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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39화 (39/213)

〈 39화 〉 바라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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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의 천병은 필요없사오이다."

애초에 숭정제 또한 조선군이 주력이 되어 가도를 토벌하기를 원했고, 이자원도 합이 안맞을 정도로 많은 병력은 필요없었다.

오양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말했다.

"대신 내 아들을 데려가도록 하시오. 아비인 내가 이런 말하기는 무엇하나, 용맹하고 싸움을 잘해 젊은 나이이나 공을 많이 세웠소. 지금은 전봉(前鋒)의 우영참장(右營參將)으로 있는데,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도 정예하니 적도를 무찌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방금 나간 청년이 자제분입니까?"

"그렇소."

오양이 대답했다.

'오삼계(吳三桂)로군.'

이자원은 눈빛을 빛냈다.

명말청초에서 가장 유명한 한간(漢奸)을 꼽으라면 바로 이 오삼계일 것이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자 청에게 산해관을 열어준 것은 어찌 정상참작을 한다 하더라도, 청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남명 영력제(永曆帝)를 자기 손으로 목졸라 죽인 것과 정작 십 년 뒤 그 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그의 악명을 더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조선이 신경쓸 바가 아니다.'

오삼계가 명을 배신했든 청을 배신했든 그의 능력은 쓸만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게다가 그는 총병 오양의 아들이고, 좌도독 조대수의 외조카였으니 가도를 압박하는데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자원은 오양에게 별 말 없이 감사를 표했다.

"영명하신 아드님을 지원군으로 보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이다."

"허허, 좋게 보아주니 고맙소."

이자원이야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만 자식 칭찬을 들은 오양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 생각이오?"

"우선 조선으로 돌아가 우리 군과 합류해야겠지요. 본래 귀국하려면 가도를 경유해야 하나,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해안가를 따라 돌아갈까 하오이다."

"해안가를 따라서?"

오양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청의 영토 인근도 지나가야 할 터인데 괜찮겠소?"

"전쟁에서 소위 한족 3왕이라는 자들이 세력을 모두 잃었으니 청의 초계(哨戒) 또한 허술할 것이오이다. 적에게 발견된다 할지라도 바다에 익숙한 자들이 없으니 어떻게 우리가 조선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하겠소이까?"

경중명은 그 목이 베였고, 공유덕과 상가희 또한 생사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들이 조선에 이끌고 온 천우병(天佑兵)과 천조병(天助兵)은 사실상 전멸했다.

청군이 수전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강화도를 함락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한족 3왕이 데리고 투항한 병력에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 청군의 해상 역량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출진하지 않고 남아있던 천우·천조병들도 있겠지만 그들만으로는 재건이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심가는 혹시라도 사신단이 조선에 돌아가지 않는지 일대 해역을 샅샅이 뒤지겠지만, 설마 요동 반도를 따라 움직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오양이 이자원의 계획을 듣고 말했다.

그때 아까 전 나갔던 청년, 오삼계가 다시 방 안에 들어왔다.

"아버님, 부하들에게 채비를 하라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네가 직접 나서서 챙기지 않고?"

오양의 물음에 오삼계가 이자원 쪽을 쳐다보며 포권(包拳)했다.

"여기 계신 이 장군을 모시고 한번 직접 병력을 점고(點考)하려 하는데 어떠신지요?"

오삼계가 꺼낸 뜻밖의 제안에 이자원은 의아했다.

'숫제 윗사람에게나 취할 법한 말투군.'

공손한 말투도 말투인데다, 지금의 제안은 마치 상관에게 전투에 나서기 전 병력 상황을 파악해달라는 것 같지 않은가.

참장이면 그 품계가 3~4품으로 이자원이 조선에서 받은 품계인 종4품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명나라 품계를 몇 단계 높게 쳐주는 관례만으로 따지자면 오삼계가 더욱 거만하게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삼계는 그 또한 의식한 것인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찌 황태극을 죽인 영웅을 품계만 따져 대하겠습니까. 게다가 가도를 수복하고 나면 그 총병(摠兵)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오삼계가 순전히 존경심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닐 것이었다.

