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67화 (67/213)

< 석암진 전투 (8) >

기병이 조선군의 목책에 몸을 부딪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무모하고도 과감한 돌격이었다.

오보이가 우려했던 것처럼, 조선군의 방어는 단단했다.

총탄과 화살을 쏘아낸 직후에도 거창(擧槍)한 살수대의 틈을 뚫기 어려웠고, 양익에서 출동한 조선군 기병들이 청군을 에워쌌다.

"물러나라!"

장수 한 사람의 외침에 청 기병은 일제히 물러났다.

그 뒤를 조선과 여진 기병들이 쫓았다.

"발사!"

그러나 청군은 그냥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 활을 잰 청군이 일제히 반전하며 화살을 쏘아대자,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달려오던 조선측 기병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마상 궁술이 아무리 뛰어난 청군이라 해도 급히 잰 화살이라 여기저기 빗나가고, 더러는 조선군의 갑주에 막히고 하여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다.

반전한 청군과 조선군이 맞부딪히고,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여기까지 오면 전략전술은 별 의미가 없다.

오로지 순수한 힘 대 힘 싸움.

피와 땀이 춥고 메마른 땅을 적셨다.

혹한을 뚫고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미친듯이 창칼이 오갔다.

"한을 시해한 놈들이다! 다 죽여버려라!"

"인조대왕의 원수를 갚자!"

중간중간 죽어버린 홍타이지와 인조를 찾으며 독려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상황은 어찌되어가고 있는가?"

"우리군이 우세합니다."

청장의 말에 부하가 대답했다.

조선군과 닝구타에서 모아들인 청군의 기량은 엇비슷했지만, 기병의 숫자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총병력의 숫자는 조선군이 더 많았지만 청군은 대부분 기병인 반면, 조선군은 일부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놈들이 물러난다!"

장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기어이 승기를 잡아낸 것이다.

이번에는 청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처음 돌격 때와는 달리 저희 편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조선군 보군도 사기를 잃은 것인지 목책 너머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부 때려부숴라!"

한껏 기가 오른 청군들은 목책을 밀어넘어뜨리거나 낮은 것은 타넘으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목책 뿐만이 아니었다.

"이놈들, 칼을 갈고 준비했군!"

마름쇠라 불리는 물건들이 잔뜩 깔려있고, 그 너머에는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조선군들이 조총에 급히 화약을 재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오보이란 놈이 명도 없이 물러났다가 지금 갇힌 것을 모르느냐?"

때문에 장수는 그렇게 명령했다.

"······강행돌파한다!"

===

"장군, 공격을 재고해주십시오."

휘하의 장수들이 아민을 찾았다.

말이 장수들이지 실상 닝구타 근처에 살고 있는, 청에 충성하는 부족장들이다.

그들은 아민에게 조선군을 깨뜨릴 방도를 묻던 때와는 정반대로 그에게 하소연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오늘은 조선군 목책을 무너뜨렸소. 그대들이 원하던 대로 승기를 잡아나가고 있지 않소?"

아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은 모르는 체였지만, 족장들은 그의 태평한 말에 가슴을 칠 뿐이었다.

"하지만 장군, 병력 손실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동만주의 족장들은 기샨이다(gašan i da, 屯長) 혹은 할라이다(hala i da, 姓長)라고 불린다.

청조는 공납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기샨이다와 할라이다들의 자치를 보장해주었기에 그들은 제 부족을 다스리며 사실상의 왕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제 부족의 힘이 꺾이는 것을 좋아할 족장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닝구타가 불타는 꼴을 보고 싶다는거요?"

그러나 아민에게는 '조선군과의 싸움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는 명분이 있으니 족장들로서는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민을 몰아낼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청에 대든 기야하찬마냥 그 질서에서 이탈할 생각은 품고 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정공법으로서 조선군을 몰아내고 있는 중이오. 다른 방안이 있는 사람은 어디 한번 얘기해보시오."

