 역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너는 이산으로 가서 행수께 즉각 거병하라고 일러라! 나는 우선 속오군들이 모이는대로 그들을 장악하고 관아를 들이치겠다! 감사만 사로잡으면 충청도가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이야!"

김예상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지휘 체계상으론 감사와 병마사, 영장 등이 병권을 쥐고 있지만 속오군 부대를 실제로 이끄는 것은 그와 같은 하급 군관들이다.

'현순철, 정기양, 정귀방, 이천립······.'

김예상과 끈끈하게 지내던 속오군 잡직 군관들의 이름이다. 그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속속 도착하자, 어리둥절해서 모여든 속오군들을 향해 김예상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간신들이 임금을 겁박하여 나라를 흔들고 있다! 이에 이자원 장군이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는데, 우리 공주 고을에서도 마땅히 호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희가 공을 세운다면 무거운 신역을 벗어던지고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알고 지내던 기총 어른이 이자원의 이름을 팔고, 게다가 신역(身役)을 벗어던지게 해준다니 백성들의 귀가 솔깃했다.

"그, 그럼 이 속오군 노릇도 안해도 되는 것입니까요?"

"물론이다."

김예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군사들 사이로 기이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김예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귀신속이다! 감사 또한 간신들이 보낸 사람인고로, 그부터 엄히 다스려야 한다! 지금 당장 나를 따라 감영을 들이쳐라!"

김예상이 칼을 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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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변변한 싸움 한번 없이 이 공주 땅이 우리 손에 들어왔구려!"

말을 탄 권대용이 껄껄 웃으면서 김예상을 치하했다.

명색이 대장이었지만 갑주 따위는 껴입지 않은 그였다. 무겁고 불편하거니와, 체통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산에서 온 유탁이나 연산에서 온 이지혐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감사의 동원령을 역이용하여 공주를 차지한 김예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죄송하오이다, 행수. 감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 감영 없는 감사가 어디 힘을 쓰겠소? 그런 것은 잊어버리고 어디 관아 구경이나 한번 해봅시다."

권대용이 껄껄 웃으면서 감영으로 들어섰다.

아주 제 세상이나 마찬가지라는 듯한 태도였다.

설마하니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모은 속오군이 반란을 일으킬줄은 몰랐던 목장흠은 제대로 문서를 챙길 틈도 없이 도망쳤다.

"이것이 감영의 속오군적부로군."

권대용은 책 하나를 팔락거리며 말했다.

"충청도 수십개 군현에서 8천 명은 족히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일세."

"감사가 도망쳤으니 그의 명의로 공주 외 다른 고을에서 병력을 끌어모으는 일은 어렵게 되었네. 사로잡았다면 일이 더욱 쉬워졌겠지만······ 에잉."

권대용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방금 전 김예상에게 건넸던 말과는 정반대였다.

"군사를 다룰줄 아는 사람이 그밖에 없으니 무어라 할 수도 없고."

"뭐, 그래도 공주를 손에 넣었으니 일은 반쯤 되었네. 공주의 소식을 들으면 용담에서도 궐기하겠지. 의군이 한번 바람을 탔으니 동참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고."

이지혐이 말했다.

"문제는 이것일세. 공주를 틀어쥐고 서서히 충청도를 장악해나갈 것이냐······."

"아니면 우선 의군들이 대오를 갖추는대로 직산(稷山, 현 천안 일대)으로 넘어가 도성으로 가는 길을 열 것이냐."

어느 전략을 택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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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쪽을 택하든 답이 없사옵니다."

훈련도감이 귀환한 것은 충청감사 목장흠의 다급한 장계가 도착할 때 즈음이었다.

순식간에 공주가 넘어가고 감사는 아산으로 대피했다는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임금은 여독(旅毒)을 풀게 할 틈도 없이 이자원을 편전으로 불러들였다.

"어째서 그러하냐? 요충지인 공주가 적도들의 손에 넘어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을 터인데."

"전자를 택한다면 할거(割據)를 하겠다는 뜻인데 이 나라 조선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사옵니까?"

전국시대도 아니고 명분에서 크게 뒤지는 반란군이 중앙 조정에 대항해 독자 세력을 구축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허면 후자의 경우는?"

"더욱 좋사옵니다. 기껏해야 수천에 불과한 농군들이 일망타진되려 기어 나온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도성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남하하는 중앙군과 맞닥뜨려 박살날 것이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정 모르는 시골 유생들이 이리 흉험한 짓을 꾸밀줄은 어찌 알았겠느냐?"

임금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더이상 이 나라에 자신에게 맞설 자는 없다고 여겼거늘, 방심이 불러온 참사라고 할만했다.

"하루라도 빨리 변란을 진압해야 한다. 훈련도감 병력들은 다 준비가 되었는가?"

"기존 좌부가 맡던 임무를 귀환한 우부가 인수하였고, 좌부는 한창 채비 중이옵니다."

"훈국이 항상 고생이 많다."

임금이 말했다.

그간 굵직한 전투에는 전부 훈련도감이 나가 싸웠으니 말이다.

"전하, 이번에는 어영청에 진압을 맡겨주심이 어떻겠사옵니까?"

