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58화 (58/213)

< 머피의 법칙 (3) >

“조선군이 닝구타로 진군하고 있다고?”

진군과 함께 들려온 소식에 아민은 쾌재를 불렀다.

사르후다의 말처럼 퇴각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이때에 아예 조선군이 가야하를 따라 북상하고 있다니.

“적들이 야춘이나 되찾을 것이라 믿고 기껏 모아놨던 병력을 흩어버렸으면 큰코를 다칠 뻔했군.”

아민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지만, 사실 사르후다를 향해 하는 말임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조선군이 미친게 아니오?”

사르후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이 먼 닝구타까지 공격하러 오단 말인가.

“아무리 이자원이라 한들 수백리 길을 타고 오는 무모한 짓을!”

기껏해야 조선군이 건드릴 수 있는 곳은 훈춘과 야춘 정도라 예상했건만.

그러나 아민은 사르후다가 뭐라 부정하든 단지 태연할 뿐이었다.

“미친 것이라면 더욱 잘되었지. 이 참에 조선군을 격파해 위엄을 한번 떨칠 뿐이니 말이오.”

누구의 위엄인지 아민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대청의 위엄인가, 혹은 자기 자신의 위엄인가.’

사르후다는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아민이 노리는 것이 독립이라면 큰일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공을 세워 복권되고 심양으로 돌아가 정쟁을 펼치는 것이라도 사르후다는 그것을 저지해야할 위치에 있었다.

사르후다는 현 양람기의 기주이자 정친왕(鄭親王)인 지르갈랑이 자신에게 내린 밀명을 떠올렸다.

‘기회를 보아 형님을 제거하라.’

‘예?’

지르갈랑의 명에 사르후다는 멍하니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양람기의 기주였던 형님이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내쫓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아민이 숙청되고 그, 지르갈랑이 기주가 된지가 벌써 7년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에는 지르갈랑은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좌섭정왕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안있으면 제가 어쩔테야. 내가 우섭정왕에게 붙어버리면 곤란해지는 것은 호거가 아닌가.’

아민이라는 대체재가 없으면 호거는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홍기와 양홍기를 포섭한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확실히 지르갈랑의 편에 서버린 사르후다로서는 주군의 명을 받드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병력은 얼마나 모였소?”

“1700명 정도요.”

아민의 물음에 사르후다가 대답했다.

“조선군이 4천 가량이니 회전을 벌이기에는 충분한 숫자입니다.”

오보이가 나서서 말했다.

이보다 적은 병력으로도 명군을 수도 없이 쓰러트려본 그는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1500명은 팔기의 정예가 아니라 닝구타에서 초모한 병력이라는 것이다.”

아민은 냉정하게 전력을 파악했다.

여전히 이자원이란 자를 겁내는 청장들에게 냉막한 조소를 보내는 그였지만, 아군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기야하찬이 청군에 맞서자 곧바로 패주하여 달아났듯이, 닝구타에서 모은 병력들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회전을 벌일 때는 벌이더라도 우선은 조선군의 전력을 깎아놓아야 한다. 오보이, 그대는 병력 일부를 이끌고 가서 조선군을 철저하게 괴롭히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보이가 말했다.

===

화살 여러 대를 매달고 죽어 나자빠진 조선군의 시체가 악취를 풍겼다.

피냄새와 만주의 추위에도 서서히 부패해가는 시취가 섞인 무언가를 맡으며 병사들은 고개를 찡그렸다.

‘역시 게릴라로 나왔나.’

시체를 내려다보던 이자원이 생각했다.

수백리 길을 따라 대군이 움직이고 있으니 청은 분명 그 움직임을 읽었을 것이다.

이미 조선이 닝구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테니 무언가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전법은 누가 생각하더라도 게릴라였다.

“적병은 얼마 정도라 하던가?”

“100명 가량입니다. 낙오되는 병사들을 집요하게 사냥하고, 가는 곳마다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수로를 따라 진군하는 조선군은 산과 숲을 수도 없이 마주쳤고, 그때마다 청군이 출몰해 조선군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조치를 취해야겠군.”

어차피 이런 식으로의 게릴라로는 조선군을 궤멸시킬 정도의 타격을 주기 어렵다.

