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덫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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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은 임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반 각 동안 나눈 말은 인사 밖에 없었다.
딱히 임금이 그를 경원시하여 괴롭히는 것은 아니고,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 때문이었다.
원인은 조금 전 임금에게 전해진 저 장계 때문이었다.
책봉주청사가 가도를 떠날 때 배 한 척을 돌려 급히 보내온 것이었다.
"경과는 조정의 대사를 논하고자 불렀건만, 그 일은 조금 미루어야 할 것 같소."
임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인 말씀이시온지요."
신경진은 머리를 낮추며 말했다.
"방금 책봉주청사 구굉이 전하기를, 심세괴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기에 서둘러 대국에 이를 알리러 가도를 떠났다 하오."
"하오면······."
신경진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일이 더욱 쉬워질 것 같소."
심세괴가 반역을 꾀했다는 명분을 얻었으니 조선이 가도 명군 몇쯤 참한 일은 대수롭지 않게 된다.
그리고 지레 이자원을 내치라 하던 자들도 꿀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었다.
'아니, 그정도로는 부족하다.'
기왕에 이런 기회가 왔으니 방해가 될 자들은 모두 쳐내야 한다.
이자원이 말한 북벌(北伐)을 국시로 삼는다 하면 모두들 말로는 찬성할 것이다.
선대왕께서 오랑캐의 손에 돌아가셨으니 드러내놓고 반대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임금이 온 국력을 기울여 북벌에 매진하려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지체할 것이 뻔했다.
정말로 북벌이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믿어서일 수도 있었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정말 북벌에 열의를 다할 자들을 조정에 앉히고 싶었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어영청 도제조(都提調)로 삼겠다는 명도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었소."
임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큰동생인 봉림대군 이호는 타고난 무골(武骨)로 임금 못지 않게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일단 어영청의 관제상 수장인 도제조로 삼아 감독을 맡기려 했다. 실권은 어차피 어영대장(御營大將)이 쥐고 있기에 별 무리가 없을거란 판단이었지만, 조정대신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고 말았다.
"청서와 관당(冠黨), 이 자들이 손을 잡고 반항을 해대더군."
관당은 김류의 자인 관옥(冠玉)에서 따온 것으로, 논공행상이 끝난 후 김류 일파가 공서를 떠나 새로이 당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영의정 김류를 필두로 병조판서가 된 김자점, 김류의 아들 김경징 등이 그 일원이었는데, 봉림대군의 임명을 반대한 이유야 뻔했다.
"청서야 원칙대로 종친이 군문에 손을 대는 것은 좋지 않다 여겨 반대한 것이겠으나, 관당의 무리들은 그저 시류에 영합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떠들어댔으니 더욱 죄가 엄중하옵니다."
신경진이 말했다.
"무슨 이유든 상관없소. 선대왕의 원수를 갚는 일에 이 나라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념해야할 터인데, 고작 임금의 근친(近親)이 어영청 도제조를 맡아서는 안된다는 고루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으니 이러한 자들과는 조정을 이끌어나갈 수 없지 않겠소?"
사실상 청서 또한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소리였다.
"전하, 이런 이야기를 신에게 하심은······."
신경진이 멀리 떨어져앉은 승지(承旨)와 사관을 곁눈질했지만 임금은 태연했다.
그가 믿는 사람들이니 사초에는 적혀도 말이 새어나가지는 않을 것이란 뜻인가.
'전하께서 다시 우리 공서(功西)에 권세를 돌려주려 하심인가?'
신경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임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공서도 청서도 마음에 들지 않소."
갑작스런 임금의 선언에 신경진의 말문이 막혔다.
"이 땅은 임금인 내가 다스리고 신료들은 오로지 나를 보좌하여 정사를 처리해야 하거늘, 오늘날에는 신하들끼리 파당을 나누어 다투니 임금을 잊고 국사를 그르치는 지경에 이르렀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신경진이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대죄(待罪)했다.
임금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붕당을 없애기도 요원한 일. 나는 다만 양당이 나의 뜻에 적극적으로 따르기를 원할 뿐이오."
임금이 김류를 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김류는 자신이 공서와 청서 사이를 조율함으로써 임금과 상부상조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임금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로 북벌에 잘 협조할만한 인물이 각각 공서와 청서를 장악하는 것.
