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초공사 (3) >
본래 혼인을 치르고 나면 3일은 처가에 묵다가 시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를 우귀(于歸)라고 한다.
그러나 양주 본가까지 아내를 보낼 수도 없거니와, 본래 살던 세칸짜리 초가는 곱게 자란 아가씨가 생활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훈련도감 본영(本營), 곧 훈국신영(訓局新營)의 근처에 새로 집을 구해야 했던 이자원이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식구는 지낼만한 크기였다.
"이 대장께선 계시오?"
퇴청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려와 나가보니 혈색 좋아보이는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오."
찾아온 이는 이번에 호조참판으로 임명된 김육(金堉)이었다.
이자원이 책봉주청사의 일행으로 북경에 갔을 때 김육은 동지사로서 먼저 회동관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안면은 터둔 상태였으나, 이리 불쑥 찾아올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말은 자신이 오늘 임금에게 올린 진언이 김육의 귀에 들어갔다는 뜻일 터.
"마령서는 잘 자라고 있소이까?"
유주가 본가에서 데려온 몸종에게 다과를 내오라 이르고, 이자원이 물어본 말은 그것이었다.
북경에서 감자에 대해 설명해주고 난 뒤 김육은 그것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이자원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올 적에 일부 얻어다가 기르기로 해봤던 것인데, 김육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째 손재주가 서툴러서 다 망친 것 같소. 아무래도 처음 기르는 작물이니 이런저런 시행착오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귀한 물건을 괜히 망친 것 같구려."
김육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종자도 제법 많이 사왔고, 훈련도감에서도 한켠을 내어 심고 있으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되오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런데 지금 마령서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러 왔소만."
"대동법에 관한 것이겠지요."
이자원이 차를 따랐다.
벌써부터 김육은 본론을 꺼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대동법에 관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소. 이 대장이 대동법에 관심이 있는 줄은 실로 몰랐소이다."
"지방에서는 이미 사대동(私大同)이라 하여 수령들이 현물 대신 공물가로 거두는 것을 공식화하지고 간언을 드린 것 뿐이오이다."
"하지만 관청과 방납업자들이 결탁하여 점퇴(點退)하고 방납물을 고가(高價)로 불러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폐단은 국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훈련대장의 간언은 실로 시의적절하다고 밖에 할 수 없소."
사대동은 어디까지나 수령이 자율적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조정의 공식적인 점검 체계 아래 있지 않았으니 당연히 김육이 말한 짓이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영감께서도 대동법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소이다."
"그렇소."
김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처음으로 대동법에 관한 입장을 꺼낸 것은 원래 역사에서는 1년 뒤,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는 대신 호조참판에 앉았고, 때마침 이자원이 적발해낸 비리가 명분을 던져 주었다.
"오래 전부터 대동법에 대해 생각은 해오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굳게 마음을 먹은 적이 없소. 도대체 이 방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취했으면 훈국의 무관들까지 나서서 끼어들었단 말이오?"
김육이 침까지 튀기며 말했다.
"쉽지는 않을 것이오이다."
그간 호조를 중심으로 꾸준히 대동법에 찬성하는 관료군이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호조판서 심열과 참판 김육이 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 초 삼도대동법의 실패 이후 대동법 대신 공안을 개정하여 공납 문제를 개선하자는 여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지금 예조판서로 있는 김집도 그런 쪽이었던가.'
원래 역사에서 김육과 김집의 개혁 방향성은 달랐다. 김집은 공안 개정론자였고, 효종 즉위 후 대동법을 두고 김육과 마찰이 있자 사직하고 낙향할 정도였다.
"하지만 명분이 좋소. 당장 공안을 고쳐 월과군기의 폐단을 막을 수 있겠소?"
"어렵겠지요."
공안 개정의 핵심은 과다한 공물을 줄이고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공물을 바꾸는데 있었다.
그러나 속오군에 지급될 군기를 줄이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은 당장 임금부터가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대동법에 앞서 해야할 일이 있사오이다."
"양전(量田)을 말하는 것이오?"