아민의 말에 족장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말인즉슨 맞는 말이었다.

나름 우회로를 찾아 조선군을 파훼해보려는 시도는 사르후다의 패전으로 끝이 났으니,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조선군과 재차 화친을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후르카부의 족장, 즉 할라이다인 소소쿠(索蘇庫)였다.

기야하찬과 같은 후르카부 출신이지만 애초에 그런 분류는 이런 시대에는 의미가 없었다.

"호오, 화친이라."

아민은 흥미롭다는 듯이 소소쿠를 보며 말했다.

소소쿠는 초피를 바치러 심양에 갔을 때 홍타이지의 눈에 띄어 공주를 하사받았으니 청조의 부마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망설임없이 조선과의 화친을 언급하는 것이다.

"맞습니다, 지금처럼 오래 싸움을 끌어보았자 무엇이 남겠습니까?"

"적당히 화친을 맺고 돌려보내시지요."

후르카부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거이커르 성(姓)의 소소쿠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족장들도 앞다투어 찬동했다.

지금까지야 사르후다나 오보이 같은 심양에서 온 장수들이 목소리를 크게 냈지만 그들이 제거된 지금 족장들로서는 청과 조선이 벌이는 건곤일척의 승부에 참여하기보단 빨리 자기네 땅에서 조선군이 물러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 제안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니, 우선 첫째는 한번 화약을 맺고 돌아가는 조선군의 뒤를 쳤으니 다시 받아들일리가 만무하다는 점이고, 둘째는······.

"나를 도와 조선군을 물리쳐야할 제장들이 그리 말하니 내 마음이 무척 아프군."

아민이 말했다.

좌중을 노려보며 내뱉은 그의 말에 소소쿠를 비롯한 족장들이 찔끔했다.

비록 좌천된 인물이라지만 한때 천하를 종횡무진하던 명장이다.

그런 자를 너무 몰아붙인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는 것이다.

"장군,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대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급히 변명하는 소소쿠를 보며 아민은 굳은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저들의 뜻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주어도 곤란하지.'

애초에 아민은 이런 족장들의 반응을 원했으나, 이것을 보고 저들이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것은 사절이었다.

"허면······."

족장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민 문제는 순순히 해결이 되었으니, 이제는 조선을 어떻게 구슬려야할지 생각해야했다.

그러나 아민은 그 해법으로 단지 한마디를 꺼냈을 뿐이다.

"조선군 진영에 사람을 보내겠소."

아민의 자신만만한 말에 족장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과연 한번 속은 조선이 순순히 이것을 받아들일까?

===

'영고탑의 식량과 말, 수레를 내어준다면 돌아가겠다.'

이자원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히 떨어졌다.

당초 재빠르게 아민군을 궤멸시키고 닝구타를 점령해 벌충할 생각이었던 이자원이지만, 아민과 뒤로 손을 잡은 지금 굳이 점령까지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양군의 수장이 만나 직접 세부 조건을 의논하자······."

아민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윗수염 몇십 가닥 빼고는 전부 밀어버리는 만주족의 풍습 탓에 매끈매끈했다.

"좋다."

아민이 말했다.

"장군, 조선군이 암수를 쓸 수도 있습니다!"

"직접 만나 화의를 나누자니······."

족장들은 놀랐지만 아민은 그저 담담히 말했다.

"조선군 따위가 어떻게 내 목을 노리겠는가?"

자신을 꾀어 내려면 손을 잡자는 따위의 장구한 계책까지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화친 논의만 하려면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뒷일을 생각하기 위한 것.'

그렇게 아민이 이자원과의 회담을 쾌히 승낙하자, 가운데서 만나자는 응답이 돌아왔다.

"정녕 조선군과 화친할 속셈이십니까?"

호위조로 붙어 나온 오보이가 미심쩍게 물었다.

아민은 그를 풀어주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경우 자신을 모시고 몸을 빼낼 수 있는 자가 그 밖에 없었다.

