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9화 (49/213)

< 기초공사 (1) >

잠들었던 소녀는 침을 흘리며 깨어났다.

"응······."

"해가 중천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게냐."

바깥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에 유주는 화들짝 놀라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러나 그녀의 옷고름은 멀쩡했다.

"아."

아무일도 없었구나.

약간 안도감과 아쉬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뒤로 하고, 차림새를 갖춰 부모님 앞에 나아가니 어머니 신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간밤에 이 서방이 너에게 거칠게 굴지는 않았더냐."

신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훈련대장이 무섭기도 하고, 또 지체높은 집안이라 방문에 구멍 뚫고 지켜보는 짓궂은 이들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어머니로서는 근심 되는 것이다.

그 무장이 지난밤에 혹 난폭하게 굴었다면, 귀히 자란 이 아이가 과연 몸이나 성하겠는가 싶어 가슴을 졸인 그녀였다.

그러나 유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혼인 준비를 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인지 이자원이 이불 위에 그녀를 엎어놓자 마자 곧장 잠들어버린 그녀였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던 남편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일이 있었으면 자신이 깼을 것이니 어젯밤에는 정말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

덮쳐오면 어쩌나 긴장도 했고 말이다.

"원래 혼인하고 나서는 부부가 내외(內外)하느라 그런 경우가 많다. 이 대장이 그 정도로 섬세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석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나마 그만한 양식은 있는 사람이라 다행입니다."

신씨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물론 부부 간에는 원만하게 거사를 치르는 것이 좋지만, 그것도 얼굴도 익고 정도 붙인 뒤에야 쉬울 것이 아닌가.

금이야 옥이야 키워온 딸이 첫날밤부터 그 야차 같은 인간과 어찌 궁합을 맞추랴.

"······그정도로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닌듯 했사옵니다."

어제 처음으로 본 사람이었지만 나름대로 진중해보였다.

적어도 소문으로 떠도는 도깨비 같은 인간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되었다."

신씨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물릴 수도 없는 혼사가 아닌가.

이제 부부가 어떻게 마음을 맞춰서 잘 살기만 바랄 뿐이었다.

===

"중군은 왜 아니오고 너 혼자만 왔느냐?"

"걱정 마십시오. 중군께서는 영감의 말씀에 놀라시며 서둘러 원기를 회복해 등청하겠다 하셨소이다."

중군의 집에 다녀온 박철균이 말했다.

대단한 성과를 거둔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지만 이자원이 보기에 그런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오지 않겠단 말이군."

이자원이 말했다.

중군은 핑계를 대어가며 거절했고, 천총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적인 항명(抗命)인가?'

대놓고 뻗대지는 않지만, 이렇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가며 집단으로 대장을 따돌리는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단순히 까마득한 부하였던 놈이 출세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도를 넘어, 그리 해야만 하는 이유가.

"마병별장을 잡으러 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군."

이자원이 말했다.

훈련도감 바깥에 사는 중군에게 말을 전하러 간 박철균이 돌아올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직접 가봐야겠다."

무슨 꿍꿍이들인지 가서 살펴볼 작정으로 이자원이 일어섰다.

박철균을 비롯한 파총들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저, 대장 영감."

"무슨 일이냐."

이자원의 옆에 붙은 박철균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간밤에, 합방은 잘 하셨사오이까?"

그 커다란 몸을 움츠리면서 한다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나름 충심으로 한 말이지만 이자원에게 한 소리 들을까 싶어 말투는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자원은 단지 담담히 말했다.

"피곤해보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주의 기색이 창백한 것이 느껴졌다. 굳이 파김치가 되어버린 소녀를 데리고 강제로 거사를 치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서두를 것은 없겠지."

반드시 첫날밤에 거사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오직 그 이유 때문만인가.

'그분은 어떤 사람이셨사옵니까?'

지난밤 그 질문을 들었을 때 감정이 동요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건드리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에 그는 당황했다.

우습지만 자작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되뇌이면서 말이다.

'잊어야 한다.'

그런 감정은 철저히 잊어버려야 한다.

이런 난세에 마음이 약해져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희는 왜 황 별장을 데려오지 않았느냐."

마병별장의 관사에 도착하자, 이자원이 보냈던 병사들이 보였다.

"대장 영감, 그것이······."

"비켜라."

이자원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서안(書案)에 얼굴을 파묻고 곤히 자고 있는 황익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 술병이 여러개 굴러다니고 있는 꼴을 보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시지 않는 통에 소인들도 방법이 없었습니다요."

