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60화 (60/213)

< 석암진 전투 (1) >

"도대체 무슨 도술을 부리신 것이오이까?"

황익은 황당해서 이자원에게 물었다.

당장 강이 얼어야 한다고 하더니, 실제로 밤에 한파가 몰아닥쳐버렸지 않은가.

"조짐은 보였지만 생각보다 빨랐군."

강이 얼어붙으면 어떻게 물자를 운반하냐며 근심하던 조선군이었지만, 이미 강 저편을 청군이 장악해버려 도강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이상 오히려 이 한파는 더없이 반가운 것이었다.

갑자기 심해진 추위에 죽을맛인 병사들이야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간밤에 100명이 넘게 얼어죽었사오이다."

이자원의 막사에 모인 부하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히 민가가 있어 몇몇은 추위를 피했지만······그래도 마을 하나에 4천이나 되는 우리 군이 전부 유숙할 수는 없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은 커져갈 것이오이다."

이 일대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은 나루의 이름을 딴 석암진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강 양편은 지명상 구분이 되어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이 주둔 중인 이쪽 편에 형성된 마을은 석두촌(石頭邨)이라 부르고, 건너편에 세워진 마을은 행복촌(幸福邨)이라 부른다.

닝구타로부터 불과 90리 떨어진데다 수로가 있어 두 마을 모두 만주치고는 제법 큰 마을이었기에 조선군은 석두촌에 들어가 주둔했다.

기존에 살던 여진인들은 조선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한 것인지, 마을이 비어 있어서 귀찮은 일을 덜었다.

"대장께서 원하신대로 강이 얼어붙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날씨에 제대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곁에 서있던 적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간 호위 외에는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던 그였으나 드물게도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거냐는 표정으로 이자원을 쳐다보는 것이다.

적비의 말처럼 도강에 드는 위험은 크게 감소한 것이 사실이지만, 남쪽에서 온 조선군으로서는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날씨긴 했다.

"적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병력을 근처 닝구타에서 징집한만큼 적응 면에서 조금 더 낫겠지만, 이자원은 구태여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청군이 닝구타의 성벽 아래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면 몹시 어려운 싸움이 되었겠지만, 저들이 우리를 요격하기 위해 나섰으니 피차 추위 속에서 싸워야하는 셈이 아니냐."

저들이 느끼는 추위와 공포는 조선군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도 얼었고 더 추위에 시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전군이 강을 건너 싸움을 벌이는 것이 어떻겠사오이까."

황익이 말했다.

이 싸움을 속전속결로 끝내야한다는데는 이자원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직까진 때가 아니었다.

"바로 건너지는 않을 것이다. 병사들을 쉬게 하고 옷을 든든하게 입혀라."

이자원은 황익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정도로 추위가 몰아닥치면 병력의 이점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병사들이 추위에 적응하는 동안 우선 기병을 동원해 탐색전부터 벌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라면 적들이 마음이 급해 서둘러 진군하는 틈을 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의표를 찌르면 한번에 무너져내릴테니까.

"마병별장 황익은 내 명을 받들라."

"예, 대장 영감."

"오늘밤 경하창 등 여진 기병들과 함께 강을 건너 마을을 얕게 찔러 보아라."

한파가 몰아닥치는 중이니 청군 또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행복촌에 들어가 머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최소한 이자원이 받은 보고로는 그랬다.

'하지만······.'

이자원이 생각하고 있을 때 황익이 굳은 얼굴로 외쳤다.

"반드시 오랑캐들을 섬멸하겠사오이다!"

"아니, 나는 분명 얕게 찌르라고 했다. 적이 도망쳐도 절대 뒤쫓지 마라."

"예?"

황익은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이자원은 파총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훈국 보군은 잠시 기다린다. 그동안 바람이 멎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언제 나아갈 요량이시오이까?"

"모른다. 그러나 추위가 계속된다 하더라도 이틀 안에는 진군할 것이다."

이자원이 대답했다.

너무 서두르면 청군의 노림수에 빠질 가능성이 컸고, 너무 늦으면 조선군은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

그 사이, 청군을 물리칠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이틀이었다.

