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아갈 곳 (2) >
문정전은 임금이 일상업무를 보는 곳이다.
이자원이 부름을 받은 곳도 여기였다.
그러나 모인 사람은 임금과 이자원 뿐만이 아니고, 신뢰하는 동생인 봉림대군도 함께였다.
'훈련대장과 어영청 도제조를 함께 불러들인다라······.'
겉으로 보기에는 중앙군의 두 축을 담당하고 있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의견을 모두 경청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어영대장 구인후도 아니고, 도제조인 봉림대군이 온 이유는 뻔했다.
"그대는 정녕 경하창을 지원하는 것이 아무런 득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임금의 물음에 이자원이 망설임없이 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칼 같은 대답이로구나."
임금은 한숨을 쉬었다.
딱 자른 대답에 임금은 이번엔 대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봉림대군의 생각은 어떠하냐."
봉림대군은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태조대왕 이래로 북변의 야인들은 줄곧 조선의 신하를 칭하고 울타리가 되어 왔으니, 나라의 위엄이 국경 밖까지 떨쳤으며 동북의 방어는 이에서 비롯되었사옵니다."
대군이 이어 말했다.
"그러나 청이 들어서며 저들과 북변 야인들이 같은 족속이라 하여 이들을 제 나라에 복속시키니, 열성조께서 북방을 진무(振武)하신 뜻이 마침내 스러지고 말았사옵니다.
여러 신하가 몹시 통탄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나, 이번에 경하창이 귀부를 청하며 다시 이를 회복할 기회가 생겼으니 전하께서 한번 칼을 뽑으시어 야인들을 묶으신다면 위엄을 떨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북벌의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이 참에 동북을 평정하고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아오자는 제안에 이자원은 얼굴을 굳혔다.
말은 번드르르하지만 과연 그것이 북벌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생각도 이와 같다."
그러나 임금은 봉림대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단순히 경하창 하나만을 보고 지원하는 일이 아니다. 청이 초피 등 공납을 과중히 하여 이미 동북의 야인들에게 원성이 높으니, 그들을 묶어 청에 대항하게 할 생각이다. 그리고,"
임금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국에서도 우리가 청을 공격하기를 원하고 있다."
"대국에서 말이옵니까?"
"그렇다."
저번 책봉사가 은밀히 전한 말이라고 했다.
사르후 전투 때처럼 직접 세세한 병력 동원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기회를 보아 청의 한 귀퉁이를 물고 늘어지라 하던가.
"이미 가도의 재건을 우리 조선이 도맡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이자원은 그리 반론했다.
명나라의 요구 따위를 들어주기 위해 실익도 없는 곳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임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대전에서 입씨름이나 하며 아무 의미없이 하루를 넘길 때마다, 그것이 막중한 짐이 되어 내 몸을 짓누른다. 조금이라도 빨리 인조대왕의 원수를 갚아야 하거늘, 오랑캐들은 오늘을 평안하게 보내고 있겠지."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랑캐들을 단칼에 쳐내기 위해 하루를 준비하는 것이옵니다. 부디 조급해하지 마소서."
임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모든 것이 신들의 잘못이옵니다' 하며 엎어졌겠지만, 이자원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았을 뿐.
하지만 임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청이 다시 혼란을 수습한다면? 혹 그럴리야 없겠지만, 오랑캐가 산해관을 넘기라도 한다면? 북벌도 앙갚음도 모두 이루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에 뭐라도 행동해야 한다.
임금은 무슨 일에라도 나서고 싶었다.
"그러니 너는 내 명을 받들라."
이자원은 임금의 눈빛을 보았다.
'이미 결심했군.'
더 왈가왈부해보아야 소용없는 노릇일 것이다.
'빌어먹을.'
임금의 구상이 어디까지 먹힐지는 모른다.
아마 이루어질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면, 공연히 임금과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했다.
"경하창이라는 자를 회맹(會盟)의 중심으로 삼아 야인들을 통솔케하실 작정이시옵니까?"
