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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3화 (43/213)

〈 43화 〉 전야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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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산군 관아.

한동안 의주에 머무르던 이자원과 명군은 유림의 안주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맞춰 철산으로 내려왔다.

임경업의 서찰을 받은 철산군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관아 한켠을 내어주어 이자원은 그곳에서 며칠간 지내는 중이다.

장지문 안에서 흔들리는 호롱불을 곁눈질하며 사내는 말없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관아의 포졸이 바깥에서 번을 서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굳게 닫힌 그의 입과는 달리 머릿속에선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조선말이 능숙하군.'

'기대하마.'

이자원이 그에게 건넨 말은 아무리 뜯어봐도 같은 조선인에게 할 말이 아니다.

'의외로 쉽게 들켜버린건가.'

금의위에 나섰으니 적당히 신분을 위조하는 것은 쉬웠다.

한바탕 연극을 벌여 책봉주청사에 접근하는 것도, 대상과 합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를 속여넘기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직까지 달고 다니는 이유는 무얼까.

"이 장군은 계신가?"

생각에 잠겨있던 사내, 적비에게 오삼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장 대인."

적비가 공손히 말했다.

스스로도 만족스러울만큼 조선 억양이 섞인 한어가 튀어나온다.

누가 보더라도 장성하여 한어를 배운 사람의 억양이었다.

"아, 그 조선인 무사로군."

역시나 오삼계도 자신이 한인(漢人)이란 사실을 눈치채진 못했다.

"이 장군과 군략을 논의하기 위해 왔네."

"안에 계십니다."

적비가 이자원에게 그것을 고하자, 곧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오삼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지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만, 통변이 필요하겠군. 자네도 들어오게."

오삼계가 적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장군."

오삼계가 들어오자 이자원이 시선을 슬쩍 들어올렸다.

"참장 대인께서 무슨 일이시오?"

"곧 조선군이 이곳으로 온다고 들었습니다."

오삼계가 말했다.

"그렇소."

훈련도감 병력은 유림의 안주군에 합세했고, 그 병력은 이미 청강을 넘어 철산 경내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그들과 합류하여 가도와 마주보고 있는 용사포(龍沙浦)로 내려갈 생각이오."

이자원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도는 지세가 험하다 들었는데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오삼계가 이자원의 손이 가리키는 지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자원은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해안가에 포대를 굳게 쌓아두었으니 정면으로 공략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오."

"그렇다면······."

오삼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소장과 천병이 300명. 지금 넘어오고 있다는 조선군이 합쳐서 5천 명이라 들었습니다. 가도 난군(亂軍)의 수가 그를 웃도니 기책(奇策)을 내지 않는다면 가도를 함락하기 난망할 것입니다."

오삼계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어디 한번 너의 역량을 재어보겠다는 듯한 투였다.

"기책이라."

이자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놓은 바는 있소."

망설임없이 말하는 이자원의 얼굴에 적비와 오삼계의 시선이 꽂혔다.

그러나 이자원은 이 계책이 먹힐거란 확신이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으니까.

===

철산에 진입한 유림은 곧장 이자원을 찾았다.

숭정제는 이자원으로 하여금 가도를 치라고 명했으니, 지휘권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국의 도원수가 파총에게 지휘를 받게 되는 경우도 다 있군."

"송구하오이다."

유림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못내 불편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그 불만이 항명에까지 이르지 않은 것은 유림이 이자원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되었네. 지금 자네의 신분은 조선국 파총보다 천조의 장수에 가까운 모양이니."

유림은 그렇게 일축했다.

'일이 쉽게 되겠군.'

이자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려 황명을 등에 업은 데다 도원수가 협력하는 자세로 나왔으니 더이상 이자원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연 이자원이 둘러보자 다들 불편한 기색은 있을지언정 감히 행동에 옮길만한 자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표는 역적 심세괴를 축출하고 다시 동강진을 천조의 품에 되돌리는 것이오."

