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심가들 (2) >
새해가 밝았다.
도성 사람들은 서로 세찬(歲饌)을 나누고 옷을 지어입느라 바빴다.
작년 정월 원일과 달리, 도성은 흥겨움에 넘치고 있었다. 그때야 한창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초상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크게 오랑캐를 해치워 전쟁이 끝난지 오래.
비록 북변에서는 호란이 끝난 뒤에도 계속 소요가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이곳 도성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은 먼나라 이야기였다.
사정이 넉넉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모처럼 민가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떡국을 지어먹거나, 형편이 모자란 집은 보리죽을 해먹거나, 그도 아니라면 군불이라도 때어 새해 분위기를 내어보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반면 우의정 강석기댁은 우중충했다.
“이 대장은 참으로 무심한 사람이다.”
어머니 신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서방이 아니라 이 대장이라 부르는 말에, 사위를 내심 멀리하고 싶은 장모 마음이 언뜻 드러난다.
적어도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오랜 격언은 그녀와 그녀의 사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명을 받들어 원지에 나가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유주가 얼굴을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런 까닭에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느냐?”
“나랏일하시는 분이니, 괜히 전장에서 마음이 약해지실까 하여······.”
“그 목석같은 사람이 퍽이나 그러겠구나.”
유주의 말에 신씨가 못내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살짝 불러온 유주의 배에 가있었다.
회임한지 넉달쯤 되었다던가.
이자원이 출정하기 전 생긴 아이였다.
딸이 남편도 시댁 식구도 없는 집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친정에 들어와 몸조리를 하게 했지만, 신씨는 속이 터졌다.
“이 대장은 언제 돌어온다든?”
“듣기로 이미 오랑캐들은 토평되었고 조만간 돌아오실 예정이라 합니다.”
그나마 몸 성히 돌아온다는 소식에 신씨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해산 때까지는 도성에 붙어있겠구나. 이래서 무관과 혼인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어머니.”
유주는 신씨가 딸 걱정에 푸념하는 것임은 알았지만 그래도 한마디 꺼내 말려볼 작정이었다.
“아이고, 알았다. 제 서방 욕은 못참겠다는게지. 그래도 할건 다 하고 산 모양이니 다행이구나.”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어머니는 선수를 쳤다. 그녀의 말에 유주의 볼이 빨개졌다.
‘빨리 돌아오셔야 할텐데.’
유주가 방문 밖으로 화끈거리는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유주는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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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조정의 분위기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우선은 적게나마 명에서 들여온 식량을 가지고 진제를 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회복도 무리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올해부터는 충청도에 전면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할 것이옵니다, 전하.”
임금에게 호조판서 심열이 허리를 깊이 숙여 말했다.
“양전이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구나.”
임금이 말했다.
내정이 든든해야 북벌도 챙길 수 있는 법.
가도의 활용법이나, 꿔다둔 보릿자루처럼 도성에 머무르고 있는 남만승들의 처리도 의논해야 한다.
그러자면 이자원이 돌아와야했다.
“훈련대장이 북변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고 있다 하니, 실로 종사의 홍복이다.. 과연 이자원이로군.”
임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자원이 보낸 장계에는, 기야하찬이 생각보다 빨리 패퇴하긴 하였으나 청군과 싸워 승리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상황에서 아민을 끌어들이다니.’
정묘년의 흉적이긴 하나, 조선의 번견이 되겠다면 받아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물론 처음 생각처럼 기야하찬을 울타리로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가.
아민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이자원이 제대로 마무리를 하고 왔을테니 임금은 따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다시 한번 오랑캐를 깨뜨렸으니 실로 훈련대장의 공이 대단하옵니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들로서는 자세한 전말을 알진 못했지만, 일단 싸워서 이겼다니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오매불망 북벌의 경과를 기다리던 임금이 아니었던가.
온통 그의 관심은 북변에 가있는 듯 했다.