"소소쿠처럼 대청의 부마인 자까지 조선군과 싸우기를 두려워하는데 어찌 저들을 다잡아 더 싸울 수 있겠는가."

숫제 오보이 그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아민은 싸우고 싶었고, 또 실제로 조선군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휘하의 동해여진 부족들의 반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친을 맺는다는 식의.

사르후다가 있었다면 이런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오보이는 아직까지 훗날의 권신다운 노련한 정치적 감각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그는 저 멀리에서 오고 있는 이자원 일행을 보았다.

정말로 암습조 대신 이자원이 온 것이다.

"후세가 이를 두고 영웅과 영웅의 만남이라 하겠군."

오보이가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칼을 맞대고 있다가 양군 수장이 나와 회담을 벌이게 되었으니 실로 이자원과 아민, 두 사람의 배포가 커 성사되었다 역사에 남지 않는가.

"오보이, 그대는 저쪽을 경계하라."

아민의 말에 오보이가 항변했다.

"하지만 장군의 지근거리에서 호위해야······."

"이자원, 저자도 호위를 떼놓고 있지 않나."

무위로 따지면 이자원 혼자서 아민의 목을 비틀어도 이상하지 않다 말하고 싶었지만, 오보이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삼켰다.

'제발 별일 없어라.'

아민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그가 죽으면 누가 책임을 다 뒤집어쓰겠는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오보이에겐 이자원과 아민이 나누는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군."

입을 먼저 연 쪽은 이자원이었다.

오로지 통변 한 사람만 사이에 놓고 진행되는 회담.

칼바람에 틔워놓은 화롯불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도 아민도 추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번 만나고 싶었다."

아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필생의 숙적을 죽였다는 자가 어떤 자인지 보아두고 싶었거든."

아민은 홍타이지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이미 눈 앞의 남자가 자신의 속에 숨겨진 야망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떠한가?"

"훌륭하다."

이자원의 물음에 아민이 답했다.

"내가 행복촌을 미끼로 던졌다는 것도, 화친이 거짓이라는 것도 단번에 간파했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하기 까다로운 지형으로 끌어들였지. 무엇보다,"

아민이 입술을 혀로 적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 눈빛."

더러는 그 눈을 두려워하고 피한다.

하지만 아민의 눈은 이자원의 눈동자 너머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대의 눈빛은 나와 닮았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얻어내야만 하지."

아민이 어느새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뭔가? 조선인가?"

아민의 말에 통변이 숨을 헉 삼켰다.

아민은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떨리는 통역으로부터 대강 사정을 전해들은 이자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논의할 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아민, 그대의 문제지."

이자원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아민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그의 눈으로부터 관심을 거뒀다.

"조선의 출병으로 동만주 또한 이미 전장이 되었다. 청으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겠지. 아민, 그대는 그 핑계로 영고탑에 눌러앉을테고."

"아마 조정에서도 그걸 바랄 것이다. 당금 청나라에서 손이 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아민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르후다가 지르갈랑으로부터 하달받은 밀명의 존재를 알았다면 얼굴이 달라졌겠지만, 이미 그는 아민이 먼저 손을 쓴 덕에 불귀의 객이 된지 오래였다.

"조선은 당신을 모든 방면에서 지원해줄 의향이 있다."

"그 대가로 조선이 얻는건 뭐지?"

아민이 물었다.

"청의 멸망."

이자원의 말에 아민이 씩 웃음을 지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기야하찬의 서찰 한 장으로 시작된 원정이다.

이제 수확을 거둘 때가 되었다.

이자원은 지도를 펼쳤다.

작가의말

소소쿠는 홍타이지에게 공주를 하사받았다고 몇몇 논문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찾아보니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딸 가운데 그와 혼인한 사람은 보이지가 않네요······. 아무래도 양녀를 들여서 공주로 삼아 보낸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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