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피의 법칙 (1) >
현재 훈련도감의 총병력은 5천 명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저번 가도 정벌에 종군한 좌부 대신 이번에는 우부가 출진하게 되었으니, 그 숫자가 절반인 약 2500명 가량이었다.
여기에 함경도 군사들과 아직까지 조선의 번호(藩胡)로 남아있는 여진 일부가 합류하면 4천 명 정도 될 것이다.
'병력 우위는 충분하군.'
적이 동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병력은 1천에서 많이 잡아도 2천 가량.
병자호란 당시 수적 우위를 가지고 싸운 적은 많았지만 그때는 대부분이 숙달되지 않은 병력이었던 반면, 지금은 정예인 훈련도감과 북방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자원 본인이 냉정한 눈으로 보아도 그때보다는 싸움이 쉬워지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위로 갈수록 점점 선선해지는군."
철령관(鐵嶺關)은 서울에서 함경도로 향하는 관문이다.
훈련도감 병력들은 이곳을 거쳐 야춘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북방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는 것은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인지라, 아직 바람이 따스한 남쪽과는 달리 함경도는 벌써부터 완연히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추워지는 것이오이다.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할 터인데······."
마병별장 황익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마병들이야 좌부와 우부를 가리지 않고 따로 편성되어 있으니 이번에도 그가 끌려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란 때는 통영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사오이다."
겨울철 그 혹한을 뚫고 전쟁을 치뤄보지도 않았으니 입을 다물라는 뜻인가.
황익은 괜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자원은 사실 별뜻없이 한 말이었다.
"심 대감께서는······."
"그 얘기는 꺼내지 마라."
황익이 시킨 일을 잘 처리했다며 슬쩍 운을 띄우자 이자원이 답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았다.
저기 호위라는 핑계로 뒤를 따라오고 있는 적비처럼 말이다.
"가명치고는 이름에 감정이 실려있군."
"어인 말씀이시오이까."
이자원이 툭 던지자 적비가 물었다.
"간장과 막야의 아들이 초왕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지. 적비는 그 자의 이름 아닌가."
옛날 춘추시대 대장장이였던 간장은 초왕을 위해 만들던 검이 기한을 넘기자 처형되었다. 아내인 막야는 적비라는 유복자를 낳았는데, 훗날 수배에 처해진 적비는 원수를 갚기 위해 한 협객에게 스스로 목을 건네주었다.
협객이 적비의 목을 가져가자 초왕은 방심했고, 그 틈을 타 협객이 초왕을 죽여 대신 복수를 이뤄주었다는 이야기다.
하필이면 그 이름을 딴 이유는 무엇일까.
"······별다른 의미는 없사오이다."
"그런가."
이자원은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너는 네 일을, 나는 내 일을 할 뿐이다."
이자원이 말을 이었다.
"네가 무엇을 원하든, 네 일만 하면 조선과 대국의 관계는 순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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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드디어 지원을 왔다고!"
기야하찬이 쾌재를 불렀다.
"아버님, 방심하실 때가 아닙니다. 이미 닝구타에 아민이 도착해 병력을 모으고 있다하니, 신중하지 않으면 큰코를 다치게 될 것입니다."
장남인 기라라지의 말에도 기야하찬은 태연했다.
"조선과 손잡고 한번만 놈들을 격파하고 나면 후르카의 다른 부락들도 나와 손잡고자 달려올 것이다. 그리되면 나 또한 봄보고르 같은 놈에게 꿀리지 않는, 한 세력을 칭할 수 있을 것인데 무엇이 두렵겠느냐?"
"하오나······."
지금으로선 우리 세력은 청에 맞서기엔 너무나 미약하지 않은가.
기라라지가 이어서 말하던 그때였다.
"아버님!"
또다른 아들인 둔아(屯阿)가 달려와 외쳤다.
"닝구타에서 50명 정도 되는 병력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선발대인가!"
기야하찬이 외쳤다.
"정세를 살피러 온 것이 틀림없다. 혹 누가 이끌고 있는지는 알고 있느냐?"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들의 말에 기야하찬은 올테면 와보라는듯이 말했다.
"좋다. 이 참에 놈들을 격파해 사기를 함빡 꺾어야겠다."
기야하찬은 장남을 보며 말했다.
"기라라지, 네가 1백여 명을 이끌고 가서 청군 놈들의 선발대를 진멸하라!"
험난한 곳에서 살아가는 전사답지 않게 신중함이 지나칠 때가 있지만, 기야하찬은 아들의 능력을 믿었다.
이곳 야춘이 변방이라지만 그동안 봐온 아들의 전투력이라면 청군과 맞서도 얼마든지 먹힐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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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거는 아민을 보내며 그 수족들을 전부 자기 사람들로 채웠다.
아민을 보좌 중인 사르후다는 친호거파인 지르갈랑의 부하였고, 지금 종횡무진하며 후르카군을 휩쓸고 있는 오보이는 호거에게 붙은 양황기에 속해 있었다.
"야만족 놈들아! 이 구왈기야 오보이의 이름은 들어보았느냐!"
오보이가 극(戟)을 마구 휘두르며 적군을 짓밟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공을 여러번 세워 선제 홍타이지로부터 만주 제일의 용사라는 찬사와 함께 바투루(ᠪᠠᡨᡠᡵᡠ, 용사) 같은 영예로운 호칭까지 하사받은 인물이었다.