김육의 말에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명분이 월과군기에 관한 것이었으니, 그것부터 대동미(大洞米)에 산입시키는 것이오이다."
"그렇다 함은······?"
"군기의 납부를 폐하고, 그것을 미두로 거두어 각 군영에 생산을 맡기는 것이지요."
이자원이 말했다.
이것이 그가 노린 바였다.
"이제보니 훈련대장께서 바라는 바가 그것이었구려."
김육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관도 참판 영감처럼 대동법은 필히 시행되어야 할 법이라고 생각하오이다. 거기에 더해 각 군영의 재정 확보도 중요한 일이지요."
조선의 군대를 강군(强軍)으로 만들기 위해선 해야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훈련도감의 군비로 들어오는 돈은 전부 유지보수에 전용하기에도 모자라니, 새로운 일을 시도해야 했다.
심세괴에게서 뜯어낸 잠화를 쓰더라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다.
"어차피 서울 부민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이익을 군영들이 취하는 것 뿐이오이다. 오히려 생산가와 공납가 사이의 적절한 폭만 찾아낸다면 백성의 부담도 줄고, 속오군은 좋은 군기를 지급받을 수 있으며 군영들은 넉넉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을테지요."
"그거야 그렇소만······."
김육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자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군영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이유를 안다는 듯이.
"조정에서는 한창 북벌의 의론이 일어나고 있소."
임금은 원래 역사의 효종이 그랬던 것처럼, 김집을 예조판서에 앉힘으로써 북벌 이념 형성에 돌입하고 있었다.
공서도, 청서도, 혹은 이름만 남은 남인이나 북인마저도 드러내놓고 여기에 반대하지 못했다.
인조가 청군의 손에 죽었으니 북벌에 반대한다는 것은 곧 불충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부의 원수를 갚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오. 하지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은데(君子报仇十年不晚), 이리 서두를 필요가 있겠소이까."
김육 또한 사대부로서 인조의 죽음에 대해 분노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이 곧 군비 확장과 섣부른 북벌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오랜 전란으로 나라가 피폐한데 성공할지 못할지도 모르는 북벌에 매달려야 한단 말인가.'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적어도 내실을 다질 때였다.
그리고 나서 오랑캐가 완전히 흔들리고 나면 북벌을 위해 나아가도 무방하지 않은가.
"북벌과 안민(安民), 두 가지를 모두 챙기면서 나아가는 길도 있겠지요."
"돌은 하나인데 두 마리 새를 잡겠다는 말이오?"
김육은 이자원과 더 대화를 나누어보았자 소용이 없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북벌과 안민을 모두 챙긴다 하지만 이 자에게 안민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이자원, 이 사람만 그런 것일까.
전쟁 후 임금은 너무나 변했다. 예전의 그 온순한 세자 저하라고는 볼 수 없었다.
임금 또한 어쩌면 눈 앞의 훈련대장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김육은 가슴 한켠이 쿡쿡 쑤셨다.
"나는 이만 가보겠소. 월과군기에 관한 이야기는 호조에서 논의를 해 상신할 터이니, 아마 가납될 것이오이다."
김육은 결국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살펴가십시오, 참판 영감."
이자원은 돌아가는 김육을 배웅했다.
'민생이라.'
조선의 명재상에게는 그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자원에게는 아니었다.
임금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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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으억! 더는 못해!"
"누가 횟수를 채우기도 전에 뒤집어지는가! 어서 일어서지 못할까!"
훈련도감의 너른 공터, 현대식으로 따지면 연병장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는 아침부터 군졸들이 모여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퍼져있느냐! 서둘러 다시 단련을 시작하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를 감독하고 있는 이는 박철균이었다.
상관 옆에서 전공을 열심히 챙겨 고속승진한 탓에, 어찌보면 굴러들어온 돌이나 다름없는 그였지만 이자원이 중군 이현달을 날려버리고 순식간에 훈련도감을 장악해버린 후로는 다른 고참 파총들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대장께서 체력단련(體力鍛鍊)이라 명하신 이 훈련도 박철균 그가 도맡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파총 나리!"
