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62화 (62/213)

< 석암진 전투 (3) >

아민의 선언에 좌중은 잠시 침묵했다.

"이자원은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오."

사르후다가 말했다.

"이미 화친을 맺었다가 그 뒤를 치는 것은 조선이 우리를 상대로 쓴 방법인데, 설령 진실로 물러갈 생각을 품었더라도 그런 방비도 하지 않겠소?"

"그렇다 해도 파고 들어갈 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소."

아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사르후다에게서 고개를 돌려 오보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화친 외에 이자원이 전하라 한 다른 말은 없더냐?"

"예. 없었습니다."

오보이가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사실 이자원이 그를 통해 건넨 제안은 하나가 더 있었지만, 오보이는 아민에게 그것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아민이 아니라 사르후다에게 이 사실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

둔아는 기야하찬의 예상과는 달리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비록 청의 포로가 된 신세였지만 말이다.

민가 한구석에 갇혀 추위에 떨던 둔아는 청군의 부름을 받고 끌려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아민이 머물고 있는 집이었다.

둔아가 갇혀 있던 곳과는 달리 공기도 훈훈하고, 허기짐을 달랠 육포도 놓여있었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몹시 흉흉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람의 머리였다.

"아, 아, 아버님······. 어째서!"

둔아가 아버지 기야하찬의 목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조선이 네 아버지의 목을 베어 보냈다. 화친 선물이라 하더군."

아민이 둔아에게 술을 따라 건네며 말했다.

이런 변방 족장의 아들이 한때 후금의 서열 3위였던 아민이 주는 술을 받았으니 실로 영광이 아닐까 싶지만, 지금 둔아에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조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둔아가 외쳤다.

"조선놈들의 의리가 그와 같은 것이다. 네 아버지는 그런 놈들을 믿었기에 죽은 것이야."

아민은 자신이 기야하찬을 사로잡았더라도 당연히 죽였으리란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금은 둔아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이 대청의 강토를 범한 자를 어찌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화친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조선군과 화친을 맺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아민은 조정에 자신을 고까워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홍타이지의 원수인 조선군을 그냥 보내줬다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어차피 조선이 닝구타까지 위협한 사실을 알리면 조정 입장에선 방비를 더욱 강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청의 상황상 닝구타에 머무르며 조선을 격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아마 여기서 조선군을 물리치면 더욱 확실해지리라.

"내 너의 죄를 씻을 기회를 주겠다."

아민의 말에 둔아가 멍하니 그를 올려보았다.

"청에······ 협력하라는 말씀이시오이까?"

"그렇다."

아민이 답했다.

"비록 대청에 반항한 역적이지만 공을 세운다면 죄를 사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네 아버지도, 형도 죽었으니 너희 부족을 추스릴 수 있는 자는 너 밖에 없지 않으냐?"

반란에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청 조정이 과연 둔아를 살려둘지 모르겠지만, 그때 가서 말을 뒤집는 것 정도야 뭐가 어렵겠는가.

지금은 둔아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소인이 뭘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조선 군영에 복귀하도록 하라. 조선군이 철군하는 틈을 타 적당한 곳에서 혼란을 일으켜라."

후르카군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정도 소수의 병력이라도 결정적인 순간 조선군 가운데서 날뛰어준다면 심장에 꽂힌 비수가 될 것이다.

"하겠습니다."

둔아의 눈은 조선에 대한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이대로 청에 돌아가면 너의 운명이 어찌될 것 같으냐?'

이자원이 물었다.

오보이는 그것이 눈에 선했다.

쇼토 쯤 되는 이조차 패전의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 들만큼 청은 패자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렇게 가만히 묶여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면 처벌을 피하지 못하리라.

'너를 풀어줄테니 내가 시키는대로 해볼테냐?'

'무슨 말이오?'

오보이가 물었다.

'아민에게 전하라. 자립할 생각이 있다면 조선이 돕겠다고.'

"이자원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오보이의 말을 들은 사르후다가 물었다.

"한윤과 한니(한택)를 이용했듯이, 우리를 이간질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쇼토가 당한 반간계는 청나라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한윤을 모함한 건에 대해서는 엉어투가 다 안고 간 덕에 쇼토는 목숨은 건졌지만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쇼토는 알면서도 당했지."

한때 쇼토는 정홍기와 양홍기의 소기주였으나 사르후다는 이미 평민이 되어버린 그에게 존칭을 써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리석은 자라고만 생각했으나 자신도 이 상황에 몰리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기회를 보아 형님을 제거하라.'

지르갈랑이 내린 밀명이 떠오른 사르후다였다.

양람기는 애저녁에 지르갈랑이 차지했고, 적어도 니루 어전급 이상으로는 아민 파벌은 전향하거나 지르갈랑 파벌에게 밀려난지 오래였다.

이렇게 양람기 내부는 지르갈랑이 확실히 잡고 있었지만, 호거라는 변수가 문제였다.

지르갈랑은 호거가 수틀리면 자신을 몰아내고 아민을 앉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민을 쳐내기엔 조선과 내통했다는 명분보다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분을 일으킨다면.'

청군 앞에는 4천이나 되는 조선군이 있었다.

