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63화 (63/213)

< 석암진 전투 (4) >

"둔아."

'살아있었나.'

이자원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둔아는 석두촌 북쪽에서 병력 일부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청군을 피해 간신히 도망쳐 강 윗쪽을 통해 돌아왔다던가.

"네 아비는 군령을 어겨 처형당했다. 알고 있느냐?"

기야하찬의 죽음은 숨길수도 없었고, 이자원 또한 딱히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곧장 그를 처형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이자원이었다.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둔아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도 다시 우리군에 돌아왔단 말이지."

이자원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둔아는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우리 부족은 세력이 꺾이고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쓴데다 아버님과 형님까지 돌아가셨으니 조선 외에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아버님의 일은 안타까우나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제법 절절한 이유였다.

부모의 원수가 무엇보다 중요한 조선과 달리 여진족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누르하치 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명 밑에서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가.

뒤로는 칼을 갈고 있었지만.

"좋다. 받아들이지."

"대장 영감, 하오나······."

뭐라 반발하려는 황익을 이자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금은 사람 하나하나가 아쉽다. 둔아가 제 아비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는 상국에 충성을 다하려 하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대장 영감."

둔아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엎드린 그의 표정은 그 무엇보다 싸늘했다.

그리고 둔아를 내려보는 이자원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

'아민이 정말 대청에 대한 충성심이라도 생긴 것인가?'

사르후다는 아민을 힐끔 쳐다보며 머리를 싸맸다.

모르긴 몰라도 아민이 조선의 회유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했다면 저렇게 태연한 표정을 지을리는 없지 않을까.

'어쨌든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아민을 놔두어야겠군.'

사르후다는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조선의 이간에 당하지 않으려면 그 수가 최선이었다.

지르갈랑의 명은······ 대세가 완전히 결정되었을 때 완수해도 되지 않겠는가.

"둔아가 조선군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고?"

"예, 장군."

아민의 물음에 부하 하나가 답했다.

"단 수십 명이라도 일거에 움직여주면 적들은 지레 혼란에 빠질 것이다."

행군 중 대열에서, 혹은 운이 좋다면 물자를 불태우면서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둔아가 의심을 사서 제거될 가능성 또한 있지만, 아민으로선 그렇다해도 손해볼 것이 없었다.

"조선군은 언제쯤 철군하겠다 하더냐?"

조선군 진영에 다녀온 오보이를 보며 묻자 그가 말했다.

"이틀 동안 준비를 마쳐 움직이겠다 하였습니다."

"이틀씩이나?"

물론 화친을 맺었다고 알고 있을테니 시간을 넉넉히 들여 움직이는 것일수도 있지만, 아민은 어쩐지 수상했다.

"조선놈들은 적지에 들어와 서둘러 후퇴하고 싶을텐데 이틀이나 시간을 들이는 것도, 그것을 우리한테 곧이곧대로 말해주는 것도 수상하다."

아민의 말에 사르후다가 답했다.

"저들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란 말이오?"

"그렇소."

아민이 의심의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조선군은 당장 오늘밤에라도 후퇴할 것이오."

===

"우리는 오늘밤 퇴각한다."

이자원이 말했다.

"예?"

황익이 놀라 물었다.

화친 얘기가 오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계책인줄로만 알았지, 진짜 물러간다는 얘기를 듣자 놀란 것이다.

"군수품을 일부 챙겨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야음을 틈타 행군하자면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오이다. 아마 밤새 걸어도 수십리도 못가지 않을지······."

청군의 눈을 피해 움직이자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한둘도 아니고 4천이나 되는 대군이다. 단순히 사람이 걷고 움직이는 것도 힘든데 강이 얼어 수운을 이용할 수 없는 판이니 말과 수레를 통해 물자를 운반해야 한다.

야간에 움직이는 것은 끔찍한 교통정체를 불러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것을 지적하는 파총 한 사람의 말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자원은 단순히 청군의 눈을 피해 도망치기 위해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러나 이곳까지 가는 것이라면 어떠한가? 석암진에서 멀지 않으니 여기까지 내려가는 것 정도야 밤중에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자원의 손가락이 지도상의 한 점을 짚었다.