병사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지만 이자원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박 파총, 깨워라."

"예, 대장 영감."

박철균이 우악스럽게 황익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렸다.

"으, 으악! 뭐냐! 이것 놓아라!"

화들짝 깬 황익이 당황해 외쳤다.

제대로 초점이 맞춰지지 않던 그의 눈에 시력이 조금 되돌아오며, 이자원의 모습을 그렸다.

"훈련대장······ 영감······."

황익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오늘 진시(辰時, 7~9시)까지 본청으로 모이라고. 듣지 못했는가."

"음, 그것이······."

황익은 숙취 때문인지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이 자도 중군, 천총과 마찬가지 이유인가.'

아니, 그렇다면 아예 그들과 발 맞춰 훈련도감에 나오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꼴을 보아하니 그는 어제 밤늦게까지 술을 퍼마시고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오늘 있었던 '훈련대장 보이콧'에 의도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로 술을 마셨는가."

이자원이 말했다.

"그것이······ 소관이 음주를 즐기다 보니······."

황익이 변명했지만 이자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기루(妓樓)도 아닌 훈련도감에서 안주도 없이 술을 퍼마신단 말이냐?"

제아무리 술꾼이라 하더라도 굳이 일터에서 마시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이 예의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것보다 다른 곳에서 마시는 편이 더 즐겁기 때문에.

"그것이, 커험!"

"물이나 한 잔 갖다주어라."

황익의 목소리가 갈라지는 꼴을 보고 이자원이 명했다.

냉수를 마시고 속을 차리고 나서도 황익은 쉽게 말하기를 주저했다.

"군중(軍中)에서 까닭 없이 항명한 죄는 무겁다. 이리 앉혀놓고 묻는 것이 아니라, 형틀에 묶어놓고 문초를 해야 입을 열겠는가?"

이자원이 묻자 황익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고작 이런 일로 그런 짓을 할까 싶지만, 가도 쪽에서 봐온 바로 눈 앞의 신임 훈련대장은 충분히 그럴 인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이 난국을 헤쳐나갈 자신도 없었으니, 숙취 때문에 멍한 머리로 생각해도 순순히 털어놓는 것 밖에 답이 없었다.

"소관은 아시다시피 전 도원수 심 대감의 사람이오이다."

"그렇다는 말은 들었다."

이자원이 말했다.

이리 대놓고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그와도 관련 있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훈련도감에 들어온 것도 심 대감의 후광에 힘입은 것이온데, 그러자 여러 군관들이 서둘러 대감께 줄을 대어 보려고 소관에게 찾아왔었소이다."

뻔한 이야기였다.

라이벌이었던 김자점이 몰락하고 나자 조정의 관심은 당연히 심기원에게로 쏠렸고, 그가 상중이라 하나 이미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기복(起復)시켜 유도대장에 임명했었으니 별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심기원이 비어있는 훈련대장에 갈 것이라 생각했다. 곧 조정에서 흘러나온 말이니 어쩌니 하며 돈 소문이 이런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황익이 거기서 거간꾼 노릇을 했다는 소리리라.

"중군과 천총, 아래로 파총들에게 이르까지 소관과 정답게 지내려는 자가 한둘이 아니니, 그만 인정도 넉넉히 받고야 말았사온데······."

"내가 훈련대장으로 오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졌겠군."

임금은 심기원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이자원이 훈련대장 자리에 앉아버리면서 황익을 통해 뇌물을 전달한 인간들은 그것을 전부 날리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런 인정은 소관이 일부 취하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심 대감께 바쳤사오이다. 헌데 이제 와서 그것을 전부 소관에게 토해내라 하니 이런 억지가 어딨겠사오이까?"

"너는 심 대감에게 다시 되돌려 달라 하면 되지 않느냐?"

"그것이······ 대감께서 거절하셨사오이다."

박철균이 황익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참, 거 어지간히 돈 욕심이 많으신 모양이구려."

뇌물에도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받아챙길건 다 받아챙기고 입을 싹 닫아버리니 그만한 왈패 짓거리가 어디 있는가.

"무관들이 받는 녹봉이래봐야 뻔한 것이다. 뇌물로 들어간 돈은 다 어디서 났느냐?"

그러나 이자원은 다른 곳에 주목했다.

도대체 어디서 심기원 같은 고관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돈을 구해왔을까?