'아직까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군.'

적의 병력은 넉넉 잡아 2천.

조선군이 4천이니 두 배 가량 되었지만,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 과연 확실히 승리할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끌고 온 병력은 훈련도감군. 결코 이런 곳에서 잃어서는 안될 병력이었다.

"오보이를 불러와라."

이자원이 말했다.

적과 싸우기 전, 적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오보이는 계속 감시받는 것만 빼면 제법 잘 지내고 있었다.

조선군은 행여 그가 얼어죽을까봐 옷도 두텁게 입혀주었고, 함거(轞車)에 가두는 대신 포박도 풀어주었다.

그런 오보이가 다시 몸이 꽁꽁 묶이게 되자, 그는 직감적으로 누구에게 끌려가는지 알 수 있었다.

'이자원.'

명장이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직접 그와 싸워보지 않은 오보이는 그리 와닿지 않았다.

역매복에 걸려 사로잡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름지기 사내란 직접 큰칼을 휘두르며 싸움에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자원과 직접 겨루어 진 것도 아니니 오보이는 별로 승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첫대면에서 그는 실로 선황을 죽인 걸물이라는 인상을 받기 충분했다.

얼굴 자체는 평범했지만, 그 착 가라앉아 있는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아닌 이질적인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었다.

두번째로 이자원과 대면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너희 군의 주장은 누구인가?"

이자원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오보이는 잠시 대답할 때를 놓쳤다.

"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어찌 적에게 우리나라의 정보를 넘기겠소?"

오보이는 일단 그렇게 뻗댔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까지 포기하며 버티지는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답하지 않겠다면 너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 내가 베푼 자비를 무시하는 것인가?"

"······."

오보이가 시선을 내리깔자 이자원은 슬쩍 퇴로를 터주었다.

"단지 나와 싸우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뿐이다. 어차피 한번 싸움으로써 승패를 결할 뿐, 이런 상황에서 너희 군을 이끄는 장수가 누구인지가 무에 그리 중요한 정보겠는가?"

"그렇다면 훈련대장께서 베푸신 호의가 있으니 답하겠소."

이자원이 그렇게 나오자 고민하는 척하던 오보이가 입을 열었다.

"주장은 태조(太祖, 누르하치를 말함)의 조카인 아이신기오로 아민(愛新覺羅阿敏), 부장은 양람기의 사르후다라는 자요."

"아민?"

그 이름은 이자원 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는 조선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정묘호란 때 조선을 범한 자가 바로 아민이 아니었던가.

"아민은 숙청당한 것이 아니었나?"

이자원의 물음에 오보이가 대답했다.

"죄를 지어 유폐당하긴 하였으나, 좌섭정왕 전하께서 사면하고 반란 진압의 대업을 맡기셨소."

'호거가······.'

오보이의 말을 들은 이자원이 생각했다.

유배의 명분은 명에게 패했다는 것이긴 했지만, 사실상 아민은 홍타이지의 정적이었기에 숙청당한 것이다.

이미 퇴물이 되어버려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에게 병권을 쥐여주는데 별 반발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결정한 호거가 청 내부에서 원톱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아민.'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

이자원은 황익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단지 한번 혼쭐이 난 뒤로는 자신의 명령을 되도록 잘 따르고 있고, 어랑산 전투에서 보듯 시키는 일은 그럭저럭 해냈기에 아직 마병별장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황익도 그것을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다.

'대장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공을 세워야 한다. 세워야 하기는 한데······.'

황익은 옆에서 날뛰고 있는 남자를 힐끗 곁눈질했다.

"다 죽여 버려라!"

바로 제가 주장이기라도 한듯이 병사들을 몰아대는 기야하찬이었다.

야습은 대성공이었다.

행복촌에서 자고 있던 청군들은 불의의 습격을 당하자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황급히 도망가고 있었다.

"으악!"

"여기에서 자는게 아니었는데!"

"퇴각해라, 퇴각해! 조선놈들이 온다!"

조선군과 여진 기병들이 병기를 마구 휘두르며 적들을 베자 청군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흩어졌다.

