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66화 (66/213)

< 석암진 전투 (7) >

「차하르 친왕 보르지기트 콩고르 에제이는 옛 원 황실의 귀한 씨로서, 실로 일족의 존숭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가 태종의 망극한 죽음을 당하여 옹서(翁壻, 장인과 사위) 간의 예를 다하기 위해 묵던 땅에 머무른지가 오래되었는데, 본래 뿌리가 몽골이라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고 이곳의 노얀(ᠨᠣᠶᠠᠨ)들 또한 여러 차례 차하르 친왕의 귀환을 허락해달라 상주하였습니다.

몽골은 만주와 갈래가 다른 탓으로 다스리기가 쉽지 않으니 반드시 군으로써 위엄을 보이고 또한 사정에 밝은 사람이 수시로 다독여야 합니다. 그간 버이서인 니칸이 몽고아문(蒙古衙門)의 승정(承政, 장관)을 맡아왔는데, 그 헤아림이 크게 미치지 못해 무수한 불만이 쌓이고 있습니다. 모쪼록 황명을 내려 차하르 친왕을 몽고아문 승정으로 삼고, 밝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정(参政, 차관)을 삼아 몽골을 다스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범문정은 올라온 표문의 내용에 당황했다.

그러나 쇼서의 앞에까지 이 표문이 올라왔다는 것은 이미 좌섭정왕 호거의 묵인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몽골의 유력자들이 연명(連名)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추동한 자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대학사."

범문정이 하는 수 없이 상주한 표문의 내용을 듣고 쇼서가 입을 열었다.

"예, 폐하."

범문정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차하르 친왕을 몽골에 돌려보내도 문제가 없겠소?"

"······몽골에서 불만이 쌓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오나, 차하르 친왕이 돌아가 일이 잘못될 경우 더 큰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호거가 이런 무리수를 두는 까닭은 뻔했다.

'몽골을 아예 대놓고 쥐어보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청은 몽고아문이라는 기관을 통해 몽골을 관리하고 있다.

누르하치의 장남인 추옝의 3남 니칸이 승정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도르곤의 형제인 도도, 아지거 등과 여러번 같이 싸운 적이 있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당색이 강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호거는 그를 쳐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에제이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제 측근들을 통해 몽골을 장악하려는 심산이겠지.'

범문정이 혀를 차고 있을 때 쇼서가 말했다.

"좌섭정왕이 짐에게 이 표문을 올린 이유를 알겠소."

아직 아홉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였지만 쇼서는 범문정만 있을 때 은근히 이런 총명함을 종종 드러내고는 했다.

모든 결재는 좌섭정왕 호거의 이름으로 나가고 있지만, 오로지 이 표문은 황제가 알아서 결재케하니 문제가 생기면 쇼서의 탓으로 돌리겠단 소리가 아니겠는가.

"하오나 받아들이셔야 하옵니다."

범문정은 스스로 허탈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대학사······."

쇼서가 혀짧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은 언제까지 형님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하는 것이오?"

"폐하, 말씀을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범문정은 황급히 좌우를 둘러보더니 속삭였다.

최근 호거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원래부터 정황기, 양황기, 정람기의 상삼기를 제 손에 쥐어 우섭정왕 도르곤보다 우세한 그였지만 도르곤파였던 쇼토가 몰락한 뒤로는 완전히 힘의 균형이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무슨 트집을 잡아 피바람을 불러올지 모른다.

범문정이 간곡히 그렇게 말하자 쇼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대청의 한, 혹은 황제가 신하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은 범문정으로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사."

그때 쇼서가 범문정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학사는 내 편이지요?"

"······."

잠시 머뭇대던 범문정은 곧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예, 폐하."

처음에는 머리가 둘 달린 뱀 꼴이 되느니 호거가 아예 실권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으나,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런 희망은 버려야 할 듯 싶었다.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 그리고 자신이 만든 나라다.

결코 망하게 두지는 않으리라.

"신이 방법을 찾아보겠사옵니다."

범문정은 그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우섭정왕 도르곤이 되었든, 혹은······.

뱃속에 꿍꿍이를 품고 있는 야심가가 되었든.

===

"역시나 단단하군."

오보이가 조선군 진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려했던 대로 조선군은 그 사이 단단한 진채를 세운 상태였다.

"장군께서 말씀하신대로 조선군 진열이 그리 두꺼워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부하의 말에 오보이는 그를 슬쩍 노려보았다.

부하는 찔끔해 물러섰다.

오보이가 슬쩍 넘겨다보기에도 조선군의 방어는 예사롭지 않았다.

"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다."

돌격하는 청군을 향해 총화와 궁시가 쏟아지고 살수대에 의해 간단히 막혀버리리라.

결코 들어가서는 안된다.

오보이의 보신 본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군에게 재고를 요청해봐야겠다. 이것은 일점을 돌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조선군 병력이 얇아보여도 그 뒤에 이자원이 준비해두고 있던 예비대가 튀어나오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죽을 것이다.

오보이는 그런 우려를 아민에게 전달했지만, 당연하게도 먹혀들어갈리 없는 변명이었다.

"그래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단 말인가?"

아민이 비웃듯 말했다.

오보이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입만은 열심히 주인을 위해 항변했다.

"방어가 생각보다 굳건합니다. 우리군을 쉬게 하지 말고 진작 들이쳤다면 일이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변명, 변명! 그대는 입만 열면 변명 뿐이로군."

