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암진 전투 (5) >
조선군이 이동하고 있는 길은 얼어붙은 강의 동편, 산지와 면한 한갈래 평지길로서, 청군의 추격에 취약한 위치였다.
이자원이 직접 나선데는 이유가 있었다.
"후미는 신경쓰지 말고 차근차근 이곳을 빠져나가라!"
이자원은 바짝 긴장하여 걸어가는 병사들을 보고 외쳤다.
그가 이끄는 한무리 조선 기병들이 앞을 향하는 보군들과 엇갈려 길 한쪽을 달렸다.
"장군, 정녕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적비는 이자원의 무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하더라도 우선 그의 목적은 이자원의 호위였던만큼 만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무엇보다 기병들의 기량 자체도 청군보다는 조선군이 모자랄 것이 아닌가.
적비가 솔직히 그런 의견을 털어놓았다.
"호랑이가 이끄는 양떼가 양이 이끄는 호랑이떼를 이기는 법이다. 게다가······."
이자원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적이 반드시 호랑이라는 법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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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마병들을 내보냈습니다!"
부하의 말에 아민이 코웃음을 쳤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군."
최대한 시간을 벌려는 수작.
하지만 둔아의 공작으로 조선군의 움직임은 지체될 것이 뻔하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서 조선군의 옆구리를 후려칠 오보이도 있다.
그렇다면 저 앞의 조선군 기병들은 아무 의미없는 시간벌이를 위해 출동한 셈이 아니겠는가.
아민의 눈에는 그저 각개격파를 당하려 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야하찬은 고작 우리군 쉰 명에게 패해 도망쳤다! 저놈들도 마찬가지다! 조선군과 그에 붙은 야인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아민의 말에 청군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적비, 등을 맡긴다. 내 뒤를 따라라!"
저쪽에서 큰소리가 나는 것을 본 이자원이 말하며 마편을 휘둘렀다.
엉덩이를 철썩 맞은 말이 빠르게 달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환도를 치켜든 이자원이 앞선 청군의 허리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한박자 늦게 그의 허리로 창을 뻗어오는 청군의 머리를 적비가 칼로 꿰뚫어버렸다.
"죽어라, 오랑캐 놈들아!"
이자원의 뒤를 쫓아온 조선군 기병들이 마구 병기를 휘둘렀다.
청군 기병들 또한 기세좋게 창칼을 맞댔지만 양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괴, 괴물······."
앞장서서 천지검을 휘둘러가는 이자원의 모습에 청군들은 주춤거렸다.
빈틈을 노리려고 해도 뒤에서 그를 철통처럼 호위하고 있는 적비 때문에 다가서기 쉽지가 않았다.
"적이 20보 안으로 들어왔소이다!"
"네가 처리해라!"
이자원의 말에 적비가 비도를 날려 청군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이자원이 먼저 청군의 대오를 헤집어놓고, 조선군이 움직이자 숫자 자체는 비슷해도 상황은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조선 놈들이다! 겁먹지 마라!"
청군 장수가 소리쳤지만 청군들은 여전히 주춤거렸다.
'이런, 이래서 촌뜨기놈들은······!'
장수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아민이 심양에서 끌고 온 팔기군은 약 50명.
오보이가 기라라지를 격파한 병력이 그것이었다.
청의 중심에서 많은 실전을 치러본 이들이었기에 지금 아민이 데리고 있는 병력 중 정예함으로 따지면 최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측면 공격을 감행하는 오보이를 따라간 상태였다.
지금 이자원과 맞서는 기병들은 모두 닝구타에서 초모한 병력.
실전 경험이야 상당하다지만 기껏해야 동해여진 원정 때 동원되었을뿐, 이렇게 대규모로 맞붙어본 적 따위는 없는 자들이었다.
심양의 정예 팔기라면 모르되, 정예함으로 따지면 조선군이나 닝구타군이나 거기서 거기였던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세까지 밀리니 답이 없군······.'
장수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그때, 지척에 날아온 이자원의 칼이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나 이자원이 적장의 목을 베었다!"
순수한 힘과 힘, 기세와 기세의 대결.
이자원이 적의 기선부터 제압해내자 어쩔 수 없이 적들도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군이, 밀리고 있다고?"
그 모습을 본 아민이 눈썹을 꿈틀했다.
기습이란 이점을 갖고서도 조선군에게 밀려난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밀려난 병력을 불러모아라. 다시 한번 공격을 감행해야겠다."
아민이 말했다.
"야간이라 병력 수습이 쉽지 않을텐데, 시간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
부하의 말에 아민이 소리쳤다.
"조선군 또한 둔아와 오보이에게 발목을 잡혔을테니 시간은 충분하다! 우선은 적 기병부터 깨뜨린다!"
아민이 소리쳤다.
쉰이 넘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이런 꼴이라니.
아민이 칼을 고쳐잡던 그때, 부하가 말했다.
"조선군, 조선 기병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뭐라?"
아민이 말했다.
호각(胡角)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중 조선군의 호각도 있을테지만, 청군의 신호와 섞여 알아보기가 힘들 터인데?
그때 아민의 귀에 은은한 총성이 들려왔다.
"호각이 아니라 총이구나!"
조총은 그 특성상 마상에서 다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휴대가 가능한 삼안총(三眼銃)이라면 제한된 상황에서나마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다.
예컨대 병력에 신호를 내리는 용도 등으로 말이다.
"우리를 놔두고 적들이 물러가는 이유는 뻔하다. 오보이의 측면 견제를 파악한 것이겠지."
아민이 말했다.
"오보이에게 전하라! 반드시 본군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적을 붙들어 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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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이는 극을 들고 돌격했다.