- 퍽!

조선군이 청군 하나를 깔아뭉개고 편곤을 휘둘러 다른 청군의 머리를 터뜨리는 장면을 보던 황익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도망가는 적의 뒤를 쫓고 있었다.

"마을을 이탈하지 말고 이리로 모여라! 승리를 거뒀으니 돌아간다!"

황익의 외침에 옆에 있던 기야하찬이 놀라서 물었다.

"이보시오, 황 별장! 적이 무너져 도망가는 중인데 왜 뒤쫓지 않는게요?"

"물러가는 적을 쫓아 들어가지 말라는 대장 영감의 말씀이 있었소."

"바보 같은! 지금 한창 승세를 탔는데 무엇을 겁내는 것인지!"

기야하찬이 외쳤다.

아들 기라라지의 원수를 계속 살려두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적을 깨뜨릴 절호의 기회마저 걷어차고 있지 않은가.

"승전을 거뒀다고 해봤자 기껏 수십 명을 쳐죽인 것에 불과하지 않소? 이런 호기를 내버리고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소? 조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 혼자라도 나서서 적을 치겠소!"

기야하찬은 그렇게 말하며 부락의 전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후르카부의 전사들이여, 보았는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자들은 조선도 아니고, 청도 아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만이 원수를 갚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청군 놈들의 뒤를 쫓아라! 이 참에 적들에게 큰 피를 보게 하리라!"

'제기, 제놈들이 그렇게 대단하면 진작에 혼자 힘으로 해결해보지 그랬나.'

기야하찬이 보낸 서찰 한 장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와서 고생 중인 황익이 듣기에는 이보다 어이없는 소리가 없었지만, 그렇게 사기를 올린 기야하찬은 황익이 말릴 틈도 없이 청군의 뒤를 쫓아 나섰다.

"별장 영감, 우리도 가야하지 않겠사오이까?"

그 모습을 보던 부하가 말했다.

이번 야습은 확실히 청군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적어도 그들이 보기엔 그랬다.

"싸움을 계속하면 공을 세울 수 있겠지만······ 훈련대장의 명이 있었지 않은가."

"경하창만 보냈다 그가 수가 모자라 반격당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해서 어쩔 수 없이 경하창을 따라갔다 하면 책임은 그가 쓰고, 공은 우리가 챙기겠지요."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황익이 기야하찬을 따라 나서려던 찰나, 얼어붙은 강 쪽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황 별장은 계십니까?"

"그대는?"

항상 이자원의 곁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적비라는 자였다.

그가 어쩐 일로 말을 몰아온 것인가.

"대장 영감께서 절대 청군을 쫓아서는 안된다고 재차 당부하셨습니다. 이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이자원이 그렇게 말하는데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제야 황익은 겨우 아쉬운 마음을 떨쳐냈다.

'미덥지 않은 인간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려니 총병도 고생이 많겠군.'

적비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경하창이 제 군사들을 데리고 청군의 뒤를 쫓았는데······."

황익이 말했다.

"대장께서는 조선군이라도 멀쩡히 거둬오라 하셨으니, 우선 그쪽은 신경쓰지 마시지요."

적비의 말에 결국 행복촌을 기습했던 조선군은 서서히 다시 강 건너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와아아!"

그때 전방에서 거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청군이구나!"

===

"큰 계책을 작게 썼군."

아민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사르후다의 반발까지 억눌러 가며 펼친 작전치고는 성과가 그리 크지 않을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라도 잡는 수 밖에.

"적을 쓸어버려라!"

아민이 외쳤다.

작가의말

석두촌과 행복촌의 위치는 ‘「북정록」과 나선정벌 노정 연구(권혁래, 2013)’를 참고했습니다. 구글맵에서는 석두촌과 행복촌 모두 강 동편에 있는걸로 표기되어 있는데, 논문에 적혀있는 두 마을 나루터의 GPS 주소를 검색해보면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좌표가 찍히는 것으로 보아 현대에 와서 마을이 옮겨갔든 아니면 구글맵이 잘못되었든 둘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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