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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4화 (44/213)

〈 44화 〉 어랑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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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오?"

마병별장 황익의 태도는 곱지 않았다.

이자원이 아무리 공신이라 하나 엄연히 조선의 품계로 따지면 자신의 아래이거늘, 파총이 오라가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원수도 이자원에게 협조하는 판에 황익 정도가 나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이리 와서 앉게."

유림의 말에 황익은 마지 못해 자리에 걸터앉았다.

"이미 군의는 끝났고, 우리 마병들은 맡은 임무도 없으니 파총 나리께서 부르신 이유를 모르겠구려."

황익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맡길 소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이자원은 반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이오?"

"지금부터 마병은 부서(扶西)로 이동하시오."

"허, 부서라니."

뜬금없는 지명에 황익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자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어랑산(於郞山)으로 가서 적을 막을 것이오."

"어랑산에 무슨 적이 있단 말이오?"

황익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평성(平城)에서 근무해보아 서북의 지리를 대충이나마 아는 그였다. 부서는 철산 서쪽에 설치된 면이고, 어랑산은 부서 남부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서든 어랑산이든 가도군은 코빼기도 구경을 못할 것이 뻔했다.

'이자원 이놈, 명장이니 맹장이니 하더니 사실은 지도도 볼줄 모르는 놈 아닌가?'

황익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자신은 전쟁 당시 통영에 있어 직접 이자원의 활약을 보진 못했지만 이제 보니 그 명성이란 것도 다 허명(虛名)에 가깝다 싶었다.

"어랑산은 용사포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데, 그곳에서 어떻게 적을 깨뜨린다는 말이오?"

"적은 북쪽에서 몰려올테니까."

이자원이 딱 잘라 말했다.

"청군을 말하는겐가? 부원수의 말로는 압록강 너머에 청군들이 일부 모여있긴 하지만 배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유림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자원도 의주에서 임경업을 만났을 때 들은 얘기였다. 그렇기에 이자원은 확신했다.

"청군은 반드시 압록강을 건널 것이오이다."

청군은 무조건 넘어온다.

원래 역사의 강화도 함락 당시에도 조선은 청군의 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염하(鹽河)를 건널 수 없으리라 낙관했다.

하지만 만주족은 강을 건너는데 전통적으로 유산선(踰山船)이라는, 뗏목에 가까운 소형 배를 사용했다. 후방에서 재료를 가져온 청군은 즉각 유산선을 제작해 도하에 나섰고, 이를 알지 못했던 조선은 상륙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하루 아침에도 수십 척을 만들어 병력을 옮길 수 있으니, 이제까지 배도 없이 미적거리고 있던 것은 조선군을 방심시키기 위한 책략임이 분명했다..

"청이 심세괴를 구원하는데 성공하면 그간의 우환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뒤통수도 간지럽힐 수 있사오이다. 청군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하나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걸어볼 만한 수이지요.

청군이 강 너머에 모여 있는 것은 분명 이를 위함이니, 대비하지 않는다면 가도에 정신이 팔려있다 뒤에서 적습을 받게 될 것이오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부원수에게 이를 알려야 하지 않는가?"

유림이 당황해서 물었다.

"이미 부원수와 만났을 때 이런 사실을 주지시켰사오이다."

"허면······."

청군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고 유림이 말하려 할 때 이자원이 선수를 쳤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굳이 도강을 막을 필요는 없사오이다."

북벌을 위해서는 청군의 숫자를 하나라도 더 줄여야 한다.

알아서 조선으로 기어들어오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깊숙이 끌어들여 섬멸(殲滅)할 뿐이다.

"도원수 영감! 지금 저 말을 믿겠다는 것이오이까!"

황익의 외침에 이자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황 별장."

이자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장(主將)의 군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인가?"

서늘한 그의 말투에 황익은 움찔했다.

"아니,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

경력으로 따지면 황익이 이자원보다 두 배는 앞서고 나이도 많다.