이자원은 그렇다고 명나라만 좋은 일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명분은 그랬다.

"따라서 전군의 역량은 오로지 본도(本島)인 가도를 함락하는데 집중해야 하오."

편의상 가도라 칭하기는 하지만 명군의 통치 하에는 가도 뿐 아니라 평안도 해안가에 펼쳐진 섬들 몇 개가 더 놓여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석성도(石城島)와 같은 섬이다.

"역적의 머리를 치고 나면 자연히 다른 섬들은 역란(逆亂)할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오. 이번 전쟁의 목적이 동강진을 뿌리뽑는 것이 아닌만큼, 제장들은 이를 명심하여 주기를 바라오."

이자원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으니 배석한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를 정직하게 공격해들어가는 것은 여러모로 피해가 클 것이오. 역도들은 사기가 낮고 정예하지 않은 무리들이나 바다를 끼고 화포를 쏘아대면 쉽게 섬에 발을 디디지 못할 터."

"하지만 후방 해안가는 방비가 허술하지."

유림의 중얼거림에 이자원이 답했다.

"도원수 영감께서 바로 보셨소이다."

다음 순간, 이자원이 쥐고 있던 등채의 끝이 가도의 남쪽 부분에 꽂혔다.

"본관은 정예한 이를 뽑아 가도의 뒤를 칠 것이오."

등채가 지도 위쪽을 한번 쓸자, 가도군의 패(牌)가 우수수 튕겨나갔다.

"그리되면 적들은 저절로 무너지겠지."

심세괴의 주의는 용사포와 마주보는 가도 북부에 쏠려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동강진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이미 가도군의 실상을 두 눈으로 보고 겪어본 이자원이다.

그 상황이 되면 가도군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했다.

"토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데, 누가 맡겠는가?"

유림이 장수들을 훑어보며 말하자 한 사람이 나섰다.

"소장에게 맡겨주십시오."

오삼계가 깍듯이 포권하며 말했다.

통역을 거치고 나자 유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대는 총병의 아드님이니 직접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것은 안될 말이오."

자칫 일이 잘못되면 오양으로부터 무슨 비난을 들을지 모르는 유림으로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오삼계는 다시 한번 청했다.

"소장은 총병이신 아버님의 밑에 있을 때도 전봉(前鋒)을 맡았습니다.

오랑캐와 싸울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장서서 싸웠으니, 스스로의 용맹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는 이자원을 힐끗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미 청천강에서 가도군의 군기가 빠졌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므로, 상륙만 성공한다면 가도의 토벌은 반쯤 완료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략이야 네가 수립하겠지만, 대공(大功)을 세우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상관없소. 참장이 이끌고 온 병력들은 확실히 정병(精兵)이니, 심세괴를 반드시 깨뜨릴 수 있겠지."

반면 이자원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소장의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군."

오삼계는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지만, 그 속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가도군이 허약하다지만 3백 명으로 되겠소? 더 나설 자는 없는가?"

유림의 외침에 이자원이 말했다.

"가도군은 이미 타격을 많이 입은데다 조선군이 적의 주의를 끌기 위해 움직일 것이니 그만하면 충분할 것이오이다."

그러다 동강진이 허를 찔려 혼란스러워지면 조선군 본대가 지원 상륙을 감행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림은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군은 여유가 남을 것인데 조금 안전하게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 이쯤해서 군의를 종료하도록 하겠소."

유림의 생각은 이자원의 말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아직도 미심쩍음을 떨치지 못한 유림이었으나, 주장(主將)인 이자원이 그렇게 선언하자 대놓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최소한 그가 저번 전투에서 본 이자원은 그랬다.

===

"파, 파총 나리!"

이자원은 막사를 나서자마자 서성이고 있던 박철균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숫제 눈물까지 치솟는 박철균이었다.

"소관도 명나라로 데려가주셨어야지요!"