실제적 성과가 얼마나 될지는 차차 따져보아야겠지만 우선은 임금의 시선이 더이상 그쪽에만 매달려있지 않을 것이니 신하들로선 다행이었다.
“다음은 무언가?”
대동법도, 북벌도 보고를 받았으니 굵직한 일은 다 처리했다 생각하고 있던 그때, 의금부로부터 올라온 장계를 펼치던 형조판서 구굉이 외쳤다.
“저, 전하!”
“무슨 일인가?”
무인 출신으로 웬만해서는 호들갑 떠는 일이 없는 구굉이다. 그런 그가 사색이 된 꼴을 보자 임금이 의아하게 물었다.
“도성의 부민 윤택이 고변하기를, 진사 권대용이라는 자가 ‘대동하자는 것이 모두 간신들에게서 나온 꾀다’하여 참람되이 군사를 일으키자 제안하고, 또 이를 위해 군기를 내어놓으라 협박하였다 합니다. 권대용이 윽박지른 까닭에 군기를 내어놓긴 하였으나 이런 흉참한 일을 두고 볼 수 없어 고변했다 하니······.”
구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하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역모!’
도대체 어느 간덩이 부은 놈이 지금처럼 주상의 권위가 극에 달한 때에 역모를 꾸민단 말인가?
‘이름없는 진사놈인가. 별것 아닐테지..’
그러나 임금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청군의 침공을 막아내고 김류를 옥사로 거꾸러뜨린 그에게 하잘것없는 진사 하나가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이것을 이용해서 옥사를 한번 더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확히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공서와 청서 두 당파 모두 자신의 수족들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청서 중 산림 계열은 가끔씩 잔소리를 하지만, 그래도 북벌의 대의를 함께하고 있는 자들이다. 귀찮긴 해도 애초에 임금이 등용한 세력인 것이다.
조정은 더 손댈 것도 없으니 그저 몇놈 잡아다 목을 날리라고 말하려 할 때, 임금은 형조판서 구굉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저, 전하.”
“왜 그러는가?”
임금이 의아하게 묻자 구굉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한편 권대용이 일컫기를 ‘충청도의 지주와 유생들이 마침 통하였으므로 충청도 속오군으로써 의군을 삼을 것이라 했사옵니다······.”
그 말에는 임금도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일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충청도 속오군이 가담한 것이라면, 순식간에 충청도에 반역의 불길이 번질 수 있다.
“당장 권대용을 잡아오라!”
임금이 용상의 팔걸이를 내려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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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용은 정묘년부터 역모할 뜻을 품은 자인데, 이미 여러날 전에 도성을 빠져나갔다 하옵니다. 반역을 도모한 땅으로 이산(尼山) 등지가 거론이 된 만큼 아마 그곳으로 간 듯 하옵니다.”
“얼마 전 대동법에 불만을 품은 부민들이 제 창고에 쌓아놓은 군기를 몰래 도성에서 충청도로 내려보냈다 하니, 실로 충청도 유생들과 공모한 것이 확실한 듯하옵니다.”
임금의 말 한마디에 의금부와 포도청은 도성을 쥐잡듯이 뒤졌다.
부민들이 줄줄이 끌려오고 고문을 당하니 설마 이렇게 쉽게 탄로날줄 몰랐던 그들은 아는 바를 모조리 내뱉었다.
속속 들어오는 정보에 임금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조총과 화약, 탄환과 궁시가 드나드는 것을 어찌 이때까지 아무도 몰랐단 말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훈련도감의 병력이 절반이나 빠져나간터라 그간 도성의 경비가 허술했던 것이 사실이옵니다.”
“뭐라?”
임금이 말했다.
본래 도성의 수비와 치안은 오군영과 포도청이 도맡는다.
그러나 가장 규모가 큰 훈련도감의 우부가 북방 원정을 위해 빠져나가면서 자연히 훈국 쪽 경비가 허술해진 것이다.