이자원은 식어버린 차를 훌쩍 삼키며 일어섰다.

"그러면 오 참장의 말대로 하겠소."

"소관이 직접 안내해드리지요."

오삼계가 무장보다는 영업사원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

오삼계는 이곳 영원위(寧遠衛)에 처음 조선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을 때를 떠올렸다.

'오랑캐들이 조선을 침공했다더라.'

'수 일만에 조선의 도성이 함락되었다더라.'

외숙인 좌도독 조대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회의를 열었다.

위위구조(囲魏救趙)의 책략에 따라 비어있는 요동으로 쳐들어갈 것을 결정하던 때에도, 조선이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조선이 무너지면 가도가 무너지고, 결국 영원위 일대의 명군은 청과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갑갑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 암울한 예상을 뒤집은 것은 그리 관직도 높지 않은 눈 앞의 군관 때문이었다.

황태극을 죽이고, 경중명의 수급을 얻었으며 수 차례 싸움에서 청군을 궤멸시켰다는 남자.

또래 중에서는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믿었던 오삼계지만 자신과 같은 임자년(壬子年, 1612년)생인 이자원의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철렁했던 터였다.

'거기다 가도 총병이라니······.'

그래봤자 소방의 번장(藩將)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아버님께선 조선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라하셨지.'

그렇기에 이자원에게 과례(過禮)에 가까울 정도로 숙였다.

하지만 오삼계가 이자원을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번 전투에서 직접 지켜보겠다.'

오삼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스로를 명장의 재목으로 생각하던 오삼계다. 자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저 헛된 명성에 취한 오랑캐일 뿐.

그런 자에게 보여줄 공손함 따위는 없었다.

===

"전하, 출정의 준비를 거두어주시옵소서!"

"거두어주시옵소서!"

"무도한 짓을 벌인 이자원을 바로 데려와 처벌하소서!"

창경궁 앞에 모여앉은 유생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균관에서부터 궁궐까지 걸어온 유생들이 집단으로 유소(儒疏)하는 소리다.

실로 오랜만의 유소였기에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에서 국사를 보고 있던 임금의 귀에까지 닿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도대체 대사성(大司成)은 무엇을 하기에 저런 무도한 작태를 막지 않는단 말이냐?"

임금이 신하들을 둘러 보며 말했다.

성균관의 장인 대사성은 지난날 원상으로 추천되었던 대사헌 김수현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청서인 그는 이들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막으려 나서지 않았다. 그 또한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전하, 언로(言路)는 시냇물과 같아 막히면 썩게 되는 법이옵니다. 옛일을 들자면 멀리는 주왕(紂王)이, 가까이는 폐군 연산이 간하는 바를 꺼려 함부로 참흉(慘凶)한 일을 벌인 탓에 나라가 도탄에 빠졌으니 언로의 중요함이 이와 같사옵니다."

김수현을 추궁하는 임금에게 김상용이 말했다.

"내가 언제 언로를 막자고 했소? 비답을 내려주었는데도 해산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 아니오?"

임금이 말했다.

"훈련도감에 출진 준비를 명한 것은 순전히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이요, 이자원이 가도에서 천병을 또다시 참했다는 말은 검증이 필요하니 기다려 보자 하였소."

그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하오나 전하, 이미 훈련도감에서는 이자원이 천병을 함부로 죽인 탓에 우리 사신단이 곤욕을 치렀다는 말이 파다하옵니다. 훈련도감은 이자원이 몸담던 군영으로 그와 도당을 이룬 자가 여럿 있사온데 그 중 한 초관이 그런 말을 퍼뜨렸다 하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책봉주청사에게 사람을 보내 이자원을 돌려 보내라 하소서."

'이래서 김수현을 성균관으로 옮긴 것이다.'

