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7화 (47/213)

< 정략 (1) - 여기서부터 유료 시작입니다. >

"이 나라 제일의 공신이 돌아왔구나."

가망없어 보이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자.

또한 심세괴의 역모마저 제압한 자.

그리고, 자신의 비원을 이루어줄 자.

"전하의 지극한 성덕(聖德)에 힘입었을 뿐이옵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이자원은 겸양하는 말을 꺼냈지만 그것이 단순한 인사치레임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임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자원의 공은 고금을 살펴봐도 드문 것이니, 고루한 인사에 얽매여 품계를 조정하고 관직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군국의 일에 있어 이자원보다 잘 아는 자가 많지 않으니, 다소 상규(常規)에 어긋나더라도 관철할 수 밖에 없으리라."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 것일까.

신료들이 임금의 입에 주목할 때였다.

"이자원을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제수하노라."

훈련대장!

분명 신경진이 좌의정으로 승차하며 공석이 되긴 했지만, 거기에 이자원을 앉히겠다니.

초관에서 파총이 된 것도 유례없는 일인데, 파총에서 다시 대장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나라 조선에서 가장 정예하고 규모가 큰 훈련도감의 대장이었다. 단순한 종2품 관직이 아니란 말이다.

"하, 하오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하들이 반대를 표할 새도 없이 이자원이 태연하게 어명을 받들었다.

"좌승지는 교지를 가지고 오라."

임금은 다른 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이자원을 훈련대장에 명한다는 관교(官敎)를 내렸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碎骨粉身), 죽기로 노력하여 전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그가 병자호란의 한복판에서 깨어나 홍타이지를 죽인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일이었다.

===

"신료들이 그대를 두고 무슨 관직들을 거론한줄 아는가?

"천조로부터 가도 총병 자리를 받았으니, 청북방어사 정도가 아니겠사옵니까."

이자원은 임금의 물음에 답했다.

좌승지 박로가 동석한 자리였지만 임금의 심복답게 두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바로 보았다."

임금이 말했다.

"또는 허완(許完)이 물러나 빈 경상우병사나 다른 지방관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 했었지."

"훈련도감은 생각지도 않은 모양이옵니다."

하지만 임금은 이자원이 앉은 가도 총병이라는 자리도 고려치 않고 훈련대장에 임명했다.

'주상에게 가도 따위를 흥성케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가 원하는 것은 조선 전체를 강국강군(强國强軍)으로 만드는 것이다.

오히려 이 일로 이자원을 명에 뺏기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했을 터.

"가도 총병이라. 대단한 자리를 받아왔구나."

이자원의 예상처럼, 임금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냐는 은근한 추궁에 가까웠다.

"설마 그대는 가도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자원이 임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신 또한 전하와 같은 뜻이거늘, 어찌 가도에 발을 묶어놓길 바라겠사옵니까. 다만 천자의 명을 받든 것은 가도를 장악하는 것이 조선의 국익과 부합하기 때문이옵니다."

임금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비단 동강진의 폐단을 잘라내는 것 뿐만 아니라, 가도를 쥠으로써 어떤 이득을 가져올 수 있을지 말이다.

"신에게 훈련대장의 대임을 맡기신 것도, 신이 그것을 받든 것도 오로지 하나의 이유 때문 아니겠사옵니까."

북벌.

단순히 북방군만 키울 셈이라면 이자원이 서북에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이자원도 임금도 조선의 체질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북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을 위해서 이자원은 도성에 있어야 했다.

"나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북벌의 중심축으로 삼으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앙군인 오군영(五軍營) 중에서 금위영(禁衛營)은 아직 창설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전적으로 그 목적이 도성 인근 방어에 치중되어 있는 총융청과 수어청을 제외하고 나면, 남은 곳은 훈련도감과 어영청 뿐이다.

"그렇기에 봉림대군을 어영청 도제조에 앉혔다."

그때 반발이 심했기에 옥사를 일으키고자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이자원을 훈련대장에 임명하는데도 끝없는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신료들의 반대는 무마했지만, 일개 초관에 불과했던 그대가 대장이 되어버렸으니 훈련도감 내에서도 반발이 심할 것이다."

"걱정 마시옵소서."

임금은 스스로 임명해놓고도 그리 염려했지만, 장본인인 이자원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신이 능히 처리할 수 있사옵니다."

단지 언제나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자원의 당당한 태도에 임금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자에게 근심이 되는 일이란 있기나 한 것일까.'

하기야 청군도 심세괴도 당해내지 못한 인간이 아닌가.

구태여 그것을 캐묻는 대신, 임금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국구가 찾아왔더군. 대국과의 일이 완전히 처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총병 벼슬까지 얻어 돌아왔으니 혼인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던가."

임금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우리는 동서지간이로군."

"황공하옵니다."

피와 피로 맺어진 동맹.

임금이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신뢰의 증표.

이자원이 요구했던 것이 드디어 주어진 셈이었다.

===

명나라 품계상 총병은 기본적으로 무품(無品)이나, 보통 공후(公侯)나 정1품 도독이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이미 가도총병에 오른 이자원의 품계가 몇 계단씩 건너뛴 것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관직이 올라 종2품 훈련대장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탐탁치 않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 어미는 이 대장이란 사람에게 너를 보내려니 아직까지도 마음이 좋지 않구나."

친정 어머니 신씨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원래 사윗감으로 보아두었던 이홍상, 그 아이는 명문 반가의 자손으로 행동거지도 바르고 안사람도 지극히 아껴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 혼사는 끝장이 났고, 이제는 흉흉한 소문이 감도는 얼자 출신 무반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바깥양반은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사를 재촉해댄 끝에 어느새 이 날이 되고야 만 것이다.

