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암진 전투 (2) >
조선군 척후는 강추위에 청군 병력 대부분이 마을에 머물러있다 보고했지만, 사실 그것은 기만이었다.
아민은 행복촌에는 일부 병력만 두고 대부분은 마을 후방의 산지 쪽에 주둔시켜 놓았다.
마음이 급한 조선군이 강을 건너오면 곧바로 들이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분명 조선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올 것이라 하지 않았소?"
사르후다가 아민을 비난하듯이 외쳤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추위에 마을에 주둔하자고 주장한 사르후다였으나, 아민의 반대로 한발짝 물러섰던 터였다.
그런데 적을 일거에 격멸시킬 수 있는 기회는커녕, 기껏 마을에 진입한 조선군마저도 쉬이 이쪽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차라리 병사들을 따뜻한 곳에서 푹 쉬게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오!"
사르후다의 말에 아민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 앞의 공적이라도 거둬가는 수밖에.
"큰 계책을 작게 썼구나. 모두 적들을 격멸하라!"
아민의 명령에 청군들이 뛰쳐나갔다.
그들의 앞에는 동료들의 뒤를 쫓아 죽을 자리를 찾아든 기야하찬의 군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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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우웅!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의해 후르카군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기야하찬은 그것을 보고 당황했지만
"함정이다!"
기야하찬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화살비가 후르카군을 덮친 직후, 청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튀어나온 것이다.
"퇴각하라, 퇴각!"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기야하찬은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 외쳤지만 그보다 청군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조선에 붙은 개들아! 나라를 배신하고 역적질을 도모하니 좋더냐?"
평소 같으면 청이 왜 자신의 나라이며, 역적질은 무슨 역적질이냐며 쏘아붙였을 기야하찬이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대거리를 하고 있을 정신은 없었다.
"물러나라!"
"으악!"
"살려줘!"
창칼이 맞부딪히고, 후르카군의 비명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기세도 숫자도 정예함도 모두 밀리는 후르카군이 청군의 손에 떨어진 이상 살아나갈 방도는 없었다.
"저기, 저자가 역적 기야하찬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그쪽을 퍼뜩 쳐다보자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전사가 아닌가.
기라라지가 이끌고 나갔다가 패하자 오보이에게 투항한 자였다.
"저놈, 감히 부족을 배신하고······."
"아버님, 지금 저런 놈에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기야하찬이 그를 쳐다보며 이를 갈자 아들 둔아(屯阿)가 황급히 소리쳤다.
"알고 있다. 군사를 거두는 것이 우선이겠지. 제길, 조선군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는가!"
자신들만이라도 청군의 뒤를 치겠다 큰소리를 쳐놨지만, 정말 자신들만 보낼줄은 몰랐던 기야하찬이다.
'조선군이 따라왔다면 퇴각할 시간은 넉넉히 벌 수 있었겠지만······.'
기야하찬이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후르카군은 청군의 칼날에 맞아 쓰러지고 있었다.
'이미 늦었나?'
기야하찬은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그 자신의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부족이 붕괴하는 것을 감수하고 곧장 말머리를 돌려 도망쳐야할테지만, 그리되면 정말 기야하찬은 재기할 길이 영영 없어지고 만다.
그렇기에 머뭇거리던 그였다.
기야하찬의 갈등을 눈치챈 것은 아들이었다.
"아버님, 부족을 수습하는 일은 제가 맡을테니 아버님께서는 지금 바로 퇴각하십시오!"
둔아가 말했다.
"수령은 나인데 어찌 너를 위험한 곳에 두고 가겠느냐?"
기야하찬의 물음에 둔아가 외쳤다.
"우리 부족에 저는 없어도 되지만 아버님은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아들아······."
기야하찬은 시야가 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또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억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둔아가 외쳤다.
"후르카의 전사들이여, 내 옆으로 모여라! 청군 놈들에게 당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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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강을 건너라!"
석암진 사이를 흐르는 강은 목단강의 상류로서, 호을가강이라고도 하며 강폭이 제법 컸다.
그간 날씨가 제법 추웠음에도 얼지 않았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물러나 조선군은 황급히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대장 영감의 헤아림이 아니었다면 큰 경을 쳤을 것이다!"
황익이 중얼거렸다.
이자원이 적비를 보내지 않았다면 여론에 휩쓸려 기야하찬처럼 청군의 아가리에 들어서거나, 아니면 물러날 시기를 제때 잡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오이다."
적비가 말했다.
당장 지금 청군들이 몰려오면 꼼짝없이 피를 보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강이 얼었다곤 하나 앞뒤 재지 않고 급히 건널 수도 없었다.
- 와그작
불길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조선군 하나가 얼음 구덩이 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얼음이 깨졌다!"
"아직 제대로 얼지 않은 부분으로 건넜군."
황익이 혀를 쯧쯧차며 말했다.
밤인데다 지금은 저자를 꺼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청군이 몰려온다!"
"어서 강을 건너라!"
후르카군은 죄다 정리된 모양인지, 청군은 조선군을 향해 육박해오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오! 뒤따라 오는 자들은 모두 청군이오!"
퇴각하는 조선군 대열의 맨끝에 가서 상황을 확인한 적비가 말을 몰아가 소리쳤다.
이미 나루에는 조선군 보군들이 대열을 갖추고 몰려 서있었다.
"솔호(고려) 놈들을 죽여라!"
청군이 우다다 달려들기 시작했다.
조선군 기병들은 보군들의 뒤로 내빼고, 한박자 늦게 청군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달빛에 적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파총이 외쳤다.
"쏘아라!"
