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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8화 (48/213)

< 정략 (2) >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바로 신방에 들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잠깐이라면 상관 없사오이다."

봉림대군의 말에 이자원이 답했다.

종친과 훈련대장이 밀담(密談)을 나눈다는 소리가 돌아 좋을 것은 없으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방이 아닌 트인 뒤뜰로 향했다.

과연 강석기가 명가의 자손이라, 뒤뜰 또한 예사 집안처럼 장독대 몇 갖다놓은 것이 아니고 제법 수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이자원은 말했다.

아직 소년티를 못벗은 대군이지만 왕자 신분이기에 제법 깍듯한 태도를 갖춘 그였다.

봉림대군은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훈련대장 노릇은 할 만할 것 같은가?"

"소관은 제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을 맡지는 않사오이다."

이자원이 굳게 대답했다.

강한 어조에 봉림대군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윽고 말을 이었다.

"스물여섯은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닐세. 그런데도 대장 노릇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만 바르다면 나이는 그리 문제가 아닐 것이오이다. 대군께서도 어영청 도제조를 맡고 계시지 않사오이까?"

대군은 이자원보다 한참 어리다.

총명하고 담대하여 임금이 아끼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가 나이를 가지고 훈시할 입장은 아닌 것이다.

"도제조는 자문직(諮問職)이니 훈련대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겠는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된 꼴이라, 봉림대군이 서둘러 변명했지만 이자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때로는 어떤 자리인지보다 누가 그 자리에 앉는지가 중요한 법이지요."

실권 없는 자리라도 앉은 사람에 따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자원은 현대에서 그런 꼴을 많이 보았다.

지금의 봉림대군도 그러했다.

어영대장은 구인후(具仁垕)가 계속 맡고 있었지만 그 밑의 중군(中軍)은 봉림대군이 직접 발탁한 이완(李浣)이라는 자라던가.

이외에도 임금의 묵인 아래 대군이 대소사를 몸소 챙기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점을 지적하자 대군은 할 말이 없었다.

"황제께서 내리신 가도 총병의 소임도 있지 않은가. 도성에 앉아 훈련대장과 겸할 수 있겠는가."

"조만간 부총병과 참장(參將), 부장(副將), 유격(遊擊)들을 천거할 것이오이다. 아마 천조에서도 흔쾌히 응하겠지요. 그들로 하여금 가도를 재건케 할 생각입니다."

가도는 독립된 해상왕국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천거라는 형식으로 총병이 인사에 재량권을 쥐고 있던 터였는데, 여기에 작금의 특수한 상황과 원활한 인사를 위해서 들어갈 뇌물을 감안하면 이자원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석성도를 지키던 심지상(沈志祥) 같은 이는 가도 토벌 소식을 듣자 바로 투항의 뜻을 밝혔으니 그대로 유임시켜야 하겠지만, 부총병을 비롯해 많은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그 인사만 장악하면 이자원이 가도를 비우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대군."

이자원이 말했다.

그는 눈을 봉림대군과 마주쳤다.

"누군가 대군을 내세워 우려의 뜻을 전하게 했군요."

약관도 되지 않은 봉림대군이다.

이자원을 훈련대장에 임명한 것은 임금이 결정한 바였고, 대군 또한 형을 잘 따르니 다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스스로 찾아왔을리가 없다.

반드시 누군가 바람을 불어넣었을 터.

"······그 무슨 말인가."

봉림대군은 잡아뗐지만 영 거짓말이 서툴렀다.

이자원은 생각했다.

'대군의 근처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있는 자······.'

"대군사부이외까?"

이자원이 찌르고 들어갔다.

"······말할 수 없네."

봉림대군은 그것이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까.

훗날의 중흥군주가 되기에는 아직까지 너무나 어리고 미숙했다.

"나에게 이런 걱정을 털어놓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생각해 말하러온 것일세."

"그렇군요. 충고 감사하오이다."

이자원은 대강 대화를 마무리했다.

들을 얘기는 다 들었으니 대군에게 더 볼 일은 없었다.