닝구타에 다다라서 한번 결전을 벌여야 승부가 명확히 갈리겠지만, 자꾸 이렇게 전투력이 깎여나가면 바로 그 결전 때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보군과 마군은 내 명을 받들라! 이 참에 청군에게 역으로 타격을 주어야겠다.”

===

아민으로부터 병력을 갈라받은 오보이는 말 그대로 조선군을 수시로 찔러댔다.

만주 제일의 용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기라라지인가 하는 놈이 이끌던 병력보다 훨씬 낫군!”

오보이는 제법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처럼 불의의 기습을 당하고도 조선군은 쉽게 패주하지 않았다.

“죽어라, 이 오랑캐 놈들아!”

- 퍽!

조총을 한방 뻥 쏘아낸 포수가 장전할 시간이 없자 총을 몽둥이 삼아 달려드는 것을 오보이가 극의 날로 후려쳐 죽였다.

“오랜 행군에도 그리 많은 병력이 손실되는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의외로 위험했을수도 있겠다.”

보급은 수로를 통해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병력의 피로 또한 부대가 와해될 정도는 아니다.

최대한 약해진 조선군과 싸워야 유리할 청의 입장에선 이렇게 옆구리를 찔러대는 것 외에는 달리 바랄 요행이 없는 것이다.

오보이는 그날도 조선군을 앞서 나가며 매복과 기습을 진행할 작정이었다.

“마침 안개가 끼는군.”

기습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소다.

강 근처는 수증기 공급이 더해져 안개가 자주 끼는 것이 맹점이었다.

오보이는 탁한 공기에 침을 한번 퉤, 뱉고 멀리 지나가는 조선군을 바라보았다.

“대병력이다.”

저렇게 뭉쳐서 움직이는 조선군은 너무 커서 먹기 힘든 사냥감이다.

오보이의 병력은 적으니 다른 곳을 노려야 했다.

“우리는 후미에 따라가는 낙오 부대를 친다.”

수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 행군하면 부대 단위로 뒤떨어지는 곳이 생긴다.

오보이가 그간 사냥해온 자들은 그런 축들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랬다.

“본대로부터 10리 정도 뒤떨어져가는 병력이 있습니다!”

“좋아, 그놈들이 오늘 먹잇감이다!”

척후병의 보고에 오보이가 소리쳤다.

“숲을 따라 움직인다! 큰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해라!”

모습 뿐만 아니라 말의 울음소리, 말발굽 소리 등을 숨기기에는 숲이 제격이었다.

“바로 저기다!”

오보이가 소리쳤다.

희미한 안개 너머로 언뜻 인영들이 터덜터덜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었다.

“돌격하라!”

오보이의 명령에 청군들은 제각각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안개를 뚫고 청군이 튀어나오면 놈들은 놀라 자빠질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안개 너머의 인영들도 부랴부랴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준비해보았자 이미 늦었다.

오보이와 부하들은 거세게 말을 달렸다.

그때 불어온 한줄기 바람에 거짓말처럼 안개가 훅 걷혔다.

“이, 이런!”

정면을 바라본 오보이가 경악해 외쳤다.

잠깐이었지만 안개가 걷히자 보인 것은, 완벽히 싸울 태세를 갖추고 포진한 조선군이었다.

“쏘아라!”

초관 한 사람이 외쳤다.

지척까지 다다른 저들 청군이다.

속도를 줄여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려오고 있는 적이니 밥이나 다름없다.

- 투다다당!

조총들이 연달아 불을 뿜어내고, 오보이의 옆에 있던 부하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살수대! 앞으로!”

“악!”

조을동은 필사적으로 창을 적에게 찔러댔다.

살수대에 들어온 후로 저 포수와 사수들에 비해 궂은 일은 다 도맡아한다고 항상 투덜댔지만, 그런 불평은 이미  긴장과 흥분 때문에 머릿속에서 날아간지 오래였다.

여기 모인 조선군의 숫자가 청군보다 많다하나 그래도 청군의 숫자 또한 100명에 달한다.

세 배나 되는 병력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까.

오금이 저렸지만 몸은 구령을 듣자 반사적으로 앞에 나갔다.

“이것도 그 훈련 덕택인가 보이!”

