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전야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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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은 여전히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를 맡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안국공신 2등에 녹훈되었기에 자연히 벼슬도 오르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으나, 변경의 방비를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임경업이 이제는 부원수(副元帥) 직함도 함께 달고 있다는 것.
전쟁 후 김자점이 병조판서가 되어 조정에 들어가면서 평안병사 유림이 도원수에 임명되었는데, 아울러 임경업이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하여 부원수가 된 것이다.
"부원수 영감을 뵈오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별다를 바 없는 태도로 임경업을 대했다.
"크흠, 자네 때문에 조정이 한때 아주 발칵 뒤집혔었네! 사행길에 천병을 죽이다니, 깜짝 놀랐지 않은가!"
임경업은 짐짓 헛기침을 하더니 그렇게 외쳤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사오이다."
이자원이 설명을 하려던 차, 임경업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되었네. 이미 책봉주청사의 장계가 도성에 닿았으니 사정은 대강 알고 있네."
그 장계를 받아든 임금이 심세괴와 내통한 자들을 모두 색출하겠다며 옥사를 벌인지도 한 달 여. 이곳 의주가 아무리 나라 끝 변방이라 해도 임경업 쯤 되는 이가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할리는 없었다.
자연 이자원을 대하는 태도도 죄인을 대하는 투는 아니었다.
누구 눈 밖에 나려고 그런단 말인가.
"헌데 우리 배가 아니라 대국 배를 타고 오다니. 책봉주청사 대감과 일행들은 어디 계신가?"
임경업의 물음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부원수 영감."
"아니, 자네는 독보가 아닌가?"
임경업은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오자 놀라서 말했다.
독보가 심세괴의 역모를 고변하고 책봉주청사 일행을 따라나섰다 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다른 사람은 없는데 그만 이자원을 따라 돌아온 것은 어찌된 일인가.
"책봉주청사와 동지사, 그리고 책봉을 위해 명나라에서 보낼 칙사는 해로가 안정된 뒤에 넘어오기로 하였고, 우선 소관이 가도를 토벌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돌아왔사오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또한 소승은 심세괴의 막하에 있으면서 그 지리를 잘 아니 장군께서 가도를 공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왔나이다."
그러면서 이자원이 숭정제의 칙서를 내밀자 임경업은 황급히 부복(俯伏)했다가 사배(四拜)하고 그것을 받드니, 총병 오양에게 보내진 것과 같이 서북을 관장하는 조선의 장수에게 협조를 명하는 내용이었다.
"······가도 총병이라. 내가 천조의 장수를 몰라뵙고 실례를 했군."
임경업이 놀란 표정으로 이자원을 보며 말했다.
"아직 총병이 된 것은 아니오이다. 어디까지나 조선이 가도를 토벌하면 소관을 총병에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
"그래도······."
임경업이 생각도 못했다는 듯 이자원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사실을 전하께 전달하고 군략을 논의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오이다."
그 사실에 너무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뜻이었다.
곧 파발이 숭정제가 조선왕에게 따로이 보내는 칙서를 가지고 떠났다.
본래 임금 쯤 되는 사람에게 보내는 칙서란 황제로부터 임명받은 칙사가 직접 지니고 움직여야 하나, 지금은 전시나 다름없는데다가 그 내용 또한 군령(軍令)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보통의 칙서라 보기에도 무엇했다.
"이미 심세괴의 역모를 전하께 아뢰었으니 서북군에도 채비를 하라는 어명이 있었을 터. 한시가 급하니 서둘러 군사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분명 그런 어명이 있기는 했네."
독보의 말에 임경업이 답했다.
"하지만 우리 의주군은 움직일 수가 없음이야."
"아, 아니 어째서 그렇사오이까?"
독보가 당황해서 물었다.
임경업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니 아직까지 군사를 일으킬 준비가 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것을 잘아는 독보였기에 임경업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파총은 어찌 생각하는가?"
"당연한 일이겠지요."