가만히 형의 눈치를 살피던 봉림대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영청이?"

"훈국의 피로가 많이 쌓인듯 하니 올리는 말씀이옵니다. 중군 이완의 재주가 썩히기에 아깝고, 또한 어영청의 군졸들이 강맹하니 분명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어영청은 같은 오군영임에도 훈련도감에 비해 그 활약이 미미했으니 어떻게든 공적을 챙겨주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 임금은 약간 미소를 지었지만, 그렇다고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듣기로 적도들이 이자원의 이름을 내세웠다 하니, 그가 직접 나서면 사기가 크게 꺾일 것이다. 훈련도감을 보내도록 하겠다."

"전하······."

"어영청도 함께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전하."

그때 이자원이 나서서 말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함께?"

"그렇사옵니다. 그간 어영청도 훈련에 매진한 것으로 아오니, 한번 점검하는 기회로 삼으심이 어떻겠사옵니까."

이자원의 말에 봉림대군이 무슨 꿍꿍이냐는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기야 그 말도 맞군."

대군의 부탁은 거절하던 임금이 이자원의 말에는 금세 찬동하고 나서지 않는가.

결과적으론 뜻이 이루어진 셈이었지만, 봉림대군의 마음은 어딘가 찜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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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주의는 온통 반란에 집중되어 있었다.

"용담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니 반란이 전라도까지 번진 셈이다. 전주는 무사하겠는가?"

전주는 왕실의 본향이니, 이런 잡병들에게 화를 입는다면 그만한 치욕이 없을 것이다.

임금이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마시옵소서, 전하. 전라 감사 김준룡(金俊龍)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을 것이옵니다."

이조판서 정온이 말했다.

감사로 승진한 김준룡은 병자호란 때도 승첩을 거둔 명장이었으니 임금은 한결 마음을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고생한 훈련대장을 깊이 치하하고 싶으나, 지금은 사세가 급하니 어렵게 되었다. 훈국과 어영청의 준비가 끝났다 하니, 훈련대장 이자원과 어영중군 이완은 즉각 출병하여 역모의 근원을 뿌리뽑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임금의 명령에 이자원이 담담히 대답했다.

===

「막내 아우 보아라.

이것은 은밀히 전하는 서찰인지라 몇 자만 간단히 쓴다.

요즘 간신들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조용조(租庸調)의 옛 법을 폐하려 하니, 부득이 여러 향촌의 양반들이 의논하여 청군측(淸君側)의 기치를 세우기로 하였다.

네가 모시는 이 대장(大將) 또한 뜻을 품으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원지에 나가계신 까닭으로 우선 네가 도성 안에서 거사를 벌여주기를 바란다.

어머니께 듣기로 훈련도감이 오군영 중 제일이요, 네가 대장 아래에선 상좌(上佐)를 맡고 있다 하니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이 성공한다면 우리 형제는 거사의 일등공신이 될 것이요,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겠느냐?

모쪼록 늦지 않게 동참하도록 해라.」

박철균은 몇번째 다시 읽는지 모를 그 편지를 움켜쥐었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뭘 잘못 먹은건지."

실로 오랜만에 큰형과 둘째형에게서 직접 날아온 편지라 내심 기대하며 펼쳤더니, 이따위 소리가 적혀있는 것에 경악한 박철균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이 촌선비들의 허파에 헛바람이 들어갔단 말인가?

'어서 고변해야 한다.'

몇번이고 그리 생각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이것을 고변하고 나면 그의 집안은, 형들은 어찌되는가?

'사실 형님들이 말로만 이리 떠들어댄거고, 실제로는 그냥 집구석에 숨어있을 셈 아닐까? 헛바람든 샌님들이 꾸미는 일이니 나만 입닫으면 아무일 없던 것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도······.'

그런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미적대고 있던 그였지만, 끝내 충청도에서 반란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장 영감, 소관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등청한 이자원을 향해 박철균이 편지를 내밀었다.

"이번 역모에 소관의 형들이 참여한데다가, 소관까지 끌어들이려 하였사오이다. 이를 알고도 숨겼으니 무슨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소이다."

역모는 의금부에서 다스리지만, 우선 상관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자원은 편지를 스윽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도 한참 아무말이 없는 이자원의 반응에 박철균의 몸이 들썩이던 그때였다.

"박 파총."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연좌를 상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는가?"

형들에게 돌머리라 욕을 먹는 박철균이었지만 답을 모를리는 없었다.

"······공을 세워야 하지요."

박철균의 대답에 이자원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편곤을 챙기도록."

작가의말

실제 역모 당시 김예상을 잡아들이기 전에는 공주의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니, 비록 직급은 기총이지만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추안국급안에 따르면 정세에 밝지 않은 일반 백성들은 별달리 역모라는 의식없이 반란에 가담했고, 처형되러 가는 길에도 어느 곳으로 귀양가는 것인지 물을 만큼 사안을 가볍게 본듯합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반란 세력의 프로파간다가 먹힌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편 반란 세력은 속오군 체계를 이용해 병력을 동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군역의 부담이 백성들로 하여금 반란에 가담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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