그러나 황익이 이자원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황명을 받든 인물이어서가 아니었다.

'눈빛이 뭐가 저리 사나운가!'

저런 것이 관상쟁이들이 말하는 호안(虎眼)이 아닐까 싶은 황익이다.

나이 어린에게 기세에서 밀린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황익으로서는 그저 군령을 받들 수 밖에 없었다.

황익이 깨갱하며 물러나자 이자원은 유림 쪽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도원수께서 맡아주시길 부탁드리겠사오이다."

청군과 함께 진행했던 원래 가도 공략에서 조선군을 이끈 이가 유림이었으니, 딱히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걱정 마시게. 자네가 오랑캐를 깨뜨릴 때 쯤, 역도들도 무난히 평정될 것이니."

유림 또한 선선히 말했다.

===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넌 정홍기는 곧장 철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의주군은 이런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묘년 당시 후금군을 괴롭혔던 용골산성에도 사람은 없었다.

의주군이 그들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조선군은 무방비하게 그들의 공격에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용사포에 닿을 것입니다."

길잡이 역할을 맡은 부하 하나가 말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조선어였다.

"만주어가 익숙지 않은 모양이구나."

"소, 송구합니다."

하기야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늘지 않을만도 했다.

길잡이가 속한 부대는 정홍기 만주 제13령의 제14니루.

조선인으로 구성된 소위 솔호 니루로, 행정 단위 그 자체이기도 한 팔기의 특성상 같은 조선인끼리만 부대끼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인 잘란 어전 한윤(韓潤)에게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너는 더는 조선인이 아니라 대청(大淸)의 신민이다. 아직까지 그정도 말을 만주어로 하지 못하는게 말이 되느냐?"

그러면서 한윤은 마편(馬鞭)으로 길잡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채찍이 지나간 자리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저런 놈 때문에 내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길잡이는 얼굴을 움켜잡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져 먼 산에 닿았다.

수려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보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산천(山川)이었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는 한윤의 표정은 악에 받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한명련(韓明璉)이 죽고 도망할 때 이후로 이런 표정을 본 일이 없던 종제(從弟) 한택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야 대청에 귀부한지 10년이 넘었는데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모르겠느냐? 이미 조정에서 우리를 보는 눈이 곱지가 않다."

청에서도 나름 출세를 하여, 이 나라에서 직위로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은 쉰 명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윤은 지금같은 혼란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모시던 이괄(李适)만 해도 벼슬이 부원수에 이르렀으나 하루아침에 역적의 아비가 되어버린 탓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살아남고자 하면 조선놈들을 무찌르고 충심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에게서도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야."

더 이상 돌아갈 곳 따위는 없다.

"소기주께서 그래도 우리를 믿고 종군케 하셨으니 다행이지요."

다이샨은 조선에서 돌아온 후 쇼토를 소기주(小旗主)로 삼아 정홍기와 양홍기의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는 칩거에 들어갔으니 사실상 쇼토가 전권을 쥔 셈이었다. 한택의 말은 그 줄이라도 잡아서 다행이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전방에 조선 놈들이 보입니다!"

"뭐라?"

그때 들어온 보고에 한윤은 당황했다.

"조선 놈들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이냐?"

청군의 진격을 미리 눈치채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 진을 치고 있을 수 없다.

조선군은 이를 예상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철산까지 다다라 전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기주께서 전투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역시나 쇼토로부터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법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들을 뚫고 나가 공을 세워야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 버림받지 않는다.'

"솔호 니루! 조선놈들을 쓸어버리자! 너희의 고향은 대청이다!"

한윤이 칼을 빼어들고 외쳤다.

사촌동생 한택의 눈에도, 솔호 니루의 눈에도 결의가 가득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라 대청의 솔호 니루였기에.

쇼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솔호 니루는 망설임없이 조선군 진채로 돌격했다.

