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57화 (57/213)

< 머피의 법칙 (2) >

기라라지를 격파하고 야춘에 다다랐던 오보이는 기야하찬이 도주한 것을 확인하자 곧 닝구타로 귀환했다.

"대부분은 투먼 우라(ᡨᡠᠮᡝᠨ ᡠᠯᠠ, 두만강)를 넘어 조선 경흥부로 넘어갔지만 일부 호구를 노획할 수 있었습니다."

"······."

아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보이에게 쳐다보았다.

투항했던 후르카군과 노획한 호구를 합해 83명 정도를 닝구타로 끌고 왔지만, 이것을 대공이라 하기에는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이곳에서 반란을 뿌리뽑는 것인데, 기야하찬이 제 세력을 이끌고 그대로 조선에 들어가버렸으니 일이 어렵게 되었군."

아민이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오보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괜히 눈치를 주는 것이다.

"근거지인 야춘도 버리고 도망쳐왔는데 기야하찬이 무슨 수로 재기하겠소? 다른 놈들이 그러는 것처럼 조선땅 안에서 숨이나 겨우 쉬며 살 뿐이오."

그러자 사르후다가 오보이를 대신해 항의했다.

그는 동해여진의 습성을 잘 알았다.

무언가 일이 잘될거 같을 때는 순식간에 세력이 불어나다가도, 한번 패배를 맛보면 동맹이고 부하들이고 모조리 흩어져버린다.

기야하찬은 반란을 일으키며 같은 후르카부의 부족들이 합류하기를 기대한 모양이지만, 채 세력을 불리기도 전에 조선으로 도망치는 꼴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보다도 못한 상황이었다.

"기야하찬이 고작 50명에게 패해 달아났으니, 이곳 야인들은 대청과의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오. 이제 동방은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소."

중앙에서 가장 우려하던 사태는 지금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봄보고르처럼 우후죽순처럼 반란이 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은 아직 이 먼 곳까지 토벌군을 보낼 여력이 있으며, 그것도 삽시간에 진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물러나자는 말이오? 조선이 있는데? 그들이 어떤 준동을 해댈줄 알고?"

아민이 사르후다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리 이자원이라 한들 쫓겨 들어온 기야하찬의 한줌 세력을 가지고 동만주를 흔들기는 힘들 것이오. 기껏해야 야춘 정도나 찔러볼텐데, 그렇다면 굳이 나아가 맞서싸울 이유가 없소."

사르후다는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는 나름 관록있는 장수였지만 이자원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본 아민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도대체 그 이자원이라는 자가 누구이기에 이리 떤단 말인가!"

이대로 상황 정리됐으니 돌아가자는 말은 아민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격당하신 선황을 제외하더라도 도로이 버일러(요토), 양백기 구사 어전 도이격, 회순왕 경중명, 그리고 청천강에서의 수많은 장수들과 쇼토가 그에게 패했소. 신중해야 하오."

사르후다가 아민의 말에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우라에서 부잔타이와 싸웠고, 사르후에서는 양호, 두송과 싸웠으며 요동과 몽골에서도 싸워 이겼다! 또한 정묘년에는 내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정벌했거늘 어느 틈에 대청의 장수들이 이리도 나약해졌는가!"

아민이 성이 나 외쳤다.

까마득한 자기 부하였던 사르후다가 그를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아민은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오보이,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대신 아민은 오보이를 향해 물었다.

"조선군이 쳐들어오면 맞서싸울 뿐입니다."

오보이가 호승심에 불타는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상대해줄 이유가 없다 하지 않았는가. 조선이 군사를 보내 야춘을 공격한다고 그곳 부족들이 조선에 협조하겠는가? 아니면 조선군이 천년만년 야춘에 눌러앉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부족들의 반감만 커져 대청에 기대는 결과만 낳을 뿐이니, 우리는 싸움 구경이나 하면 될 뿐일세."

사르후다가 반박했다.

"오늘 군의는 이쯤해서 마치겠소."

