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65화 (65/213)

< 석암진 전투 (6) >

'여기에서 그냥 청군을 박살내도 좋겠지만······ 우선은 다시 한번 도전해볼 일이 있다.'

이자원이 생각했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끌려온 여진인 몇이 두렵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란을 일으킨 경하창과 두 아들이 모두 죽게 생겼구나."

이자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앞에는 왁자지껄하게 나서자마자 제압당해버린 둔아가 꿇어앉아 있었다.

"베려면 베시오."

둔아는 눈을 파르르 떨면서 말했다.

최소한 그 아비보다는 결기있는 태도였다.

"너 따위의 목을 얻어서 어디에 쓰겠느냐?"

그 무심한 말투에 둔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한택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그렇다면 살려주겠단 말이오?"

"아민에게 가서 한마디만 전한다면."

이자원의 말에 둔아가 코웃음을 쳤다.

"더이상 내 이름을 더럽힐 것 같소?"

청에 반역을 일으키고 조선편에 섰다가, 다시 아민에게 사로잡혀 청의 밀명을 수행하다, 또 아버지를 죽인 이자원의 명을 받고 아민에게 가라?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이름 따위가 네 목숨보다 소중하냐? 어차피 이대로라면 반역자와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어야할 몸이 아닌가."

이자원이 말했다.

"내 아버지의 원수는 그럼 누가 갚아준단 말인가? 이자원, 네놈이 내 아버지를 죽였지 않으냐!"

둔아가 소리쳤다.

"이놈이, 감히 대장 영감에게!"

황익이 나서서 호통을 쳤지만 둔아는 눈 하나 끔뻑이지 않고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네 아비는 이미 죽었지만 그 가솔들은 조선 경내에 들어가있다. 내 서찰 한 장이면 전부 목없는 귀신이 될터인데 괜찮겠느냐?"

"이미 기의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둔아는 애써 그렇게 말했지만 이자원은 그것이 허세임을 눈치챘다.

그 말처럼 이제는 몇 남지 않은 둔아의 부하들이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아민에게 협력한 것은 부족을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겠지만 그것마저 물거품된 지금 식구들이라도 살려야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아민과 단둘만 있을 때 이 말을 전해야할 것이다."

둔아가 끝내 굴복하자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대군."

아민이 중얼거렸다.

석두촌에서 마이호리참으로 이어지는 회랑에서 조선군을 격멸할 수 있을줄 알았더니, 조선군은 손쉽게 양면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물리치고 몸을 빼버렸다.

"오보이, 그대와 호각이었다지? 만주 제일의 용사와 수위를 다투다니. 단순히 잔꾀만 부릴줄 아는 자가 아니었군."

"호각이 아니라 소장이 졌습니다."

오보이가 씁쓸하게 말했다.

순수한 용력으로는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자는 없다고 여겼거늘, 검을 든 이자원 하나도 제압하지 못하고 먼저 물러서야 했다.

"그자의 호위도 실력이 굉장했습니다. 간신히 뿌리치고 나왔습니다."

이자원의 명에 따라 그를 쫓아온 자 또한 제법 실력이 있었다.

극이 온전했다면 모르겠지만, 급박하게 뒤쫓아오니 순수하게 기마실력으로 그를 따돌리고 뛰쳐나온 터였다.

"조선인이라 해서 다 순한 양떼만 있는 것은 아니었군."

아민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장군?"

조선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사르후다의 말투는 은근히 누그러졌다.

지르갈랑파로서 아민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지만, 조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점에 대해서는 내심 높은 평가를 내린 그였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아민과 협력해보도록 하자. 그 뒤는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겠지만······.'

양람기에 속한 지르갈랑의 부하가 아니라 청의 장수로서는, 아민이 이전까지와 달리 나라에 충성을 다해준다면 그를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

"적이 구릉으로 물러났다고 했나?"

아민이 말했다.

"지세를 보아하니 형세가 굳어지면 싸움을 벌이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적들이 방비를 마치기 전에 곧장 들이쳐야 합니다."

오보이가 말했다.

조선군은 급히 도달한 상태라 진이고 뭐고 제대로 치지 못한 상태였다.

쳐들어간다면 지금이었지만, 아민은 뜻밖에도 오보이의 말을 잘라냈다.

"아니, 좀 더 두고 보기로 하지."

밤새 조선군의 뒤를 추격한 탓에 청군은 적잖이 지쳐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히려 지치기로는 조선군이 더할 것입니다. 장군께서 그렇게 판단하시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군의 숫자가 적은만큼, 적을 재빨리 들이쳐야 할 것입니다."

오보이가 당황해서 말했지만 아민은 강경했다.

"지난밤 우리군은 조선군에게 격퇴당해 사기가 적지 않게 꺾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을 성급하게 들이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위다."

"그말에도 일리가 있소이다."

사르후다가 아민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자원의 꾀에 그간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았는가.

애초에 여기까지 물러난 것도 이자원의 책략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터였다.

"그리고······ 둔아가 돌아왔다던데."

아민이 슬쩍 말을 꺼냈다.

"용케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돌아왔군요."

"우리와 싸우느라 조선군이 제때 움직이지 못한 틈을 타 몸을 뺐다고 하더군."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지만 군사에 밝지 않은 사르후다는 아민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은 그렇게 끌어주지 못했지만 제 몫은 해냈으니 편히 쉬게 해주어라. 조금 있다 나를 보자하고."

아민이 말했다.

===

"그래, 이자원이 또 어떤 꿍꿍이를 펼치고 있는 것이냐?"

둔아와 대면한 아민이 물었다.

실제로 이자원의 흉계(?)를 가지고 오긴 하였으나 느닷없이 그를 불러 이렇게 묻자 둔아는 당황했다.