'산림이 탐탁치 않아 한다······.'

뒤뜰에서 걸어나온 이자원의 시선이 마침 강석기의 방에서 나오던 예조판서 김집과 마주쳤다.

김집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아마 대놓고 갈라서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굳이 봉림대군을 통해서 자신에게 이런 말을 전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일단은 단순히 훈련대장 발탁에 대한 우려를 표한 것이라 봐야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이자원이 훈련도감을 재빨리 휘어잡아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우려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

"많이 바쁘셨사옵니까."

합근례가 끝나면 신랑신부는 곧장 신방에 드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왕자대군이며 당금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고관들이 줄줄이 발길을 이은 통에 한번씩 인사만 하고 왔는데도 벌써 밤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

이자원은 이런 사정을 줄줄이 읊는 것도 성미에 안맞고 하여, 그저 짤막하게만 대답했다.

'정말 목석(木石) 같은 사람이구나.'

유주는 일종의 감탄을 담아 생각했다.

노복들 사이에서 떠돌던 소문처럼 턱에 혹이 달리지도 않았고 -물론 헛소리임은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하여 가슴을 졸였다- 오히려 뜯어보니 조금 잘생긴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성격이 저리도 칼 같으니 어찌 데리고 살까 싶어 소녀는 잠시 막막함을 느꼈다.

"수모는 술상을 봐주시오."

이 딱딱한 분위기도 술이 들어가면 괜찮아지지 않겠는가. 정작 그녀는 오늘 말고는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보고 듣기로는 그랬다.

본래 신방에는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주안상을 내오니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옆에 있던 수모가 조촐한 술상을 들여오자 이자원은 따라줄 새도 없이 스스로 술병을 집어들었다.

"처자(妻子)가 있으셨다 들었습니다."

유주의 말에 술잔을 기울이던 이자원이 멈칫했다.

"그래, 있었지."

본신과는 그리 닮은 구석이 없는 이자원이었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었다.

본신은 돌림병으로 아내와 아이를 잃었고 자신은······.

"어떤 분이셨사옵니까? 그 분은?"

현대에도 혼인 첫날밤에 하기 무엇한 질문이다. 곁의 수모(手母)가 당황했지만 유주는 개의치않고 물었다.

그녀 또한 이것이 쉬운 질문이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꼭 알아놓고 싶었다.

"처음 서방님······과의 혼약이 들어왔을 때 소첩은 장부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스스로로 인해 말미암은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인하지 않겠다.

그리 선언했더랬다.

"혼사가 성사된 것을 보면 만족한 모양이로군."

"역적을 토벌하고 대국의 총병까지 이르셨으니 실로 장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유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얻기 위해 명나라까지 다녀온 셈인가?"

이자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이자원이 명에 갔다와야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임금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상 이 혼인을 강제로라도 이루었으리라는 것도.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으니 비밀은 없어야 하는 법이지요.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라 여겼사옵니다."

순진했다.

하기야 나이 어리고 때묻을 일 없던 대갓집 딸이 순진하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자원은 그런 소꿉장난에 어울려줄 생각 따위는 없었기에 대충 흘려버리려 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심코 자신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내게는 과분한 사람이었지."

가끔씩 후회한다.

그때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하지만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자원은 그리 말하며 술을 따르려 했다.

"마지막 순간이 편했기만 바랄 뿐이다."

유주는 이자원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소첩······이 따르겠사옵니다."

'소첩' 소리가 익숙지 않았지만 간신히 내뱉은 유주다.

이자원의 손에서 술병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금슬이 좋으셨군요."

유주가 말했다.

"다 지난 일이다."

이자원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시간이 늦었다. 이제는 잠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수모는 나가보게."

수모가 황급히 아랫목에 원앙금침(鴛鴦衾枕)을 깔아놓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보니 아직 유주는 족두리도 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 이자원의 손이 닿았다.

갑갑하던 머리가 자유로워지는 느낌과 함께, 홍촉에서 일렁이던 촛불이 훅 꺼져버렸다.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타이밍에 불이 꺼지다니, 꼭 의도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어, 엄마야."