"괴물, 괴물이다!"
숫자로는 두 배에 달하는 후르카군이었지만 수많은 실전과 훈련을 거쳐온 팔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장비조차도 오랜 세월 요동을 쥐고 있던 청과 비교가 되지 않으니, 사실상 지휘관의 역량말고는 역전의 요소가 전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보이라 했더냐? 나 기라라지의 창을 한번 받아보아라!"
후르카군에게는 불행히도 기라라지 또한 그리 실력이 뛰어난 장수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야춘 같은 변방에서, 고만고만한 부족들끼리 다투는데서나 두각을 드러냈을 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죽어라!"
수적 우위를 활용해보려 노력하는 대신 기라라지는 오보이를 꺾기 위해 창을 들고 직접 달려들었다.
기라라지의 창이 쭉 뻗어 찌르고 들어가는 것을, 오보이가 극에 붙은 보조날로 창끝을 얽어매었다.
"이, 이런!"
기라라지가 당황해 힘으로 당기려했지만 오보이의 근력에 의해 빠지지 않았고, 역으로 오보이가 기라라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에 허리춤에서 뽑아낸 소도(小刀)가 들려있었다.
"우, 우욱!"
오보이의 소도가 기라라지가 걸친 가죽편을 뚫어내고 그의 심장을 찔렀다.
"너희 대장이 죽었다! 항복해라!"
힘이 풀려 낙마해버린 기라라지의 목을 뒤따라오던 팔기군 하나가 잘라 오보이에게 바쳤다.
오보이는 그것을 들고 후르카군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소족장이 죽었단 말이냐?"
"기라라지 대장이 죽었다!"
한참 난전(亂戰)을 펼치고 있던 와중에도 기라라지가 죽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목을 보자 후르카군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했다.
"항복하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오보이가 외치며 극으로 눈 앞의 후르카 병사를 후려쳐버렸다.
흩뿌려진 핏물에서 나온 김이 차가운 공기로 퍼져나갔다.
"항복해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청군이 이어서 외치자 후르카군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을 청했다.
50명으로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을 간단히 격파했으니 으쓱할만도 하지만, 오보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오로지 거리가 먼 것과 청이 내우외환으로 정신없음만 믿고 저지른 일이었던가.
어쨌든 오보이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이대로 야춘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하의 말에 오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쉰 명 밖에 안된다고 하지만 놈들이 이 정도로 약하니 어쩌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놈들의 수가 많고 방비가 충실하면 다시 닝구타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니."
호거는 시급히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민까지 파격적으로 발탁해 보냈지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싱겁게 끝날듯했다.
'아. 남은 상대가 있었군.'
조선군.
그들을 전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이자원이라······.'
얼마 전 회의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 아민을 제외한 모두는 잠시 침묵했다.
그 무게를 알았기 때문에.
지난 조선 정벌 자체를 홀로 뒤집어버렸고, 가도 구원 때는 쇼토마저 놈의 계책에 당했다.
용맹 또한 상당한 수준이라 쌍령에서는 시르투의 목을 베었다던가.
"한번 겨뤄보고 싶군."
만주 제일의 용사로서 호승심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구왈기야 오보이.
24살의 그는 자신만만하게 조선군의 도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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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라라지가 패사(敗死)하고 청군이 진격 중!
이 소식을 받아든 기야하찬은 대경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적은 50명에 불과하다 하지 않았느냐?"
괜히 아들을 다그쳤지만 둔아 또한 분명히 그렇다고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심정이었다.
"잠시 야춘을 떠나야겠다."
기야하찬은 뒤늦게 토벌군을 피해 도망치자는 기라라지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형님의 말처럼 웅도로 갈 생각이십니까?"
"웅도에 꿀을 발라놓은 것도 아니고, 왜 자꾸 그리로 가자하느냐?"
기야하찬이 말했다.
"조선으로 갈 것이다."
얼마 뒤.
야춘에 도착한 오보이는 기야하찬의 부락이 조선으로 넘어간 사실을 발견했다.
정찰대가 치른 작은 싸움 한번에 기야하찬의 난이 평정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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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부.
조선군은 철령관을 지나 쉬지 않고 북상하여 겨우 이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겨우 50명에게 근거지도 잃고 도망쳐왔단 말이냐?"
이자원이 한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울러 기야하찬에게 굳이 말을 높이지 않는 그였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조선군과 합류하기 위해 잠시 위치를 옮긴 것 뿐이오."
기야하찬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집도 절도 잃고 도망온 주제에 뻔뻔한 태도였지만 이런 허세라도 부리지 않으면 자신의 이용가치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원이 그의 허세에 걸려들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자의 허풍을 믿고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자원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일은 저질러 놓고 큰소리만 뻥뻥 치며 모든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인간들.
괜히 그런 자들에게 말려들면 이와 같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사오이까."
황익의 속삭임에 이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적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거니와, 이렇게 귀환하면 임금의 권위에 타격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북벌을 완수해야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기야하찬을 맹주로 세운다는 전략은 완전히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할 것이었다.
"경하창. 그대는 아들들과 함께 번장(番將)으로서 내 지휘에 따르라."
"그런 법이 어디있소? 나는 분명 조선왕 전하에게 신속의사를 표하기는 했으나 엄연히 나는 조선군과 근본이 다르니······."
슬쩍 항의하던 기야하찬은 이자원이 노려보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성치 못할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군략 회의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