임경업이 이자원 쪽을 보고 묻자 이자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심세괴가 청과 합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청군이 의주의 아랫배를 노릴 수가 있겠지요. 영감께서 움직이는 것은 자칫 청북(淸北)을 적들의 굴혈(窟穴)로 내어주는 꼴이 될 수 있사오이다."
청의 요구로 가도를 공략했던 원래 역사에서는 임경업과 유림 등 서북군 장수들이 휘하 병력을 대거 거느리고 참전했다.
그러나 그때는 조선이 청에 굴복한 상태였기에 후방을 걱정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심세괴가 청에 투항할 마음을 품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임경업이 의주 방면을 굳게 지키고 있어야 했다.
이자원은 임금에게 보내는 장계 말미에 그러한 이야기를 적어놓도록 했으니, 아마 임경업에게도 같은 명령이 내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북에서 움직일 수 있는 군대는 안주의 도원수 영감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 밖에 없는데, 남은 병력은 어디서 충당될 것 같은가?"
원역사에서 조선군은 유림과 임경업으로 하여금 군사 5천 명, 병선 50척을 동원해 가도를 공략했다.
동맹이었던 청군도 없으니 의주군까지 빠진다면 가도 공략은 더욱 난망해질 터였다.
오삼계의 소수 명군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자원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중앙이겠지요."
이자원의 말에 임경업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도감이 북상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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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균이 속한 훈련도감 좌부(左部)는 천총의 지휘를 받으며 북상하고 있었다.
도원수 유림과 합류하라는 명령이었다.
훈련도감 장졸들은 오랑캐와의 싸움이 끝난지 얼마 되었다고 다시 전쟁에 불려가냐며 불만이 많았지만, 박철균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다.
무관이란 전쟁이 있어야 공적도 쌓고 출세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면 어느덧 외직(外職)도 경험해보라며 수령도 해볼 수 있을 것이고, 지방관을 지내고 올라오면 여기저기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많아질 것이다.
기껏 시골 향반 노릇이나 겨우 하는 형들에 비하면 가문에서 제일 현달(顯達, 벼슬이 높아 이름이 드러남)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던 박철균은 문득 입맛이 썼다.
"파총 나리께서는 잘 계시련가······."
아직까지 훈련도감의 인사(人事)는 시작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끼리 무언가 충돌이 있었던 탓인 것 같은데, 그게 공 세운 사람 승차시키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난 전쟁에서도 자신이 세운 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논공 때는 제법 인정을 받았으나 여태 초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박철균이었다.
하다못해 그 귀신 같은 이자원 파총 나리라도 있으면 모르되 지금은 명나라로 가버린 상태니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는 그였다.
이자원과 관련한 소문을 내라는 신경진의 밀명을 받들 때에도 은근히 말을 흘려봤지만 딱히 소용이 없었다.
"우리 훈련도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네. 저기 저 수어청은 수어사 영감이 귀양간 뒤로 아직까지 장(長)이 없고, 어영청도 누구를 중군(中軍), 천총(千總) 삼아야할지 갑론을박이라던걸."
박철균이 투덜대는 이야기를 들은 동료 초관 하나가 그리 말했다.
이 파총 나리를 따라 나선 뒤로 자기만 전장에서 승승장구하자 원래 어울리던 초관들이 그를 은근히 경원시하던 판이었으니, 이리 말이라도 걸어주는 그가 퍽 고마운 박철균이었으나 말은 곧이곧대로 나오지 않고 불퉁했다.
"그러면 아예 완전히 바꾸지를 말지 왜 인사도 본격적으로 시작을 안한 판에 이상한 놈 하나가 굴러들어 왔느냔 말이오."
박철균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병조판서하던 분이 사약 먹고 골로 간 뒤로, 그와 도원수 자리를 다투던 심기원(沈器遠)이라는 양반이 한창 뜨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원래 훈련대장께서 승차해 정승으로 가시어 비게 된 자리를 그 사람이 차지할게 뻔하다던가.