쏟아지는 삼사의 탄핵에 임금이 내심 생각했다. 그가 사헌부를 쥐고 있으면 골치가 아플테니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은 이들의 탄핵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책봉주청사의 뒤를 어떻게 따라잡는가? 가도를 거쳐야 할 것인즉."

"가도에 사람을 보내 조정의 본의는 이자원과 같지 않음을 해명하고, 다시 천병이 죽은 것에 대해 사과하는 뜻을 전하시지요."

사헌부 지평 오달제(吳達濟)가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정주에서 명군을 죽인 것은 참작할 여지라도 있사오나, 책봉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앞두고 살상을 벌여 대사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명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의 죄인이기도 하옵니다. 모쪼록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이자원이 천병을 죽였는지, 죽였다면 왜 그랬는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임금은 호통을 쳤다.

그러나 더욱 강한 기세로 신료들은 말했다.

"처음 이 사실을 퍼뜨렸다는 초관을 문초해보면 더욱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마치 공과 같구나.'

거세게 바닥에 내려칠수록 높이 튀어오르는 공.

야당(野黨) 노릇을 오래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들은 타협을 몰랐다.

"풍문(風聞) 따위로 국문을 여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임금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김류는 그 모습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그는 청서에 정보를 전달한 것 외에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있었다.

'주상께서 뭔가를 숨기고 계시구나.'

그는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약하게 나올 이유가 있겠는가.

'정말로 이자원이 큰 사고를 친 모양이군.'

이자원이 아무 이유없이 명군을 죽이고 다닐 정도로 미친 놈은 아닐테니, 심세괴가 이자원이 책봉주청사 일행에 포함된 사실을 눈치챘던게 아닐까.

그렇더라도 중죄는 중죄라 임금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쯤되면 김류도 한 마디를 거드는 것이 좋을 터였다.

"전하, 이자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 또한 훈련도감의 출정 문제이옵니다. 오랑캐는 이미 크게 혼이 나 도망쳤으니 중외(中外)에서는 전하께서 가도를 두고 행하시는 일이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비록 근래에 다툼이 있었다 하나 가도 동강진은 엄연히 천조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데 어찌 군사를 몰아가려 하시옵니까?"

"만일을 대비할 뿐이라 하지 않았소?"

사실상의 인정이었다.

설마설마하던 신하들의 눈이 커지고, 김류는 이 참에 더욱 밀어붙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천조와 우리 사이에 어찌 만약이라는 말이 있겠사옵니까,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사대의 예는 자식이 부모를 섬김과 같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가도를 공격함은 즉 패역무도(悖逆無道)한 짓이옵니다! 전하께서 기어이 가도를 치시겠다면 신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나이다!"

예조참의 윤황(尹煌)이 흥분하여 외쳤다.

이어서 줄줄이 청서 신료들이 몸을 엎드려 이자원을 비난하고, 가도 공격의 뜻을 거두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자원이 조그만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그 자 하나를 위해서 감히 대명과 맞설 뜻을 품으신 것은 이해할 수가 없나이다!"

"이를 강행하신다면 신 등은 모두 초야로 돌아가겠사옵니다!"

신하들에게는 임금이 총신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임금은 태연했다.

"경들이 이리도 가도를 생각하는 줄은 몰랐구나."

임금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이제는 낚싯대를 들어올릴 때였다.

"전하, 책봉주청사로부터 온 장계이옵니다."

때마침 좌승지 박로가 장계를 받치고 들어왔다.

"가져오라."

장계를 받아들어 대충 읽는 시늉을 한 임금은 그것을 대뜸 신하들의 앞에 던졌다.

"읽어보라."

"······!"

널부러진 장계를 집어들어 읽던 김상용의 눈동자가 미친듯이 떨렸다.

"패역무도가 어쩌니 떠들어대던 입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심세괴가 곧 역적이라지 않은가!"

임금의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감히 웃전을 능욕하면서까지 군사(軍事)를 방해한 자들의 저의가 무엇인가! 내 오늘 그것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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