"그렇다. 애초에 귀부 의사를 밝힌 것도 그이니."
임금의 말에 이자원은 반론했다.
"하지만 전하, 경하창이라는 자가 혹 세력이 미약하거나 다루기가 어렵다면 어찌해야하겠사옵니까?"
"음."
임금도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기야하찬이 조선에 귀부 의사를 표했으니 우선적으로 그를 고려했을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자원이 주상에게 속삭였다.
"그래. 이 문제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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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꼭 이자원을 보내셔야 하겠사옵니까?"
"대군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봉림대군이 조심스레 묻자 임금이 오히려 되물었다.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실로 큰일인데, 본인이 내켜하지 않으니 자칫 대업을 다스리지 못할까 우려스럽사옵니다. 게다가 훈련도감은 이미 전쟁에 많이 불려다녀 지쳤사온데, 차라리 저희 어영청(御營廳)에 맡기심이 어떻겠사옵니까."
"네가 도제조 노릇에도 이제는 관록이 붙은 모양이구나. 스스럼없이 '저희 어영청'이라 칭하는 것을 보니."
임금이 허허 웃으며 말했지만 봉림대군은 사색이 되어 납작 엎드렸다.
"저, 전하. 결단코 신이 딴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옵고······."
번개같은 속도였다.
임금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별뜻없이 동생에게 던진 말이건만 문득 그와 대군 사이의 벽을 느낀 것 같았다.
'위치 때문인가.'
아무리 자문직이라 하나 동생을 군영에 앉히고 힘을 실어주는 것은 상당한 우려를 샀다. 옥사를 일으키고자 마음먹은 원인도 청서가 그것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혹여 자그마한 오해라도 피하기 위해 봉림대군은 이리 저자세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너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도 인조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침식(寢食)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신데 신이 어찌 하잘것없는 수고로움을 내세우겠사옵니까."
봉림대군의 결연하게 대답했지만 임금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영청을 파병하자니, 중군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올라온 글에 따르면 말먹이도 직접 준다는데 사실이더냐?"
"그렇사옵니다. 품성이 곧을 뿐만 아니라, 정방산성에서도 청군을 무찌른 자이니 실력도 탁월하옵니다. 보면 볼수록 중군으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옵니다."
병자호란 당시 수안군수로 있던 이완은 도원수 김자점과 함께 청군을 격파했다.
봉림대군은 그 소식을 듣고 이완을 만나보기를 청했고, 그 사람됨에 반해 중군으로 추천했다.
"너의 안목은 훌륭하니 내가 믿는다. 이완 또한 능히 일군을 다스릴 수 있는 장수겠지. "
임금의 말에 봉림대군의 얼굴에 뿌듯함이 감돌았다.
이자원보다 전공을 세울 기회가 적어서 그랬을 뿐, 자신이 봐온 바로는 이완은 젊은 나이에도 어영대장 정도는 능히 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다만,"
하지만 임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자원에 미치진 못한다."
봉림대군은 당황한 표정으로 임금을 쳐다보았다.
이자원이 세운 전공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신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밖에는 할 사람이 없으니 그를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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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은 다시 전쟁터로 나갈 것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아, 그렇다면 소관도 준비하겠사오이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도 없었지만 박철균은 서둘러 말했다.
"박 파총, 너는 훈련도감에 남아라."
그러나 이자원은 그렇게 말했다.
"예? 대장 영감께서 가시는데 소관이 따라가지 않는 것은······."
"훈련도감 좌부는 이미 가도 정벌에 종군하여 체력 소모가 심하다. 이번에는 우부를 거느리고 갈 것이다. 너는 좌부의 파총이니 따라갈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냥 소관도 데려가주십시오. 남한산성에서부터 대장 영감을 따라다녔으니, 소관만큼 합이 잘 맞는 군관도 없지 않겠사오이까. 그리고 전장에서의 호위도······."
"내 호위는 맡을 사람이 따로 있다."