그런데 그 줄을 타고 엉뚱한 인간이 대뜸 훈련도감의 마병 별장(馬兵別將)으로 들어온 것이다.
필경 중군 영감이 새로 훈련대장이 되실 분의 심기를 맞추려 부린 수작이 분명했다.
"이놈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쑥덕대고 있는게냐!"
제 욕을 하는 낌새라도 느낀 모양인지, 아니면 그냥 심사가 뒤틀려 그런 것인지 몰라도 사내 하나가 이리로 와서 호통을 친다.
통영에서 우후(虞候)를 지내다 왔다는 황익(黃瀷)이라는 인간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이다, 별장 영감."
호통 소리에 놀란 동료 초관이 바로 손을 싹싹 비비며 비위를 맞췄다.
하지만 박철균은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만 한번 꾸벅 숙였을 뿐이다.
"이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느냐! 어서 실토하라!"
그 모습을 본 황익이 더욱 열이 뻗쳐 말했다.
"훈련도감 마병들이 말을 학대하는 일을 두고 혀를 차고 있었사오이다."
"뭬야?"
박철균 그도 간덩이가 정상이 아닌 상관을 따라다니다 보니 담이 커진 것일까.
전쟁 전까지만 해도 별장에게 대놓고 대거리를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 박철균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말은 먹이를 삼킨 뒤, 속에서 삭이는 바가 늦기 때문에 반드시 물을 마시게 하고 먹이를 조금씩 나누어 먹여야 하오이다. 그리고 약간 걷게 하여야 하지요.
마병들도 그런 이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인데, 요즘들어 무턱대고 말먹이를 꾸역꾸역 먹이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사오이까? 필경 하루 세끼 말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능사인줄 아는 인간이 시킨 바가 아닐까 의심하던 차였소이다."
자기 말을 제 손으로 다뤄본 적도 없는 인간이 마병 별장이라고 내려왔으니 부하들을 그따위로 쪼아댄 것이 아니냐.
박철균은 인내심을 발휘해 그 말을 입에 삼켰다.
황익이 훈련도감에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정이 흉악하고 욕심은 많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무관이라는 자가 말먹이 주는 법도 제대로 모르니 박철균으로서는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익······! 네놈!"
황익이 박철균의 얼굴을 후려쳤다.
잘못 맞았는지 박철균의 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갈 길이 머니 네 죄는 더 묻지 않겠다! 한번만 더 불손한 짓을 저지르면 그때는 도감에서 치죄하여 곤장으로써 다스리겠다!"
황익은 씩씩대면서 돌아갔다.
코를 움켜쥔 박철균의 등을 동료 초관이 안타깝게 쓸었다.
"에그, 이 사람아. 그러게 왜 별장 영감 성질을 돋워서 변을 당하는가."
"영감은 무슨······."
박철균은 황익의 등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리 나라의 군대가 기강이 무너졌다지만 저런 인간이 별장이랍시고 돌아다니니 제대로 영이 서겠소이까."
"어허, 또 경을 칠 소리를."
동료는 박철균의 말이 황익의 귀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며 말했다.
"제기랄, 파총 나리만 돌아오시면······."
무려 1등 공신에 오른 상관이다.
황태극을 죽인 공으로 초관에서 파총까지 이미 승차했다지만 그 뒤에 세운 공이 크니 별장 쯤이야 능히 차지하실 터.
게다가 수완이 보통이 아니니 모르긴 몰라도 저놈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황 별장은 훈련대장 영감 되실 분의 측근인데 파총 나리라고 별 수 있겠는감."
'파총께서는 전하와도 만나신다'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오려는 박철균이었지만 필사적인 노력으로 참았다.
자신이 아는 이자원이라면 그런 소리를 떠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테니 말이었다.
"자, 충분히 쉬었으니 움직이자! 안주가 멀지 않았다!"
천총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군관들이 복창했다.
박철균은 피는 멎었어도 아직 얼얼한 코를 어루만지며 휘하의 병졸들을 다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