아민이 소리쳤다.

만주 제일의 용사라 자랑하는 오보이였지만 이번 전역에서는 번번이 실패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민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매복을 통해 기야하찬의 목을 얻는 전과를 올렸으니 오보이를 꾸짖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참을 오보이에게 면박을 주던 아민이 툭 내뱉었다.

"그대 휘하의 병력은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물러나 근신토록 하라."

"자, 장군!"

"그 같은 용장을 배제하고 어찌 싸움을 치르려 하십니까?"

휘하의 장수들이 그렇게 말렸지만 아민은 강경했다.

'사르후다가 곁에 있었으면 오보이를 보호해주었겠지만······ 그는 이미 일군을 거느리고 진영을 떠나있지.'

아민은 생각했다.

사르후다가 딱히 반발없이 떠나준 덕에 아민이 운신할 폭은 훨씬 넓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일군을 맡기는 것이 자신에 대한 신뢰의 뜻이라고 생각했을진 모르겠지만, 아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아민은 오보이를 잘라내버리고 본군을 장악한 셈이었다.

사르후다와 오보이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직급이 낮거나 닝구타에서 합류한 자들이라 호거의 입김이 닿지 않았다.

'자, 판은 깔아주었다. 이자원, 네 손에 이 협상이 어찌될지 달렸구나.'

===

사르후다는 그리 군재가 뛰어난 축은 아니었다.

호거가 그를 아민의 곁에 붙인 것은 어디까지나 용이한 감시와 함께, 동해여진에 대한 사정이 밝은 그가 제대로 병력을 모아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르후다 또한 청의 장수였던만큼 군공에 대한 욕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실병력을 지휘해달라는 아민의 요청을 굳이 거부하지 않은 것이고 말이다.

'이대로 돌아가봤자 공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몫이 되겠지.'

돌아가는 길에 오보이에게 살짝 귀띔해둔다면, 사고로 위장해 아민을 죽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공을 세웠다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선군은 우리군과 대치하는 전면에는 두텁게 목책이 세워져 있지만, 뒤편은 방비가 허술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구릉을 우회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듯 합니다."

"음."

척후의 말에 사르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조선군의 동쪽에 있는 구릉은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이었다.  조선군 또한 그쪽에 대해서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자원 그놈이 제아무리 꼼꼼한 성격이라 한들 병력 자체가 넓게 포진한 상황에서는 견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군이 청군의 두 배가 넘는다 하지만, 넓은 전면부를 방어하는데만도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거기다 양 구릉에까지 모두 방어병력을 세워두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이번 싸움에서 조선군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대공을 세우게 될 것이었다.

사르후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슬슬 돌아나갈 때였다.

"지금이다!"

황익이 환도를 뽑아들고 외쳤다.

그의 명령과 함께 총탄과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빌어먹을, 무슨 일이냐!"

사르후다가 어안이 벙벙해져 외쳤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조선군이 매복해있을 것은 뭐란 말인가.

'우리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그 순간 사르후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민이 보여준 장수다운 결기에 잠시 접어두었던 생각이었다.

"젠장, 아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사르후다가 미처 조선군 사수와 포수에 의해 찢겨나간 병력을 수습할 틈도 없이, 황익이 이끄는 기병이 청군을 휩쓸었다.

"오랑캐 놈들아! 어디를 가느냐?"

대장이 보여줬던 그 무위만큼은 아니지만, 황익 또한 칼솜씨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가 앞장서 돌격하니, 사르후다는 제대로 명령을 내릴 틈도 없이 급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황익은 기세 좋게 나선 보람도 없이 사르후다의 공격에 밀려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몸소 적병을 치는 것은 대장이 할일이 아니다!"

보군들 틈으로 돌아온 황익이 그렇게 말했다.

멋쩍은 변명이었지만 이미 기세에서 크게 밀어붙이고 있던 조선군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

"대승이오, 대승이올시다!"

황익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그의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사이호달(沙爾虎達)이라는 자는 어찌 되었는가?"

이자원이 물었다.

간단한 치하의 말을 남긴 뒤 곧장 중요한 문제를 물어본 것이다.

"시체를 수습했사오이다."

황익의 말에 이자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민이 좋아하겠군."

둔아가 전한 말은 간단했다.

조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자신에게 채워진 족쇄가 있으니, 그것을 풀어달라는 말.

저쪽 총사령관과 이쪽 총사령관이 합을 맞췄으니 중간에 낀 말이 죽어나가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자, 이제 잡극 한편을 펼쳐볼까."

===

"오보이도 그렇고, 사르후다마저 패해서 죽다니."

아민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내심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책략으로 사르후다는 끝장이 났다.

이제 막사에 모인 장수들이 믿을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너희 고향인 닝구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너희도 그것을 알겠지.'

아민은 좌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4천에 달하는 조선군이 이대로 청군을 격파하고 닝구타로 진격해 파괴와 살육을 저지른다면?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조선군이 벌이던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장군······ 이제 어떤 책략을 베풀 작정이십니까? 다 방법이 있는 것이겠지요?"

닝구타 출신 장수 한 사람이 나서서 물었다.

사르후다가 있을 때와는 달리, 완전한 아랫사람이 되어 보내는 비굴한 눈빛이었다.

"물론이다."

아민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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