마련하. 청말 닝구타와 훈춘을 잇는 제2역참, 마이호리참(瑪尔瑚哩站)이 생기는 곳이다.

야춘과 훈춘을 거쳐 닝구타로 나아온 조선군은 당연히 이곳을 지나왔었다.

그때 지세를 꼼꼼히 살펴본 이자원이었다.

"예, 가능이야 하겠사오이다만······."

파총의 말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적을 맞는다."

===

"하이고, 여기까지 와서 퇴각인가."

병사 하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오랑캐놈들과 한번 시원하게 붙어보지도 않고 물러날거면 왜 이 추운 곳까지 왔대냐."

다른 병사가 거기에 말을 보탰다.

강이 얼고 나서 기병끼리 한번 맞붙고 나자 바로 내려간다는 소리를 들은 그들로서는 그런 의문이 당연했다.

"이놈들아, 싸우지 않아야 살아돌아갈 공산이 크지 않겠냐."

조을동이 그들에게 핀잔을 줬다.

오랑캐들에게 상감 마마의 원수를 갚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위해 구태여 자신이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은 그였다.

"이보게, 조 대장!"

"아, 예. 초관 나리."

뒤에서 들려온 초관의 부름에 조을동이 고개를 슬쩍 조아리며 말했다.

품계로 따지면 초관이나 저나 비슷했지만 자신은 졸병 출신 잡직이고 초관은 무과에 입격한 정직에다, 편제상으로 상급자였으니 아니꼬우나마 깍듯이 존대하는 그였다.

"자네 휘하에 살수대 인원이 몇이지?"

"두 놈이 싸우다 죽고 얼어죽고 하여 여덟 남았사오이다."

"그정도면 되겠군."

머릿속으로 숫자를 헤아려보던 초관이 말했다.

"대열을 옮기게."

"예? 그러면 다른 대와 합이 맞지 않을 것이외다."

"원래는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데······ 자네만 알고 있게."

초관이 거드름을 피우며 설명해주었다.

조을동이 거기다 대고 무어라 하겠는가. 다만 시키는대로 움직이고 나니, 근처에 변발한 오랑캐 몇이 보였다.

"에이, 하필이면 오랑캐 놈들 옆으로 옮기고 지랄이오."

고발피가 침을 칵 뱉으며 말했다.

조선군편으로 와르카인가 왈칵인가 하는 여진 부족 몇이 가담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부터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저치들은 왈칵이 아니라 호이합(瑚爾哈, 후르카)인가 하는 놈들이라데."

고발피의 말을 들은 조을동이 답했다.

"잘 아시는구려. 형님 무슨 오랑캐 공부라도 했소?"

"아니, 나도 들은 소리야."

조을동은 불안한 표정으로 후르카부의 병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

"둔아의 병력을 흩어놓는 것이 낫지 않겠사오이까?"

황익이 조심스럽게 이자원에게 간했다.

하지만 이자원은 담담히 말했다.

"둔아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오히려 청군이 언제 들어올지 가르쳐주는 꼴이 될 것이다."

기온이 더욱 떨어진 만주의 밤은 더욱 혹독했다.

황익은 굳이 밤에 움직여야 하나 싶었지만 이자원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아민 같은 늙은 여우를 때려눕히기 위해서는 이정도 연막은 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장 영감! 청군이 접근하고 있사오이다!"

그러나 아민은 이자원의 예상보다 한발짝 빨리 움직였다.

조선군이 야음을 틈타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민은 곧장 군사를 동원했다.

"역시! 조선이 얕은 꾀를 부렸군!"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병력을 대기시켜 놓은 것이 주효했다.

"바로 들이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보이의 물음에 아민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조선군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군 대열에서 불이 올랐습니다!"

그때 척후가 달려와 외쳤다.

'지금이군!'

"오보이! 일군을 이끌고 조선군의 옆구리를 들이쳐라! 나는 조선군의 후면을 공략하겠다!"