"그것이······ 소관도 모르오이다. 훈국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사정에 밝지 않으니 인정(人情)은 받았으되 그 출처까지 어찌 알겠사오이까?"

황익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도 패악질이라면 지지 않고, 욕심은 더더욱 컸지만 한번 기가 꺾이자 신출내기 훈련대장이고 뭐고 대어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이 곤경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싶어 답답할 뿐.

"박 파총."

"예, 영감."

"그대는 아는 것이 없는가? 필시 훈련도감을 이용하여 긁어모은 돈일 것이다."

박철균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군기와 군량 따위를 빼돌려 팔아먹은 것이 아니겠사오이까?"

그러나 이자원은 부정했다.

"너무 티가 난다. 게다가 전쟁 때는 그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으니, 횡령했더라도 푼돈에 불과할 것이다."

이자원의 말에 박철균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 말씀하시면 소관은 잘 모르겠사오이다. 다만 중군 영감이든 천총 영감이든 움직이는 손발 없이 혼자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니, 초관으로 오래 있던 축들을 불러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겠사오이까?"

박철균의 제안은 그럴듯했다.

그로서도 다른 방법은 생각이 나지 않았기에 이자원은 그대로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네 말이 맞다. 이 일을 알 법한 자들을 불러와라. 그리고 황 별장."

"예, 예!"

황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내 명령에 응하지 않은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다만 인정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못하지."

"그런! 소관은 이미 대장께 알고 있는 사실을 다 털어놓았지 않사오이까?"

"그런다고 죄가 없어지는가?"

이자원이 딱 잘라 말하자 황익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자원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귀관이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잘 해낸다면 덮어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

훈련대장의 명이 떨어지자 박철균은 바로 연식 있는 초관들을 찾아서 이자원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나 하나 같이 입이라도 맞춘듯이 모르겠다 대답하니, 이자원은 강제적인 수단을 써야 하는게 아닌가 고민했다.

"방납?"

그때 유일하게 입을 연 사람이 바로 이정건(李廷建)이라는 초관이었다.

훈국에서 근무한지는 오래되었으나 무과에는 나가지 못했는데,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초관이 된 이였다.

뻗대던 다른 초관과는 달리 이정건은 좋은 쪽으로 제법 결기가 있는 자로 보였다.

"그렇사오이다. 세목(稅木)을 고의로 점퇴(點退, 공물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일)시켜서 헐값에 사들였다가 되파는 수법도 있지만 여기에 비하면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지요."

"구체적으로 방납을 가지고 어떻게 장난을 친단 말인가?"

이자원의 물음에 이정건이 답했다.

작가의말

‘첫날밤과 신혼여행의 문화분석(박부진, 2003)’에 따르면 1950년 이전 혼인한 사람 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단 12명만이 첫날밤 원활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위의 반응도 다양했는데, “(관계를 갖지 않자)왜 그런 병신짓을 했나”며 푸념하던 시부모도 있었던 반면 아예 “첫날밤 하면 못산다”는 친정어머니의 충고로 3일이 지난 후에야 부부관계를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17세기와 20세기 전반에는 상당한 시간적 텀이 있지만, 해당 논문에서는 중매혼으로 인한 관계 형성 부족, 유교적 관념으로 인한 성 지식 부족 등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는만큼 마찬가지로 이러한 원인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의례의 잔치판과 혼례의 여성주의적 판문화 주권 포착(임재해, 2014)’에 채록된 증언에 따르면 문경 등지에서는 ‘첫날밤에 신부와 잠자리를 하면 오래 못산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전통혼에서의 첫날밤을 다룬 두 논문에서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소박’ 등의 상규가 있다는 얘기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록이 있다면 소략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전통적으로도 첫날밤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곧 소박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며, 이런 경우가 오히려 상당히 흔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구전되어 오는 ‘소박’에 관한 서사 또한 성관계보다는 남편의 냉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도 하고요.

심기원은 물욕이 상당히 강했던 모양인지 여러 차례 뇌물과 방납 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습니다. 심기원이 수어청을 통해 각 읍의 공물을 방납하니 온양과 덕산의 백성들이 상소까지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고, 유림이 배로 뇌물을 실어와 그에게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정건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한 공으로 무관이 된 인물로, 그의 아들이 금주 전투에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명군에게 공포(空砲)를 쏘았다는 이유로 처형된 포수 이사룡(李士龍)입니다. 이사룡은 이 일로 후일 성주목사에 추증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