"이자원은 나의 공세도, 오보이의 측면 공격도 모두 막아냈다. 조선군 발목도 제대로 못붙잡은 네놈 따위가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리가 없지. 즉 네놈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이자원의 뜻이란 말이 아니냐?"

아민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자 둔아는 주위를 슥 둘러보고 말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역시."

아민은 그러나 소리쳐 밖에 있는 부하들을 불러들이지도, 둔아를 참수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라더냐?"

단지 재차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이자원, 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둔아가 말했다.

"조선과 장군께서 싸워보았자 득을 보는 것은 묵던의 한 뿐이라고 말입니다."

"한이 아니라 좌섭정왕이겠지."

아민이 둔아의 말을 바로잡았다.

조카를 떠올린 그의 얼굴에는 짙은 불쾌감이 감돌았다.

비록 호거가 자신을 사면하고 병권을 쥐여주었다지만 아민은 감사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런 것은 맹수가 아닌, 우리에 갇힌 가축들이나 느끼는 감정이기에.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고작 퇴각길에 가한 공격 한번 뿌리쳤다고 항복이라도 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전에 했던 제안을 반복하겠다······ 그렇게만 전하면 알아들으리라 하였습니다."

둔아가 아민에게 말했다.

'전에 했던 제안이라.'

아민은 허허 웃었다.

분명 이자원은 조선과 손잡자고 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거절했었고.

'기반을 다지지 못하고 조선과 연계해 반란을 일으켜봤자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이니까.'

아마 기야하찬 꼴이 날 것이다.

덧붙여 조선이 미덥지 못한 것도 있었고.

후자야 지난밤의 교전에서 나름 불식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조선을 깨뜨리고 좌섭정왕에게 닝구타의 관리를 위임받는 것이 나아보이는데?"

아민의 말에 둔아가 품 속에서 이자원의 서찰을 꺼냈다.

"이런 것은 진작에 주었어야지."

둔아가 설마 뜯어본 것은 아닐지 의심한 아민이었으나 봉인은 멀쩡했다.

애초에 한문을 읽지 못하는 둔아는 봐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그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손을 잡지 않으면 영고탑에서 십년을 머물러도 뜻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문(序文) 한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 서찰은 아민의 정곡을 그대로 찔렀다.

「영고탑이 호구가 많고 번화하다 하나 천하의 변방이요, 그 군사는 정예하지 못하다. 물산은 넉넉지 않고, 창칼과 갑주 또한 심양과 요양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스스로의 힘이 모자라면 다른 나라와 통해야 할 것인데, 영고탑은 대명과도 멀고 몽골과도 머니 오직 조선과 통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저 야만한 북금(北金)의 신하를 자처하겠는가?」

아민이 입술을 짓씹었다.

봄보고르처럼 옛 수도의 터나 차지하고 저도 나라를 세웠느니 떠들어대는 자의 밑에 들어갈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겉으로는 계속 청의 신하를 자처하되, 뒤로는 조선과 통하여 물자를 쌓고 동해여진을 규합하면 대망을 이룰 수 있다.」

"청의 신하를 계속 칭하라?"

청을 버리고 군사를 일으키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이자원이 만약 입만 산 자였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스스로의 기량을 증명해보였지 않은가.

적어도 되는대로 막 지어내는 말이 아닐 것이었다.

「영고탑은 옛 발해의 도읍으로 실로 흥왕지지(興王之地)라 할만하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스스로 우뚝 서야하는 법이다. 무엇이 그대에게 진정 도움이 될지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라.」

"이 요사스런 혓바닥이 그간 사람을 홀려왔구나."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판단하는 재주.

쇼토 등은 거기에 속아 알면서도 당했으리라.

아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둔아. 돌아가서 내 뜻을 전하라."

하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

"둔아가 다시 조선군 진영으로 도망갔습니다."

오보이의 말에 좌중이 일순간 굳었다.

"아니, 그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철새처럼 돌아다니는건가? 양군 진영이 제집 안방인줄 아는 것이 아닌가?"

사르후다가 황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둔아 또한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황당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르후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잡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놈 따위가 무슨 재주가 있어 우리군을 방해하겠소. 놔두시오."

아민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다행히 둔아는 제 아비를 닮아 달아나는 재주 하나는 좋은 모양이었다.

아민이 뭐라 하기도 전에 다시 사로잡혀왔으면 살짝 골치가 아플 뻔했다.

"우선은 적을 어떻게 공략할지부터 논의해보는 것이 좋겠소."

"하루만에 적들은 목책을 세우고 방비를 든든히 마쳤습니다. 그러게 진작에 놈들을 들이쳤더라면······."

오보이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만한 판을 벌인 이자원이다. 과연 곧장 들이쳤어도 승산이 있었을진 아리송한 아민이었다.

'오보이는 사르후다에게 붙었었지.'

아민의 눈동자 속이 착 가라앉았다.

이자원이 처음 건 계략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모여있는 장수들이 유사시 자신과 사르후다, 둘 중 어느쪽의 편을 들지 대충 윤곽이 잡힌 것이다.

"오보이, 그대는 정면을 들이쳐라."

"적들의 저항이 완강하지 않겠습니까?"

"양 구릉 사이가 상당히 넓으니 조선군의 전열은 넓고 얇게 늘어설 것이다. 만주 제일의 용사인 그대가 그정도 전열도 뚫지 못하겠는가? 두 세 차례 돌격을 감행하고 나면 적들의 주의는 정면으로 끌릴 것이다. 어쩌면 이자원이 직접 나설수도 있겠지."

"사르후다, 그대는 전장을 우회하라."

"알겠습니다, 장군."

아민은 사르후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의외로 고분고분한 사르후다였지만 아민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이자원······ 판을 깔아줄테니 어찌 나오는지 보기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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