===

어랑산에 세워진 조선군의 진채.

"파총 나리, 청군이 접근 중이오이다!"

박철균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말했다.

"걸려들었군."

이자원이 칼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천지검(天地劍)을 손질하고 계셨소이까?"

"천지검이라니?"

박철균의 말에 이자원이 물었다.

"신책구천문묘산궁지리검을 줄여 천문지리검(天文地理劍), 다시 줄여서 천지검이지요."

"······."

이자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이미 전투 준비로 분주했다.

포수(砲手)는 화약과 총탄을 장전하고, 사수(射手)는 활에 화살을 재었다.

"기병이군."

청군을 본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도강을 해야 하니 기병은 어렵지 않나 싶었지만, 의외로 적지 않은 숫자가 건너온 모양이었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쏘아서는 안된다!"

이자원이 외쳤다.

쌍령에서 사격통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는 달리, 훈련도감 병력들은 적어도 패닉에 빠져 난사를 벌일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다들 침착하게 조준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의 원수를 갚으러 왔노라!"

"조선놈들은 목을 내놓아라!"

돌격해오던 청군 기병들이 진채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 휘이익!

슈슉거리는 파공음이 들리며, 청군이 쏘아낸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

그러나 목책 뒤에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던 조선군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청군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모양인지, 활을 쏘자마자 곧바로 근병기(近兵器)로 바꾸어들고 달려왔다.

청군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올 때, 이자원이 명령했다.

"방포하라!"

- 투다다당!

둔탁한 발포음과 함께 코를 찌르는 초연의 냄새가 퍼졌다.

"으아악!"

"제기랄!"

진채로부터 단 10보를 남겨놓고 일제사격을 받은 청군 기병들은 그대로 낙마해 쓰러졌다.

워낙 근거리에서 발포했기에 그대로 즉사해버린 자가 많았지만, 차라리 본인들에게는 그게 행운이리라.

운이 없어 미처 죽지 못한 청군들은 날뛰는 제 말에 밟혀 죽거나, 그도 아니면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아군에 의해 치여 으스러졌다.

"더러운 고려봉자(高麗棒子) 놈들아!"

뒤따라온 청군들은 보병이었다.

포수와 사수들이 물러나고, 살수들이 목책에 달라붙은 청군들을 창으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한 두명이 목책을 기어올라 조선군 사이에 떨어졌지만, 소도(小刀)를 꺼내든 조선군의 손에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죽여라, 죽여라!"

"아직 남은 오랑캐가 많거늘 뭐하는 짓들이냐! 너희 위치를 지켜라!"

흥분에 찬 조선군들이 이미 죽어버린 시체에 추가적으로 칼질을 하려 들자 이자원은 그것을 제지했다.

확인사살도 아니고, 시체 훼손을 벌이는데 쓸 시간 따위는 없었다.

살수들은 열심히 목책 사이로 창을 쑤셔넣어 청군을 찔러댔지만 간혹 들어오는 칼질에 부상을 입거나 쓰러졌다.

그때마다 이자원은 틈이 생기지 않도록 박철균을 통해 살수들을 채워넣어야 했다.

"적군이 물러간다!"

수 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진채는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청군은 별 수 없이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시체를 수습하고 살아남은 놈들을 찾아내 참하라."

널브러진 청군들 중에서도 용케 숨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자원의 명을 받은 조선군이 시체를 한번씩 찌르고 다닐 때였다.

"무, 물······."

어디선가 튀어나온 조선말에 시선이 쏠렸다.

"잠깐."

이자원이 목소리를 낸 청군을 찌르려던 병사를 제지했다.

"조선말······?"

이자원은 현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 때 넘어간 조선인들이 독자 부대를 형성했다던가.

"이번에는 조선인들도 종군한 것인가."

조선인 부대가 넘어왔다면, 그 지휘관은 정묘호란 때도 종군한 한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사실을 이용할 수 있을까.

이자원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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