여론이 사르후다 쪽으로 기우는 것이 보이자, 아민이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르후다는 그 말이 떨어지자 바로 군막을 나섰고,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어떻게 빠져나온 새장인데······."

홀로 된 아민이 중얼거렸다.

설마 오보이가 한번에 기야하찬을 토벌해버릴줄은 몰랐다.

정말 이대로 심양에 돌아가야 하는가?

===

"만주는 조선과는 다르다."

그것이 '일단 야춘으로 진격해보자'는 제안에 대한 답이었다.

보통 조선이나 명에서는 요하 동쪽의 모든 땅을 통틀어 요동(遼東)이라고 불렀으나, 이자원은 편의상 만주라는 호칭을 썼다.

"요심과 같은 곳은 그래도 호구가 많고 밀집되어 있으니 도시 하나하나를 점령해나갈 수 있지만, 동만주에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없다."

훈춘이나 야춘, 연길 같은 곳을 조선군이 점령해봤자 여진족들은 달아나면 그만이다.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생활을 하는 그들로서는 타격이 없지는 않겠지만 조선군이 계속 주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선군이 물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곳, 동북에서 유의미한 도시 노릇을 하는 곳이 있지."

"설마, 닝구타(寧古塔)를 말하는 것이오?"

기야하찬의 물음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고탑을 점령하거나, 최소한 파괴한다면 청이 동만주에 끼치는 영향력은 크게 꺾일 것이다."

청의 수도인 심양은 여기에서 천 수백리나 떨어져있다.

중간기지 역할을 하는 닝구타가 조선의 손에 떨어진다면 청은 동해여진을 다스릴 길이 막히는 것이다.

"하지만 영고탑까지는 거리도 멀고 지형도 낯선데······ 그것이 가능하겠사오이까?"

기껏해야 두만강 바로 너머 야춘에서 싸움을 벌일줄 알았는데, 5백 리 길을 걸어 닝구타를 공격하자니.

"그래도 차라리 기야하찬과 함께 야춘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힘을 빌려줘서 여진족을 다시 규합하도록 하면······."

"그런 것이 가능할 것 같은가?"

이미 50명에게 패배해 조선으로 달아난 기야하찬이다.

잠시 조선군이 머물러 있을 때는 협력할지 모르겠지만, 그 후에는 모래알처럼 다시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청의 위력에 겁을 먹은 동해여진이 다시 조선 쪽으로 헤쳐모이게 하려면 단순히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접경 지역 몇 군데를 점령하는 것으론 부족했다.

"오로지 영고탑을 점령해 청의 지배를 일소하는 것.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

임금의 바람대로 기야하찬이 제법 유력한 반란 세력이었다면, 그래서 조선의 지원을 조금만 받아도 동해여진을 규합해 청에 맞설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글렀다.

"군량은 어찌하실 작정이시오이까?"

조금 먼 길이 아니다.

운반이 쉽지 않을 것이고, 군량과 화약 등 물자 보급 때문에 진격이 좌절될 공산이 컸다.

"가야하와 목단강의 수로를 통해 움직이면 된다."

이자원은 손가락으로 지도에 그려진 목단강의 지류를 쓸었다. 수로를 통해 보급하면 육로보다 훨씬 시간과 수고가 적게 든다.

특히 강이 닝구타까지 바로 흘러간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강을 따라 올라가서 청군을 격파하고 닝구타를 점령한다. 이것이 나의 계획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 있는가."

좌중은 이자원의 말에 서로를 쳐다보다, 끝내 뜻을 꺾었다.

대장이 저리 나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성공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

"하이고, 이제는 조선땅도 벗어나게 생겼네 그려."

훈련도감 대장(隊長) 조을동(趙乙洞)이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대장이라고는 하나 저 무서운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같은 대장은 아니다. 10명으로 이루어진 1대(隊)의 장을 일컫는 말인데, 3대가 1기(旗)를 이루고 3기가 1초(哨)를 이루니 초관보다도 까마득히 낮은 신세였다.