이자원 앞에서 내분을 벌인다면 청군은 조선군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리라.

"우선은 두고 보아야 한다."

"이자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민과 손을 잡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화친을 맺겠다는 것도 다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아직······."

아직 모르지 않냐고 말하려던 사르후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민이라면 반드시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유배되기 전 드러냈던 야망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좌섭정왕은 아들들과 손자들을 인질로 잡아놓고 있으니 걱정 말라 했지만, 아민은 언제나 독립을 하고 싶어했다. 지금도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

그런 상황에서 조선이 독립이라는 미끼를 내밀었다.

확실히 닝구타를 차지하고 조선과 연계한다면 단시간에 세력을 굳힐 수 있을 것이다.

'아민도 바보가 아니니 이 사실을 알면 조선과 꿍꿍이를 맞출 수 있으리라.'

사르후다는 오보이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이 사실을 아민이 결코 알아서는 안된다."

사르후다가 말했다.

"너는 뼛속까지 대청의 사람이 맞느냐?"

"당연한 것을 물어보시다니요. 소관은 조선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절의를 꺾지 않았습니다."

오보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이자원의 혓바닥에 넘어가 정보를 일부 털어놓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구태여 사르후다에게 그런 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너와 같이 있던 자들은? 그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이자원이 소관만 불러 말하기는 했습니다."

오보이는 그렇기에 같이 풀려난 자들에게도 딱히 입단속을 시키지 않았지만, 사르후다의 생각은 달랐다.

"혹 대장의 처소에 풀려난 자들이 들지 않았는가?"

사르후다가 부하 하나를 불러 물었다.

"포로로 잡힌 둔아를 만나고 나서 풀려난 자 몇이 찾아뵈었습니다."

"······이런!"

사르후다가 서안을 내리쳤다.

"아민이 지금 당장이라도 결심한다면 우리 모두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예에?"

사르후다의 말에 오보이가 눈을 크게 떴다.

아민이 조선의 손을 잡는다 가정했을 때, 더 거리낄 것 없이 감시역인 자신을 처리하려 들 것이다.

"우리 휘하의 병력을 모아라! 어서 움직여야 한······."

"무엇을 움직이려 하는게요?"

바깥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장년의 사내, 아민이 들어섰다.

'이런. 이미 늦었나.'

사르후다가 경악하는 찰나, 아민이 사르후다의 발 밑에 무언가를 휙 던졌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이자는?"

"나에게 조선의 제안을 전달한 우리 군사요."

아민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오보이를 향했다.

"차라리 방금 전 모두가 모였을 때 그대가 나에게 말했다면 내 뜻을 보이기가 쉬웠을 것을. 애꿎은 병사만 죽였군."

"이자원의 말을, 거절한 것이오?"

어째서?

사르후다의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정말 유배된 동안 아민의 야망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사르후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민은 태연했다.

"그렇다면 대청의 장수인 내가 설마 적과 내통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오?"

이런 상황에서 그렇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머리통은 아민이 결백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의 간계에 넘어가 내게 수작을 부리던 군사를 베었다! 이것이 내가 대청에 보이는 충의이다!"

여전히 사르후다가 믿지 못하는 듯하자 아민이 대뜸 소리쳤다.

"오보이!"

"예, 장군."

"그대가 직접 가서 전하라! 화친은 받아들이겠지만 적과 내통할 수는 없노라고!"

다시 조선군 진영에 가라는 말은 버거웠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민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저희 장군께서는 화친을 받아들이겠다 하셨습니다."

오보이의 말에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경하창이란 자가 꾸민 일이다. 우리는 이만 철군할 터이니 앞으로는 싸울 일이 없으면 좋겠군."

이자원의 말에 오보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홍타이지를 죽인 시점에서 조선과 청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런데 앞으로는 싸울 일이 없으면 좋겠다니. 그것도 한을 죽인 장본인이 말이다.

"그리고 제안하신 건에 대해서는, 장군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아쉽군."

이자원이 대답했다.

"좋다. 그만 돌아가보도록 하라."

이자원이 축객령을 내렸다.

"정말 퇴각하실 작정이십니까?"

"어때 보이나?"

오보이가 떠난 자리.

적비의 물음에 이자원이 역으로 물었다.

"당초 영고탑까지 출진하신 이유가 원정에서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아니셨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먼거리를 나아오고도 그냥 물러가는 셈이니, 대장께서 바라는 바는 아닐 것입니다."

"경하창이 제 세력을 모두 잃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애초부터 그를 제대로 이용하실 생각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적비의 대답에 이자원이 동의했다.

"아민에게 건 반간계도 무산된 것 같고, 오배라는 용사만 풀어준 셈이 되었습니다."

도전해볼만한 일이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었다.

오보이가 아민에게 가서 자신의 제안을 고하고, 아민이 이를 수락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아민의 반대편이 아민을 숙청하려 들다가 틈이 생기는 것.

"최악은 아민이 내 제안을 역이용하려 했을 경우지."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민은 곧이곧대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조선과 손을 잡지도 않고, 자신의 연대 제안을 역이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수작을 부리는거냐며 아예 화친의 판을 엎어버리지도 않고.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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