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55화 (55/213)

< 나아갈 곳 (3) >

"남만승이라는 자들이 조선에 자신들의 도(道)를 퍼뜨리고자 한다며 허락을 청했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임금의 말에 승지가 답했다.

예수회가 적비를 통해 이자원에게 약속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낸 것과 별개로, 조정에는 따로이 정식 서찰이 들어간 상태였다.

"훈련대장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금이 이자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애초에 예수회를 끌어들인 것이 그였으니 나올 대답도 뻔했다.

"대국에서도 공인이 되었고, 오히려 승려라 하나 재주가 있어 황제께서 이들에게 역법(曆法)과 홍이포를 만드는 중임을 맡기셨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나이다."

명으로 떠나기 전부터 임금과 미리 말을 맞춰 놓은 사안이었으므로, 이 말은 지금 대전에 있는 중신들을 향한 것이었다.

이자원의 예상처럼 숭정제가 공인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승려라는 말에 일제히 반대를 표하려던 신하들도 잠시간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생각도 그렇다. 본래 사교(邪敎)를 전하려 하는 자들은 관의 눈을 피해 은밀히 허튼 말을 퍼뜨리기 마련인데, 이들은 미리 편지를 보내 조정의 허락을 청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에서도 이를 공인했으니 어찌 이들을 장각(張角)과 같은 무리로 보겠는가."

임금이 말했다.

"어차피 삿된 말을 전하기로는 이미 나라에도 불도(佛道)가 있고, 또 상제니 신선이니 하는 허망한 말은 도교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를 조금 믿는다 한들 문제될 것은 없으니, 구태여 금할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좌의정 신경진과 우의정 강석기도 이렇게 나오니 다른 신하들도 뭐라 반박을 할 틈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예조판서 김집만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임금이 폭탄발언을 던졌다.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는 북정(北征)을 논의함이 어떤가?"

"전하!"

그 말을 외친 사람은 목을 가다듬던 김집이 아니라 호조참판 김육이었다.

그는 용감하게 나서서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넘쳐나고 더러는 화전을 부쳐먹는 판이옵니다. 또 군량은 어디서 구해야 하겠사옵니까?"

이미 정초의 병자호란으로 인해 서북은 피폐해졌고 군량도 동났다.

이런 상황에 훈련도감 병력을 파병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싸워야 하는가.

"황상께서 내리신 은자로 쌀을 사온 것이 있지 않느냐."

숭정제가 내린 은 10만 냥은 대부분 강남에서 쌀을 사오는데 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은 1냥에 쌀 2섬이니, 20만 석은 족히 사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명 또한 지독한 기근으로 인해 곡가가 폭등한 상태라, 강남이라 해도 곡가가 두 배 가까이 치솟아 사온 쌀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호조는 그것을 최대한 나누고 아껴 서북 백성들을 다 먹이려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했는데, 남은 일부를 군량으로 전용하겠다는 말에 김육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하였사온데, 이런 때에 군사를 일으킴은 옳지 않사옵니다."

"전쟁은 겨울에 일어났으니 한해 농사를 죄다 망치지는 않았지 않느냐? 곧 수확기이다. 조금만 변통하여 궁한 것을 넘기면 되는데, 이런 호기를 놓칠 수가 있겠느냐?"

임금이 외쳤다.

"두 말할 것 없다! 훈련대장 이자원은 어명을 받들라!"

임금의 말에 이자원이 앞으로 나아갔다.

"야춘으로 나아가 경하창을 구하고, 회맹을 통해 동북을 회복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전하······."

김육이 그럼에도 임금에게 매달렸지만 임금은 김육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호조의 의견대로 대동법도 시행하겠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그리 말이 많은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고 옥사를 거치며 임금의 권위는 절정에 달했다.

그가 칼을 뽑아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임금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왕의 행사라고 여겼다.

호조참판의 반대야 그에게는 아무런 걸림돌도 아니었다.

"이미 어명을 내렸는데 그대 따위가 반대하는가! 북벌의 대의를 잊은 것이냐?"

"그럴리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시끄럽다!"

임금이 이자원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훈련대장!"

"예, 전하."

"북벌의 대업은 천조에 반역한 여진을 다스리고, 군부의 원수를 갚는 것에 그 뜻이 있다. 혹 군사를 움직임에 있어 발목을 잡는 자가 있거든 곧 역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월(斧鉞)을 내릴 터이니 북벌을 배신하는 자가 있거든 망설임없이 쳐라!"

거칠게 말하는 임금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출정 때 종군하는 자들만이 대상이었지만 '북벌에 발목을 잡는 자'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명백했다.

이자원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다만 티내지 않고, 조용히 그렇게 읊조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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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섭정왕! 지금 제정신이오?"

좌익왕정을 찾은 도르곤이 대뜸 그렇게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자가 들이닥치자 호거 또한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곧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우섭정왕."

그는 한창 사람들을 모아 회합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면면을 살펴보던 도르곤은 눈을 치떴다.

호거의 양 옆에 앉아있는 호로호이와 양샨, 기사이 등은 측근이니 그렇다치고, 끝에서 혼자 어색하게 차를 들이키고 있는 차하르 친왕 에제이는 뭔가.

"차하르 친왕은 왜 여기 있소?"

도르곤의 물음에 호거가 비웃듯이 답했다.

"묵던(심양)에서의 생활이 아직 익숙지 않은 것 같아 챙겨주러 불렀소. 사적으로는 나의 매제(妹弟)가 아니오?"