다 큰 어른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광경은 보기가 흉했다.

"무관의 인선은 정사 영감의 소관이거늘 어찌 내가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 체통을 지켜라."

이자원의 냉랭한 말에도 박철균은 그간 쌓인 울분이 치솟는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파총 나리, 소관이 요즘 훈련도감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어떤 심정을 느끼는지 아시오이까?"

"관심없다."

이자원은 딱 잘라 말했다.

"훈련도감에서 마병을 파견했다고 들었다. 마병별장을 불러와라."

"마, 마병별장을요?"

그렇지 않아도 그와 악연이 진득히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던 박철균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상관의 성격을 아는 박철균이 주저하면서도 발을 떼려할 때, 그는 이자원의 곁에 못보던 무사가 하나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총 나리, 이 자는······?"

"북경에서 거둔 자다. 본래 조선 사람이라 '하더군'."

이자원의 말이 끝나자 적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적비라 하오. 성은 없소."

"허."

박철균은 적비를 노려보았다.

성도 없는 것을 보니 어찌하다 중국으로 넘어간 천민일 공산이 높아 보였다.

자신의 집안은 비록 진사를 지낸 조부 이래로 딱히 문리(文理)가 트이지 않았다 하나 그래도 뼈대 있는 충주 박씨의 자손이거늘, 성도 없고 근본도 알 수 없는 자가 하오체를 쓰고 있으니 배알이 뒤틀리는 것이다.

그가 자신보다 열 살 가량 많아 뵈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별장을 불러오고 난 뒤에는 적비에게 말 한 필을 내어주어라."

"예?"

이자원의 눈이 박철균을 향하자 그는 그제서야 꼬리를 내렸다.

"아, 알겠사오이다."

그의 상관이 행하는 일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자신에게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따라야 하는 것이다.

===

"청으로부터는 아직 답이 없는가?"

심세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요즘 들어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의 물음에 부총병 백등용(白登庸)은 진땀을 흘렸다.

'하기야 역모를 도모하고도 태연할 수야 있겠느냐만은······.'

"마부대(馬福大)가 적극적으로 설득해보겠다 하였으니 조만간 답이 올 것입니다."

백등용은 그렇게 심세괴를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 또한 용렬(庸劣)한 사람으로 패전의 처벌이 두려워 심세괴의 역모에 끼게 되었으나 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벌써 조선군은 철산까지 다다랐는데 도대체 언제 온다는 말인가? 조선의 서북을 진동시키겠다 허풍도 떨어봤고, 가도의 물자를 내어주겠다 꾀어도 보았다. 오랑캐가 내게 바랄만한 것은 다 해주겠다 했으니 저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실로 천명을 다툴 자격도 없는 무리들이라 할 것이다."

심세괴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청의 물자가 모자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그것이 욕심나서라도 오랑캐는 군사를 낼 것입니다."

들어보니 청은 어린 황제 아래서 종친 여럿이 군사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하니 그 중 하나쯤은 욕심 때문에 원군을 보내지 않겠는가?

백등용은 그렇게 심세괴를 위안했다.

속으로는 그도 마찬가지로 불안함을 멈출 수 없었지만 말이다.

"총병 대인! 오랑캐로부터 답이 왔습니다!"

그때 유사(儒士) 하나가 뛰어들어와 말했다.

김문재(金文載)라 하는 한인(漢人)으로 심세괴가 서리 노릇을 시키고 있던 자였다.

그가 내민 서찰을 급히 뜯어보니 무슨 패자(貝子) 석탁(碩託, 아이신기오로 쇼토)이라는 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심세괴도 잘 알지 못하니 집어치우고, 그는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미 우리 군이 압록강을 넘었으니 곧 조선군을 격파하고 가도를 구할 것이다. 총병은 약속한 물자를 준비해놓도록 하라.」

쇼토가 이끄는 정홍기(正紅旗) 병력이 출진한 것이다.

가도 군영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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