갑자기 닥친 어둠에 허우적대던 유주를 이자원이 건져서 원앙금침 위에다 던져놓았다.

"게서 자고 있어라."

그리 말한 이자원은 어둠을 벗삼아 자작(自酌)했다.

좋은 아이였다.

사랑만 받고 자랐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시원하고 해맑은 눈동자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맞다면 분명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일 것이리라,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 위에 있는 눈썹도, 훤칠하게 긴 머리카락도 모두 칠흑같이 검었다. 눈썹은 두꺼운 편이었는데,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다.

입술은 도톰하고 붉되 앵두처럼 선홍색이다. 작은 입 속에 살짝 비치는 이는 눈처럼 새하얗다. 계란형 얼굴에 오밀조밀 붙어있는 이목구비 중 하나라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아마 보통의 남편을 만났다면 사랑을 받았을 미모다.

하지만 이자원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혼인에는 오로지 정략(政略)만이 존재하니까.

그러니 유주가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든지 간에, 그녀는 보답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예감을 느끼며 이자원은 조용히 술을 마셨다.

===

이자원은 혼례식이 치러진 당일만 쉬고 곧장 훈련도감에 등청(登廳)했다.

이 젊은 대장은 등청하자마자 파총 이상 모든 군관들을 불러모았다.

아니, 그리하라 명했다.

"중군 이하 천총들은 왜 아직 오지 않았는가? 별장은?"

이자원의 물음에 파총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중군 영감께서는 병이 나셔서 못온다 하시옵고, 천총 영감들은 각기 일이 있으시어······."

웃기는 소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마득한 부하였던 자가 상관이 되어오니, 암묵적으로 시위를 벌이는 것이리라.

"박 파총."

"예, 대장 영감."

호란과 가도 토벌의 군공을 모두 셈하여 드디어 파총에 오른 박철균이 답했다.

"중군에게 가서 일러라. 전(前) 도원수 심 대감의 집에 드나들 때는 병이 나지 않았느냐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박철균은 망설이지 않고 훈련도감을 빠져나갔다.

중군이 훈련대장으로 온다는 심기원에게 잘 보이고자 상중(喪中)임에도 그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든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자원은 그것을 가지고 을러댄 것이다.

"또한 전쟁 당시 전하를 호종했던 군사들을 대상으로 무과(武科)가 있을 예정이다. 이를 감안해 공적과 근태(勤怠)를 살펴서 대대적으로 인사를 단행할 것이니 이 자리에 없는 천총들에게도 명심하라 이르도록."

이자원은 모여있는 파총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파총들의 얼굴이 변했다.

그들이라고 까마득한 후배가 득세하는 것이 반갑겠냐만은, 무과가 실시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급제한다고 곧장 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저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초관들이 대거 뽑혀 들어오면 기존 군관들도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초관은 종사관으로, 종사관은 파총으로, 파총은 다른 곳으로 밀려나거나······ 아니면 상관인 천총의 자리에 앉거나.

지금 비어있는 천총들의 자리를 쳐다보며 파총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은?"

"알겠습니다, 대장 영감!"

큰 소리로 대답하는 파총들을 바라보며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도감은 가장 지원을 많이 받는 정예부대이다. 어디 고을 수령으로 내려갈 것이 아닌 이상 여기서 떠나고 싶은 자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중군, 천총들은 되었고······ 황 별장은 무슨 이유로 등청하지 않았는가?"

이자원의 말에 서로 눈을 굴리더니 대답한다.

"저, 별장 영감은 등청은 하였습니다만은······."

"그런데 왜 이 자리에 없단 말인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았다.

이자원은 말했다.

"당장 붙잡아 오라."

작가의말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 호종군을 대상으로 무과가 3차례 실시됐는데, 여기서 합격한 이들을 국출신(局出身)이라고 부릅니다. 급제를 했는데도 편오에 예속된 것을 억울하게 여겨 상소하는 일이 있었기에 7국으로 나눠서 별장의 통솔 아래 영숙문 쪽에서 근무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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