그렇기에 품계 달린 잡직(雜織)이라고는 하나 실상 졸병과 다르지 않다며 그는 수시로 푸념했다.

"대장님, 여진 놈들이 못싸워서 우리가 저기까지 끌려가는거라던데 정말입니까요?"

"내가 듣기로는 그렇댄다."

조을동은 부하 고발피(高醱皮)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그 또한 초관으로부터 들은 소리였으니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요? 여진 놈들은 죄다 무서운 것도 모르고 잘싸운다던데 순 거짓말이었나 보네."

고발피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여진도 여진 나름인가 보지. 그리고 청은 어디 여진이 아니라더냐."

조을동이 대답했다.

병자년의 청군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지는 그였다.

'대장 영감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그 당시 남한산성의 전력으로는 청과 싸워 이길 수 있었으리란 생각이 안드니, 오랑캐 황제를 죽이고 구원군을 불러온 훈련대장이 아니었으면 꼼짝 없이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졌으면 마누라도 딸내미도······ 어후.'

청나라놈들은 사람이 부족해 노예로 마구 끌고 가고, 특히 여자도 환장을 한다고 들었다. 아마 도성에 살고 있던 아내와 딸도 끌려갔을 것이다.

청이 제 발등에 불이 떨어져 포로를 잡으려는 생각도 못하고 도망치려 했으니 망정이지만.

지레 끔찍한 상상을 해버린 조을동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아이고, 도성에서 경흥부까지 오는데도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5백 리를 또 어떻게 간다냐."

발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고발피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 대장 영감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조을동은 그렇게 답했다.

나이는 어려도 수없이 많은 전장을 헤쳐나온 신장(神將)이 아니던가.

"그거야 그렇지요. 우리 아버지도 형님도 정묘년 때 오랑캐 놈들이랑 싸워봤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하더구만. 그런데 대장 영감 밑에 있으면 그 힘센 오랑캐들도 한방에 죽어나간다데."

황해도 출신 군졸 하나가 그렇게 떠들었다.

"아, 그놈의 훈련만 안시키면 참 좋은 장군인데."

"그래도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굴리고 행군시키고 해서 예까지도 문제 없이 잘온거 아뇨."

병사의 말처럼 지난 몇달간 속성으로라도 체력단련을 시킨 덕에 험난한 진군로였음에도 불구하고 낙오자는 적었다.

앞으로 닝구타까지 진격하는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이자원으로서는 비전투 손실을 줄일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우리 조선땅에서만 싸웠으니 대장 영감도 승승장구했지만······ 여기는 완전히 적지 중의 적지 아닌감. 혹시 심하(深河, 사르후) 싸움처럼 되는게 아닌가 모르겄네."

"거 재수없는 소리 좀 하지 마쇼."

늙은 군졸의 말에 곁에 있던 병사들이 투덜댔다.

"이놈들아, 훤화(喧譁)할 기운으로 발걸음이나 제때 움직이거라."

초관이 슥 지나가며 소리치자 기총과 병사들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행군에 열중했다.

===

'함경도로부터 방한용 장비를 거둬들인 것이 다행이군.'

벌써 두만강 이북은 겨울 날씨나 다름없었다.

훈국 병사들도 나름 두텁게 껴입고 왔지만, 닝구타를 공격할 동안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하면 만주의 겨울을 직격으로 맞을 가능성이 컸다.

함경감사에게 이를 미리 요청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진군로에 있는 부족들은 어디에 붙을 것 같은가?"

"대부분은 관망할 것이오."

기야하찬이 말했다.

와르카와 후르카 등에 속한 조선의 번호들도 종군하고 있었으니 만주의 세력을 파악하기에는 이보다 적당한 자들이 없었다.

"명목상으로는 청에 속해있긴 하나 과중한 공납으로 민심은 항상 좋지 않았소. 그러니 아예 닝구타 부근에서 거주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 들어가있는 부족들이 아닌 이상 대세가 결정될 때까지 지켜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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