"나는 무엇을 해야겠소, 장군?"

사르후다의 물음에 아민이 대답했다.

"그대는 본군에 남아 지휘하시오."

사르후다의 못미더운 군재 때문에 그리 말하는 아민이었다.

'조선이라.'

그의 기억 속 조선은 정묘년 당시 변변하게 저항하지도 못하고 화의를 애걸하던 자들이었다.

사촌동생 홍타이지가 조선에서 죽었다 들었을 때는 제법 놀랐지만, 전투에서 패해 죽은게 아니라 포에 맞아 암살당했다는 사정을 듣고 나자 그럴만하다 생각했다.

그 뒤 청군이 대굴욕을 당하면서 쫓겨왔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에 대한 평가를 약간 올리긴 했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은 그로서는 조선이 영 미덥지 않았다.

'문약한 자들과 어찌 큰일을 도모하겠는가.'

그냥 조선군을 물리치고 당분간 청의 그늘 아래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이 나아보였다.

"조선놈들아! 나 아이신기오로 아민의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아민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가 외치는 만주어를 조선군은 당연히 몰랐지만, 종군한 여진 부족들은 그 외침을 듣고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민!"

아민은 30년 전 우라(烏喇) 정벌전부터 싸움에 나서 수없이 이겨온 명장이다.

한때 연길과 훈춘 등에 살다가 조선에 들어온 변방의 여진인들이라 해도 그의 명성을 듣지 못한 자가 없었다.

"동요가 심하군."

이자원이 말했다.

"그가 청군의 주장임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인데."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니겠사오이까."

적비가 곁에서 말했다.

"둔아의 병력은 제압했는가?"

"예, 대장 영감."

군량을 태워먹으려던 둔아의 병력은 불길만 올린채로 미리 대기시켜두었던 살수대에게 진압당했다.

이것으로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날 염려는 없어졌지만, 아직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군과 맞닥뜨렸으니 큰일이었다.

"황익. 그대가 시간을 끌어······ 아니, 안되겠군."

마병별장 황익을 바라본 이자원이 말을 멈췄다.

황익 정도가 아민을 정면으로 맞상대할 수 있을리는 없었다.

황익 뿐만 아니라 이곳의 누구도.

"내가 직접 나서겠다."

이자원의 말에 좌중이 경악했다.

"대장 영감께오서 출진하시면 군은 누가 지휘한단 말이외까?"

우부천총이 외쳤다.

그의 물음에 이자원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 소관이······?"

"목표 지점까지만 가면 되는 일이다. 하지 못하겠나?"

설마 자신에게 시킬줄은 몰랐던 천총이었다.

이자원이 훈련도감 우부를 끌고 왔으니 당연히 천총도 종군했었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지휘를 이자원이 챙겼으니 그는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전(前) 중군 이현달과 붙어서 작당을 한 몸이니 대장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여겨 말도 못꺼내고 있었던 그였으나 느닷없이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해내겠사오이다."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천총의 결연한 말에 이자원이 냉정하게 말했다.

===

이자원은 말에 올라타 환도를 뽑아들었다.

「신책구천문묘산궁지리」

어째 놀리는 듯한 검명이었지만 과연 명검은 명검이었다.

가도에서의 싸움 때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으니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두려운가?"

뒤에 도열한 조선과 여진의 기병들을 보며 이자원이 물었다.

그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차마 그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너희는 수없이 청군과 싸워보았다. 남한산성에서, 갑사창에서, 청천강에서, 가도에서······ 이제 와 늙은 여우 하나가 두려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맞습니다!"

기병 하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상승장군(常勝將軍)께서 계신데 어찌 저희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싸워서 항상 이기는 장군.

낯간지러운 칭호였지만 병사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호란 때부터 수 차례를 싸워 한번도 지지 않은 훈련대장이 아닌가.

그가 직접 나서서 적과 맞서겠다는데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오랑캐를 쳐부수고 임금의 원수를 갚자!"

"상승장군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전군, 돌격!"

이자원이 이끄는 기병들은 아민의 병력과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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