박철균을 향해 보졸 하나가 타는 목소리로 손을 들고 외쳤다.
"무슨 일이냐?"
"소인들은 이런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고 너무나 힘이 드오이다. 훈련량을 좀 줄여주시면 안되겠사오이까?"
병졸들로서는 진심을 다해 우러나온 안타까운 외침이었다.
이자원이 새로 훈국 대장에 취임한 이후로 이 듣도보도 못한 '체력단련'이 일과가 되었는데,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침마다 공터를 달리게 하는 것은 그렇다치자.
높이뛰기니 온몸비틀기니 하는 체조(體操)부터 시작하여 영 민망한 자세로 반쯤 앉는 자세를 시키기도 하고, 오리걸음으로 걷게 하거나 팔굽혀펴기를 시키는 등 병사들이 듣도 보도 못한 훈련들이 도입되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계속 주기적으로 이런 훈련을 받고 있었으니 불평이 터져나올만도 했다.
"너희의 의복이나 먹고 마시는 것 어느 하나 조선 백성의 혈한(血汗) 아닌 것이 없다. 전쟁 때 본 오랑캐 중 어느 하나 만만한 놈이 있더냐? 겨우 이 정도가 힘들다면 훈국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아라!"
박철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병졸들은 한숨을 쉬며 다시 일어났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진 것은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이들이니 급료라도 제깍제깍 챙겨주는 훈련도감에 남아 있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훈련보다는 다른 것을 시키는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시키는 박철균조차 긴가민가하기는 했다.
이보다는 좀 더 싸움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훈련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여기에 대한 이자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이 없다.'
정확히는 아직까진 없다.
현재 별도의 돈을 들이지 않고 시킬 수 있는 것이 체력단련 뿐이었던 것이다.
제식(制式)이나 진법 같은 경우는 기존에도 하고 있었으니 이자원도 지금으로선 굳이 건드리진 않았다.
그래도 이자원은 비관적인 소리만 하지는 않았다.
월과군기의 판매대금을 받아 재정을 확보하기로 했다는 말에 덧붙여, 이런 말도 했던 것이다.
'기존 조선군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사격 훈련이지만, 이제 가도를 쥐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용이해질 것이다.'
명은 건국 이후부터 조선이 염초를 확보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원료가 부족하니 화약의 수급도 모자랐고, 당연히 사격 훈련도 변변찮았다.
그러나 이제 가도 총병은 이자원이었고, 총병의 명의로 산동(山東)에서 나는 초석을 마음껏 실어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파총 나리, 부르셨소이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보통 사람과는 억양이 다른 느낌에 박철균이 돌아보니 과연 코 크고 얼굴 흰 자 셋이 서있었다.
"아, 반갑소."
이전에도 훈국에 있다보면 언뜻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이들과 가까이서 마주보고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용건이 있으신 분은 내가 아니라 대장 영감이신데······ 따라오시구려."
박철균의 말에 세 사람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새로운 훈련대장 영감이 도대체 무슨 용건이 있어 보자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신기한 구경이나 해보자는 뜻에서 부른 것일까.
그러나 감히 훈련대장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덜란드 데리프 출신의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 라이프 출신의 드리크 히아베르츠(Direk Gijsbertz), 암스테르담 출신의 얀 피에테르츠(an Pieterz)는 그렇게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박철균의 뒤를 따라갔다.
작가의말
대동법을 적용하는데 있어 일어나는 시행착오는 이미 다른 대역물에서 많이 다루기도 했고, 본작은 내정물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김육 영감에게 맡겨두겠습니다. 나중에 간단히 경과만 짚고 넘어갈 예정입니다.
실제로 대동법이 실시된 후 훈련도감과 어영청 등 군영들이 각읍을 대신하여 월과군기를 제조하게 되었는데, 생산가와 월과군기가의 차액을 통해 군영의 재정을 충당하였습니다. 그 덕에 영내의 제조장을 대규모로 키우고 수백 명의 장인을 모집하였다고 하니 상당한 수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월과군기가를 부과하는데 있어서 종래와 달리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개선되었다고 하니 백성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