박철균이 그리 말했지만 이자원은 신경쓰지 말라는 투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김충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중군께서는 박 파총과 협력하여 남아있는 병사들의 훈련에 집중해주시오."
이제는 대장과 중군의 사이가 되었으니, 이자원과 김충선의 말투 또한 달라졌다.
"예, 대장 영감."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도 일단 일부나마 훈련도감의 재편은 계속되어야 했다.
병사들의 체력단련을 맡고 있는 것이 박철균이니, 그가 남는 것이 타당했다.
"그리고 곧 무과가 실시될 예정이라 하오. 훈국이 월과군기 생산을 위탁받으며 재정도 확보될 것이고, 전하께서도 훈국 전체의 충원을 계획하고 계신 모양이니 아마 초관의 숫자도 대폭 늘어나겠지요."
그거야 다들 예상하던 바였다.
"그러나 본래 이번 무과는 공훈 있는 병졸들을 대상으로 하는만큼, 아무래도 병서에 대한 지식은 떨어질 것이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사오이까."
이자원의 말에 김충선이 대답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중군 영감께서 맡아 신임 초관들을 교육시켜 주시오."
원래는 초관들의 교육까지 박철균에게 맡길 작정이었으나, 그는 무예 실력은 모를까 병법에는 크게 밝지 않았기에 맡기기가 힘들었다.
"병서의 종류가 한두가지가 아닌데 그 짧은 시간에 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사오이다."
김충선이 말했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무과시험에서는 무경칠서(武經七書)라 하여, 손자(孫子)와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삼략(三略), 육도(六韜) 의 일곱 병서를 기본으로 보았다.
또한 왜란 이후로는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가 주목받아 그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났으니, 배워야 할 것만 8종류나 되는 것이다.
"우선 여덟 병서는 천천히 가르치기로 하고, 우선은 초관으로서의 임무만 잘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겠소."
이자원은 그러면서 김충선에게 얇은 책 한권을 내밀었다.
"「야전교범野戰敎範」이라······. 혹 손수 지으신 병서오이까?"
전통적인 의미의 병서라기보다는 지침서에 가까웠지만, 이자원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분량이라면 짧은 시간에도 충분히 숙달을 시킬 수 있을 것이오."
김충선은 이자원이 직접 지었다는 이 병법을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대장 영감과 같은 명장께서 지은 병법이라니······. 이야기가 퍼지면 무과를 준비하는 이들도 앞다퉈 배우려할 것이오이다."
박철균이 말했다.
"야전교범은 반출 금지다. 기밀이니 이를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엄히 다스려라."
이자원이 말했다.
뭔놈의 병서를 퍼지지도 못하게 하냐고 박철균이 투덜거렸지만, 대장의 명령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다.
"대장 영감."
"무슨 일이냐?"
초관 하나가 들어와 말했다.
"가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요."
===
가도에 남겨놓고 왔던 적비가 도성으로 올라왔다.
"훈련대장이 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다."
적비가 던진 말에 이자원이 답했다.
'숭정제에 보고할 것은 다 보고한 모양이군.'
그럼에도 순순히 그의 곁에 돌아온 것을 보면 가도 문제에 있어서는 트집잡힐 일이 없다는 뜻이리라.
"······이미 가도 총병의 대임을 맡으셨으면서 조선 도성에서 머무셔도 되겠사오이까?"
조선의 도성이라.
이제는 정체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만간 부총병을 뽑아 대리하게 할 것이다. 어차피 천조가 원하는 것은 나 자신보다는 가도의 재건이 아니더냐."
이자원이 서늘한 표정으로 적비를 바라보았다.
적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만승(南蠻僧)들은 도착했더냐?"
이자원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담 샬에게 선교사와 기술자의 파견을 요청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으니, 수배를 마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가도에 우선 머물며 대장 영감의 비답을 기다리겠다 하였습니다."
이걸 먼저 줬어야지.
이자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적비가 품 속에서 꺼낸 서찰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