납채(納采)든 납폐(納幣)든 어떻게 진행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판이었다.

족두리를 쓴 유주는 이런 어머니의 한탄에 굳이 대꾸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조실부모한데다 본가와는 왕래도 않고, 적모는 기력이 없다며 한번 나와보지도 않았다지? 세상에 이런 혼사가 어디 있겠느냐?"

"어머님, 이제는 제가 섬겨야할 분입니다. 시댁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모실 뿐이니 더는 흉을 보지 말아주세요."

"내가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느냐."

신씨가 투덜댈 때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함 사시오!"

함진아비들이 몰려온 것이다.

뜸들이는 함진아비들을 구슬린다, 대청마루 위에다 함에 든 봉채떡을 꺼내놓는다 뭐다 하며 바깥이 분주했다.

"초례(醮禮) 치르러 오는 모양이군."

이 집의 주인, 우의정 강석기가 나지막이 뱉는 말도 들려왔다.

"훈련대장 영감이시오! 다들 물러나시오!"

한편 후행(後行)을 맡은 박철균은 강씨댁 마나님과 다르게 신나 있었다.

상관이 무려 우의정 대감의 사위로 들어가는 길이 아닌가.

"저분이 신임 훈련대장이시구만······."

"공적만 놓고 보면 이상할 것이야 없지."

"저렇게 젊은 나이에 대장이 되어야 새장가도 우의정댁 같은 곳에 드는군."

"아이고, 장군님 오랑캐들을 물리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괜히 박철균의 어깨도 올라갔다.

그러나 장가드는 새신랑의 얼굴은 늘 그렇듯 변화가 없었다.

박철균에게는 아쉽게도 신부집까지는 금방 다다랐다.

이미 우의정 강석기의 집은 빈객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했다.

졸곡이 끝난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 국상을 당한지 1년도 되지 않았기에 최대한 잔치 분위기를 내지 말자 일러두었는데도 사람이 모이자 시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아, 아니오이다. 이렇게 우의정 대감을 만나뵙게 되니 소인 영광이올시다."

신랑측 상객(上客)을 맡은 사람은 양주에서 올라왔다는 당숙(堂叔)이었는데, 천상 시골 선비라 재상이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황송함을 금치 못했다.

"자, 이리로 들어가세."

방 앞에는 신부의 어머니인 신씨가 앉아있었다.

이자원은 기럭아비로부터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받아 그녀에게 건네주고 두 번 절을 하니, 신씨는 그것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

이것이 전안례(奠雁禮)였다.

전안례가 끝나자 상견을 하기 위해 신부가 나왔다.

좌중의 시선 또한 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에게로 쏠렸다.

이렇게 많은 시선을 받은 것은 처음인듯, 유주가 얼굴을 붉혔다.

마당에 쳐진 병풍 앞에 송죽화병과 백미(白米), 닭 한 쌍이 올라간 초례상이 놓였다.

이자원과 유주는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너무했군.'

처음으로 신부를 본 이자원의 감상은 그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제 혼인을 위해 마주 서니 이 소녀(少女)와 결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던 것이다.

17세.

전생의 도덕관념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 혼인은 정략이다.

필요하다면 그게 무엇이든 할 뿐이다.

유주는 긴장한 얼굴로 수모(手母)의 도움을 받아 신랑에게 두 번 절을 하고, 이자원은 답례로써 한 번 절했다.

이것이 다시 한 차례 반복되고 나서, 두 사람은 술잔과 표주박에 담긴 술을 나눴다.

합근례라고 하는 의식인데, 혼인의 마지막 절차이다.

이것으로 이자원은 정식으로 강석기의 삼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임금의 동서, 우의정의 사위.

그리고 훈련대장.

이처럼 기세 등등한 자는 근래에 없었으니, 혼례를 축하한답시고 찾아온 이들도 여럿이었다.

"축하하네, 대장에 오르고 나서 바로 혼례까지 치르니 보기 드문 겹경사가 아닌가."

공서의 영수가 청서 영수의 잔칫날 친히 찾아오는 것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으나, 신경진은 지난 전쟁에서 이자원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훈련도감으로 통해 엮인 인연도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상 대감께서 불민한 사위를 이토록 따뜻하게 맞아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오이다. 좌상 대감께서도 부디 편히 즐기다 가시지요."

"어허, 불민하다니. 자네처럼 헌앙하고 출세한 사위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도 시집 안간 딸이 있었으면 사위로 맞아도 좋았을 것이라며 농을 던지는 신경진이었다.

이번 혼삿날 찾아온 이는 신경진 뿐만이 아니었다.

청서로는 이조판서 정온, 이조참판 이식 같은 이도 있고 또 예조판서 김집도 찾았다. 당상의 고관들이긴 했으나 영수 집안의 혼사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사람만큼은 이자원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거덜들이 치는 소리가 들리며, 이윽고 한 공자(公子)가 대문간을 넘어 들어왔다.

이자원 또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그와는 또 달랐다.

"보, 봉림대군 대감!"

누군가 지른 소리에 이자원은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봉림대군 이호.

원래 역사에서는 효종이라 불렸을 인물.

이자원이 그의 얼굴을 보고 기시감이 든 것은 역시 형인 주상을 닮았기 때문이리라.

"대군 대감을 뵙사오이다."

"만나는 것은 처음이로군, 훈련대장."

임금은 이 동생과 우애가 좋아 자주 일을 논의한다고 들었다.

'보아하니 단순히 혼인을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니군.'

그렇다면 무슨 일로 온 것일까.

이자원의 눈이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