눈 앞에는 느릿느릿 걸어가는 조선군의 얇은 전열이 보였다.
"적들을 들이쳐라!"
팔기가 앞장서고, 닝구타에서 초모한 기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
함경도 군사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청군의 습격에 혼비백산해 주저앉았지만, 부지런히 훈련을 받아왔던 훈련도감 군사들은 놀란 와중에도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살수대!"
초관의 외침에 일제히 창이 들여올려지고, 한바탕 총화(銃火)가 돌격하는 청군을 헤집었다.
조총의 기나긴 장전 과정을 급하게 해치우고 쏘아낸 것이라 몇발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맞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청군의 첫 돌격을 막아내기엔 충분했다.
"쯧, 생각보다 저항이 완강하군."
오보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다시 한번 조선군을 찌르거나, 아니면 조금 움직여 다른 곳을 쑤셔볼 요량으로 입을 열 때였다.
"훈련대장께서 오셨다!"
"대장 영감!"
밤이었지만 달빛 덕에 오보이는 대열의 앞에 서서 달려오는 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두정갑을 입고 환도를 빼어든 남자.
"이자원······."
오보이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내가 오늘 대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이자원, 네놈 거기 꼼짝 말고 있거라!"
오보이가 외쳤다.
포로로 잡힌 굴욕을 앙갚음할 기회이기도 하거니와, 신기에 가깝다는 이자원의 무위에 호승심이 부풀어오른 그였다.
"자비를 베풀어달라 청하던 놈이 풀려나더니 한번 겨루어보자 큰소리를 치는군요."
그 소리를 들은 적비가 말했다.
"만주어를 할줄 아는가?"
"조금 배웠습니다."
조선어를 원어민에 가깝게 구사하는 것을 보면 명에서는 처음부터 그를 대조선용으로 키웠다는 소리인데, 만주어를 할줄 안다는 말은 따로 자신이 배웠다는 뜻일까.
이자원은 적비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이자원은 오보이 쪽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지나간 모양인지 달빛이 휘영청 비추었다.
훗날의 권신, 그리고 만주 제일의 용사.
사로잡혔을 때는 전자 쪽의 모습만 보았으나, 지금 눈에 보이는 자는 완연한 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바투루라는 칭호가 허명(虛名)인지 아닌지 검증해보지."
맞서 달려간 이자원이 서늘한 목소리로 칼을 휘둘렀다.
묵직한 검격에 오보이가 당황한 것도 잠시, 리치 차이를 이용해 능숙하게 극으로 이자원의 허리께를 후려친 오보이였다.
"······!"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자원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히 본신의 검술은 일절에 올랐다 할만했으나, 오보이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대단하군!"
오보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신의 무용으로만 따지면 아직까지 자신을 뛰어넘는 자를 본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이자원의 무예에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보이가 극을 휘두름과 동시에, 이자원의 칼이 극의 귀를 걸어버렸다.
오보이가 기라라지와 싸울 때 그의 창날을 걸어버려 승리를 거뒀지만, 같은 상황임에도 오히려 그것을 의도한 것은 이자원이었다.
이자원은 힘을 주어 극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맞붙은 오보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컥!"
정통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오보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가있던 그의 손이 이자원을 향해 휘둘러졌다.
급히 이자원이 상체를 뒤로 빼자, 소도가 목 끝을 훑고 지나갔다.
오보이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정타가 들어갔는데, 그 짧은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소도를 빼어든 것을 보면 그 또한 보통은 아니었다.
이자원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시 이자원의 천지검과 오보이의 극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사람과 말의 체중이 가득 실린 묵직한 충격과 진동이 손을 타고 퍼져나갔다. 손이 찌르르 울렸지만, 이자원도 오보이도 둘 다 놓지 않았다.
'전에 쓰던 검이라면 부러졌겠군.'
이자원이 내심 생각했다.
그러나 석다산의 장인들이 만들어준 검은 역시나 명검인지라 그런 일은 없었다.
"하, 지금은 더 싸울 계제가 아니로군."
반면 극을 손으로 쥐고 있던 오보이가 말했다.
방금의 충돌로 창대가 속에서부터 미묘하게 갈라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다음에 다시 한번 겨루어보자!"
오보이가 만주어로 그리 외치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적비."
"예, 장군."
"쫓아가서 베어라."
오보이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망치는데 순순히 놔줄 이유는 없었다.
이자원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다른 조선군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또한 하룻밤 사이 두번째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지쳐보이지는 않았다.
훈련 덕인지 아니면 호란 때부터 잇따라 거쳐온 실전 덕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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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무사히 외길 구간을 빠져나왔다.
둔아는 허무하게 제압당했고, 아민과 오보이의 습격 또한 좌절되었으니 더는 발목을 잡을 자들이 없었다.
아민은 청군을 수습해 계속 추격해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자원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여기에서 싸움을 벌인다."
훗날 마이호리참이 들어설 이 곳은 그 지형이 쌍령과 흡사했다.
"싸움을 벌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뜻이지."
이미 한번 그곳에서 이겨본 이자원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지형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청군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쉽게 이쪽으로 들어오겠사오이까?"
이자원에게 황익이 물었다.
"저들은 포기하지 못한다."
청 조정 내부에서는 엄청난 정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
조선군 4천이 그대로 청군의 아가리를 빠져나간다면 아민이든 사르후다든 심히 곤란해지리라.
'아민이 내 손을 잡았다면 좋았겠지만.'
조선군이 닝구타를 점령하더라도 눌러앉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파괴해 청이 동만주 통치하는 중심지를 날려버리는 것도 제법 타격을 주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좀 더 이용할 방법이 있었으면 했다.
이자원의 생각은 그때 들어온 보고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대장 영감, 청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동북 전역 최후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