포수들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자 화승에 붙은 불이 화명(火皿) 속의 화약과 접촉하며 작은 폭발을 만들어냈다.
김마저 얼 것 같은 영하의 날씨를 뚫고 열기와 압력이 총구를 통해 분출되었다.
- 투다당!
그렇게 날아간 탄환들은 청군의 머리나 가슴이나, 혹은 말을 꿰뚫었다.
기세좋게 강을 건너던 청군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포수들의 사격에 의해 힘을 잃고 쓰러졌다.
"살수대!"
파총의 외침에 살수들이 창을 치켜들었다.
살아남은 청 기병들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물러나라!"
하지만 곧이어 청군 또한 위에서 하달된 명령에 의해 본진으로 돌아갔다.
아민이 지나친 추격을 금한 것이다.
그날의 전투는 말 그대로 서로에게 긁힌 상처만을 남긴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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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창의 부족이 전멸한 것을 빼고는 피해는 그리 크지 않사오이다."
황익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역시 기야하찬처럼 행동했다면 마찬가지 꼴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에 등골이 절로 서늘해지는 그였다.
"그런데 어떻게 보군을 제때 대기시켜놓으셨소이까?"
"야습을 거는데 우리군 방비도 제대로 하지 않는게 말이 되는가."
황익의 물음에 이자원이 당연한걸 묻냐는 식으로 말했다.
야습에 실패해 기병이 퇴각할 때를 대비해 추격하는 적을 끊어줄 예비대가 준비시켜야하지 않겠는가.
"경하창."
"······."
구석에 서있던 기야하찬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자원을 바라보았다.
병력을 수습해서 귀환하겠다던 둔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는 그였으나, 이자원은 딱히 그에게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저자를 묶어라."
"무, 무슨!"
적비와 병사들이 기야하찬을 꿇어 앉히고 그를 포박했다.
"동맹을 이리 대하는 법이 어디 있소? 이러고도 조선이 의리를 지키는 나라라 할 수 있겠소?"
기야하찬이 소리쳤지만 돌아온 것은 조선 군관들의 코웃음 뿐이었다.
"우리 조선은 어디까지나 청에 맞서 기의했다 하여 너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그런데 고작 50명에게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주장인 내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 군기를 어지럽혔다."
이자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게다가 세력마저 모조리 상실했으니 기야하찬을 살려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놔둬봐야 쓸모도 없고 문제만 일으킬 자라면, 처리하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경하창의 목을 베어라."
이자원의 말에 여진 족장들이 흠칫 놀랐다.
그래도 한치의 망설임없이 죽일줄은 몰랐던 것이다.
"군령을 어긴 자에게 예외는 없다. 나는 이미 우리 전하로부터 부월을 받았다!"
북벌을 배신하는 자는 즉시 치라고 했던가.
임금은 제대로 이자원에게 명분을 실어준 셈이었다.
"자, 잠깐!"
기야하찬이 허우적거렸지만 억센 손이 여러 개나 붙어 그를 끌어내자 버티지 못하고 질질 끌려나갔다.
'기야하찬의 목을 이용해서 도모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살아서는 쓸모없는 자였지만 죽어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이자원은 적비 한 사람만 남기고 주위를 물리쳤다.
"오보이에게 시킬 일이 있다."
기껏 사로잡은 오보이를 놔주는 것은 아깝지만, 다시 한번 청을 낚으려면 이정도 미끼는 던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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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후르카군을 격멸한 청군은 후방 산지를 떠나 행복촌으로 진입했다.
작게나마 승리도 거두었고, 추운 산 대신 민가에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 분위기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조선군에 사로잡혀 있던 오보이가 뜬금없이 등장하자 전후사정을 따지기 전 청군의 진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자원, 그 자가 화친을 청했다고?"
사르후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민의 탁자 위에는 곱게 싸인 함 하나가 올려져있었다.
오보이가 들고온 기야하찬의 목이었다.
"그렇습니다. 조선과 청이 이런 변경에서 싸우게 된 것은 오로지 기야하찬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그의 목을 줄테니 조선군의 퇴로를 보장해달라 하였습니다."
"지난 야습의 패배가 의외로 쓰라렸던 모양이군."
아민이 사르후다를 쳐다보며 말했다.
기야하찬의 병력을 전멸시키긴 했다지만 행복촌에서 잃은 병사들과 조선군을 추격하다 잃은 병사들을 감안하면 청군에게 그리 이득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사르후다가 계속해서 지난 싸움의 성과를 깎아내리려 하고 있던터라 아민으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민이 이자원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반면 사르후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은 이미 화친을 청해놓고 우리군을 공격한 적이 있소. 저들이 말하는 조약이란 그렇게 허망한 것이니, 뒤로는 무슨 궤계(詭計)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오."
사르후다가 그렇게 말했지만 조선에 대한 기억이 정묘년에서 멈춰있던 아민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군이 출병한 것은 말 그대로 기야하찬을 돕기 위함이었소. 그의 목까지 베어 보낸 마당에 무슨 싸움을 더하려 들겠소?"
조선이 닝구타를 점령한다 해도 직접 통치까지 할 수는 없다.
멀기도 멀고, 같은 만주인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누군가를 내세워야 할 터인데, 그 대상으로 지목됐던 기야하찬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말은 닝구타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화친을 맺자는 말이오?"
사르후다의 물음에 아민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땅을 침략한 조선을 어찌 그대로 돌려보낼 수 있겠소? 나는 조선이 우리 대청에 벌인 책략대로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오."
"그 말은······."
사르후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화친은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그것을 믿고 조선군이 물러나는 그때, 우리는 적들을 유린할 것이오."
아민이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