“덕택이요? 탓이지!”

고발피의 말에도 조을동은 그나마 도망치는 놈 없이 모두가 앞장서 싸울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 낫다 여겼다.

고발피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전쟁은 싸울 때보다 전열이 무너져 서로 도망치려 들 때 더 큰 피를 보는 법이니까.

“훤화를 금한다! 잡담하지 말고 청군 놈들 목이나 찔러라!”

뒤에서 초관이 소리쳤지만 이미 싸움의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닌데 제멋대로 움직이는 주둥이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다 죽어라, 조선 놈들아!”

청군이 탄 말이 마구 날뛰며 달려드는 것을, 조을동은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가 창대로 올라탄 청군을 후려쳐버렸다.

청군은 낙마했지만 그놈이 타고 있던 말은 여전히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놔두면 여러 사람 다칠 것 같던 그때였다.

- 탕!

팔에 화승을 감고 있던 포수 하나가 정확히 말의 미간을 맞췄다.

골통이 박살난 말이 축 늘어졌다.

“실력이 대단하구만.”

“이 거리에서 뭐, 저정도도 못맞추면 되겠수.”

“이놈아, 그러면 네가 총쏘는 법 배워서 포수하거라.”

조을동의 핀잔에 고발피가 머리를 긁적였다.

“됐수다. 나야 뭐 살수가 천직이니.”

잡담하면서도 쉼없이 적을 몰아내고 있는 조을동과 거발피였다.

“퇴각하라!”

끝내 오보이가 만주어로 그렇게 외치자 청군은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이고야, 그래도 오늘도 살았다.”

조을동이 물러가는 청군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은 제법 평화롭게 살았지만 어째 병자년부터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겪고 있는 그였다.

“오랑캐 놈들, 어딜 도망치느냐?”

“서둘러 놈들을 쫓아라!”

그렇게 외치는 사람은 조을동 대를 쪼아대던 저놈의 초관은 아니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기병과 여진 기병이 초반 기습에 실패해 그대로 퇴각하려는 청군을 뒤쫓고 있는 것이다.

“조선군이 뒤따라 오고 있는데, 어찌해야겠습니까?”

“흥, 이래서 숲에 병력 일부를 남겨두었지 않느냐? 조선 놈들이 우리 뒤를 쫓아들어온다면 그들이 알아서 끊어줄 것이다!”

오보이는 그렇게 외치며 달려나갔다.

이것이 역매복이었다니.

큰코를 다친 것은 맞지만, 그래도 병력을 추스리면 얼마든지 다시 놈들을 괴롭힐 수 있다.

그때 오보이가 매복해있던 숲에서 병력이 튀어나왔다.

“우리군인가?”

분명 대기하라고 했을텐데 왜 나왔는지 의아하던 그때, 그들이 갖춘 의장이 확실히 보였다.

“조선, 군?”

도대체 어디서 나온 병력이란 말인가.

“······방금 지나간 본대구나!”

오보이의 기습을 예상했다면, 그들이 낙오 병력으로 위장한 후발대를 사냥하러 움직이는 시기에 맞춰 본대 또한 병력을 움직였을 것이다.

“장군! 어찌해야 하오리까?”

부하의 말에 오보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끝까지 싸워 대청에 대한 충성을 보전해야 하는가?

일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보다 큰 감정이 몰려들었다.

바로 죽기 싫다는 감정이었다.

‘나는 아직 해야할 것이 많다!’

이리도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갈등하던 오보이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항복한다.”

===

“오보이······?”

사로잡은 청군 장수의 이름을 들은 이자원이 물었다.

“그렇소. 내 아들의 원수인 저놈을 나 기야하찬이 사로잡았소!”

기야하찬이 오보이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사로잡은 쪽은 우리 조선군이라 들었다.”

“하지만 우리도 협력했으니 그게 그거지. 나는 저놈의 목을 가져가야겠소!”

막무가내로 기야하찬이 칼을 뽑아든 순간, 곧장 그의 목에도 칼날이 들어왔다.

“장군의 명 없이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적비였다.

순식간에 목숨을 위협당하는 쪽은 기야하찬이 되었다.

“너를 어찌 처분하길 바라는가.”

소란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자원이 오보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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