에제이는 홍타이지의 딸과 결혼했으니 호거의 매제는 맞았다.

하지만 겨우 그런 이유로 여기에 불렀을리는 없었다.

'황백부왕의 후처에게 접근하는 것도 모자라 몽골에까지 손을 뻗으려 드는 것인가.'

도르곤이 이를 빠득 갈았다.

에제이는 실권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북원 최후의 대칸이었던 만큼 강력한 명분을 쥐고 있었다. 그렇기에 몽골 불온세력의 구심점이 될까 두려워 이곳으로 끌고 온게 아닌가. 그런데 사사로이 그에게까지 접촉하다니.

"좌섭정왕, 우리 정쟁에만 몰두하지 맙시다."

도르곤은 호거를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했다.

"정쟁에만 몰두하다니?"

호거가 모르는척 물었다.

"아민은 이미 한번 대청을 깨려든 자요."

도르곤과 호거 모두 권력을 탐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이라는 나라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민은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독립 뿐.

"우섭정왕."

호거는 아까 얼굴에 띄운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유지하며 도르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말했다.

"아니, 도르곤. 네놈만 이 나라를 위하는 척 위선떨지 마라. 내가 그 정도 목줄도 걸어놓지 않고 아민을 풀어줬을 것 같으냐?"

그 말에 도르곤은 눈알을 돌려 호거를 노려보았다.

"정녕 대청이 안정되길 원한다면 네놈부터 실권을 넘기고 순순히 물러나면 될게 아니냐. 함께 진흙탕을 구르고 있는 주제에 말로는 모든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나불나불······. 구역질이 나는군."

"······."

말을 마친 호거가 도르곤의 귀에서 입을 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보기에 아민은 깊이 뉘우쳤으니 그 능력만 거두어 써도 무방하오! 이것이 군왕의 자질이 아니겠소?"

"맞습니다, 좌섭정왕 전하!"

"전하의 배포가 참으로 크십니다!"

호거의 말에 측근들이 왁자지껄하게 찬동했다.

정말 그 말을 믿어서라기보단, 호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처사였다.

그 모습을 본 도르곤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군."

도르곤은 말했다.

"잘 있으시오, 좌섭정왕."

그 말을 남기고 도르곤은 곧장 좌익왕정을 떠났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 수크사하(蘇克薩哈)가 그의 뒤를 따랐다.

"더 이상 저 자를 놔두어서는 안되겠다."

도르곤이 걸음을 재촉하며 작게 속삭이자 수크사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우섭정왕,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몽골에 가있는 도도를 불러들여야겠다. 적당한 명분을 생각해야겠군."

도르곤이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예친왕(豫親王)께서 정백기를 이끌고 몽골에 계셔서 불만을 억누르고 있는 중인데······ 괜찮겠습니까?"

수크사하가 그리 물었지만 도르곤은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렇다고 호거를 저대로 놔둘수는 없다."

차하르 친왕을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니 몽골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구심점없이 산발적으로 벌어질 공산이 컸다.

그보다 청을 위해서는 호거를 쳐내야 했다.

혹은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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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구타(寧古塔, 영고탑).

본래 발해의 도읍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던 이곳은 발해 멸망 이후에도 동해여진의 중심지가 되어 명맥을 이어나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청이 흑룡강 일대와 동해여진을 통제하는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니, 한번 원정군이 출동하면 오가는 군량과 서신이 모두 닝구타를 거치고, 발생한 부상병 또한 이곳에 머물렀다.

또한 닝구타 일대에 정착한 동해여진 부족들도 많아 원정군 일부, 어떤 때에는 전부를 이들로부터 모집하기도 할 정도였는데,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대청의 사정상 함부로 대군을 내기가 어려우니, 대부분의 병력은 이곳 닝구타에서 초모(招募)해야 할 것이오."

아민이 말했다.

"다행인 것은 기야하찬의 세력이 그리 크지는 않다는 점이오.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능히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이오."

사르후다가 아민에게 찬동하며 말했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후르카 지역의 수완부(蘇完部)에 살았고, 그 또한 동해여진에 정통한 전문가였기에 아민을 보좌하여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양람기(镶蓝旗)에 속한 자로서 한때 아민의 수하에 있었던 자이기도 했다.

지금은 현 기주인 지르갈랑에게 붙었지만 말이다.

전 상관에게 취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불손한 말투였지만 아민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좋소. 그대는 병력 초모를 맡아주시오. 오보이(鰲拜)는 선발대를 이끌고 야춘으로 가 정탐하고, 나는······."

아민이 한참 군령을 내리고 있을 때 전사 하나가 뛰어들어와 말했다.

"장군, 와르카로부터 급보입니다."

와르카는 두만강 일대에 사는 여진족의 통칭이다.

누르하치 시절부터 상당수가 청을 피해 조선에 내투하였는데, 그 후 청의 세가 더욱 커지자 향화호인으로 불리는 자들 일부가 다시 조선을 배신하고 청에 투항하기도 했다.

지금 들어온 소식은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는 이들 중 함경도에 있는 자가 보낸 것이었다.

"무어라 하더냐?"

"조만간 조선군이 기야하찬을 돕기 위해 북상할 예정이라 합니다."

그 말에 아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경흥부 병력이 좀 움직인다 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 놈들의 근거지인 야춘은 반드시 파괴될 터이니."

"저, 그것이······ 경흥부가 아니라 조선의 훈련도감이라고 합니다. 이자원이 이끄는······."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이자원이 누구인데 호들갑이냐?"

아민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주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유배에서 풀려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민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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