조정의 시선도 한창 변란이 벌어지는 북쪽에 가있었고 말이다.
“본래는 훈련대장이 무과에 입격한 초관들을 대거 기용하고, 인원 또한 확충하려 했으나 경하창을 지원하러 급히 출진한 탓에 일이 늦어졌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좌의정 신경진이 말했다.
임금의 표정이 딱딱해지는 것을 본 봉림대군이 서둘러 말했다.
“겨, 경하창을 지원한 것은 필요한 일이었으니 지금 와서 따져보아 무엇하겠소. 지금 시급한 일은 역도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것을 막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그 말이 맞다. 이산 외 다른 고을에서 적도들에게 가담한 곳은 어디가 있다 하더냐?”
대군의 말에 임금도 입을 열었다.
“이산 외에는 연산이 가담했고, 공주에서도 속오군들이 전주를 거쳐 이산에 합류키로 하였다 하옵니다. 또한 일컫기를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역도들이 일어날 것이라 하였고, 또······.”
공초를 읽어내려가던 우부승지가 멈칫했다.
“또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임금의 재촉에 우부승지가 말했다.
“······훈련대장 이자원이 북쪽에서 군대를 몰아올 것이라 하였습니다.”
분위기가 찬물을 맞은 것처럼 싸해졌다.
좌중의 시선이 어느틈에 우의정 강석기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신은 금시초문이옵니다, 전하.”
“그렇겠지.”
강석기가 말하고, 임금이 대답했다.
“권대용이란 놈이 충청도에 다다르기 전에 추포해야 한다. 서둘러 병력을 파견해 뒤쫓고, 감사 이하 지방관들에게도 권가와 불궤를 도모한 역도들을 색출토록 하라.”
“전하!”
임금이 빠르게 대책을 읊고 있을 때였다.
예조판서 김집이 외쳤다.
“이자원을 아끼시는 마음은 잘 아오나, 그의 이름이 역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옵니다. 마땅히 추국의 절차는 거쳐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못들은 셈치고 넘어가려는 임금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도 김집은 강경했다.
“예판은 훈련대장이 이 이름없는 선비놈들의 장난질에 가담했으리라 보는가?”
“신도 훈련대장이 그랬으리라곤 생각지 않으나, 만기를 살피시는 임금께서는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되는 법이옵니다. 김류의 역모 때를 생각해보시옵소서.”
김집의 말은 형식상으로라도 이자원을 추국하라는 것이었지만, 임금이 듣기에는 영 고까웠다.
옥사가 정치적인 목적에 있었던게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금으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이괄의 흉난 때를 기억한다.”
뜬금없이 임금이 이괄의 이름을 들먹이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괄의 난이야말로 긁어 부스럼의 대표적인 예가 아니었던가.
인조의 실책 중 실책이었기에 대놓고 떠들어대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임금은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만약, 이자원이 반역을 일으켰다 치면.”
그의 시선이 신하들을 쓸고 지나갔다.
“그래서 저 훈련도감 병력들을 이끌고 도성에 짓쳐들어오면, 막을 사람이 있는가?”
“······.”
임금은 꿀먹은 벙어리가 된 신하들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선전관은 이자원에게 가서 되도록 빨리 회군하도록 전하라.”
북방에 정신이 팔려있다보니 발 밑에서 못배운 선비놈들이 분탕질을 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래서야 아직까지 미숙한 꼴이 아닌가.
임금은 그렇게 자조했다.
작가의말
차차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지만, 이 권대용의 역모는 실제로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지만 조정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건입니다. 기존 속오군 체계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점,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연계했다는 점, 노비들이 가담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원래는 인조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수년 뒤 일어나야할 사건이었지만 이 세계에선 진작에 물건너갔지요. 대신 권대용은 대동법으로 도성의 부민들과 충청도 일부 사족의 여론이 흔들리는 순간을 노린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