'그렇기에 나를 좌상으로 앉히신 것이로구나.'
신경진은 남한산성 방어와 갑사창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이자원과 함께 안국공신(安國功臣) 1등에 오르고, 그 덕에 좌의정으로 승차했다. 최명길을 비롯해 공서 문신들이 쓸려나간 지금 그가 공서의 영수나 다름이 없었다.
신경진은 무신으로서 임금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청서 쪽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임금의 장인 강석기가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청서는 여전히 김상용이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관당처럼 근본 없는 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침 관당과 청서 일부가 역적의 편을 든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소? 하지만 저들은 그것을 모르지."
임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계를 받아온 군관은 최소한의 역참만 거치며 달려온 끝에 곧장 이것을 승정원에 전했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보고 즉각 임금에게 올린 이가 바로 저기 앉아 있는 좌승지 박로였다.
“신은 무엇을 해야겠나이까?”
신경진이 물었다.
“장계가 맞다면 조만간 가도를 징치해야 하지 않겠소? 좌상은 그 준비를 맡아주시오.”
“서북군이 아니라······ 신이 말이옵니까?”
“그렇소.”
신경진은 좌의정으로 승차하며 훈련대장 직은 내려놓았지만 그만한 사람을 쉽게 대체할 수 있을리는 없었다. 따라서 훈련도감 도제조도 겸하게 되었는데, 밑의 중군 등을 움직여 준비에 나서라는 이야기였다.
‘전쟁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거늘······.’
그러나 그렇다고 가도를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이 참에 화근을 뽑아버리는 것이 맞긴 했다.
“그리고 이자원이 신임하던 부하가 도성에 남아있다 들었소.”
신경진은 금방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서부터 이자원을 따라다니며 전공을 세운 박 모라는 초관이었다.
“그에게 내릴 명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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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조정의 형세는 그야말로 급변했다.
인조가 전사한 초유의 사태로 인해 불거진 주화에 대한 책임론은 조정 내 여당과 야당의 위치를 뒤바꾸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파직당하고 수어사 이시백이 귀양을 가는 등 공서 문신들은 몰락을 피하지 못했다.
오로지 영의정 김류를 위시한 일부 탈당파들만이 새로이 붕당을 이루어 존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관당은 청서에게 상당히 이끌려다녀야 했다.
말이 좋아 연대이지 총알받이 노릇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번 봉림대군의 도제조 임명 반대 건에도 마찬가지였다. 판중추부사에서 다시 우의정으로 내앉은 김상용은 은근히 그가 먼저 나설 것을 종용했다.
“영상은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이니 앞장서 의견을 내야한다니. 말이야 번드르르하지······.”
김류는 불쾌한 표정으로 장죽을 피워 물었다.
원래 계획대로 임금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면 이리 청서에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김자점을 병조판서에 꽂아넣는 일만 해도 청서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김류로서는 그들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 청서이니 어쩔 수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아들인 이조참의 김경징의 말에 김류가 답했다.
그의 말처럼 확실히 구도만 보았을 때는 청서가 앞서고 있었다.
우선 청서의 영수 김상용이 우의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은퇴했다가 복귀한 셈이었던만큼 몇년 지나지 않아 다시 물러날 것이라는게 중론.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유력한 이는 이조판서 정온이었다. 그가 최명길의 후임으로 판서가 되자 비게 된 참판 자리에는 역시 청서인 이식(李植)이 앉았다.
공조판서도 청서 강석기가 차지했고, 예조 또한 청서의 몫으로 점쳐지는 상황.
반면 공서는 삼정승육판서 중 좌의정과 형조판서만 사수하며 주저 앉았다.
병조판서는 관당의 몫으로 저들 청서가 던져주었다.
호조판서에는 소북인 심열이 앉았다. 다만 북인은 이미 몰락한지 오래였기에 심열 본인은 무당파나 다름없었고, 오로지 그의 실무 능력 때문에 임금이 발탁한 것이다.
“그래서 청서는 나라를 다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해한다만······ 모두 착각이다.”
김류가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결국 모든 권세는 전하로부터 나오는 것. 하물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도성을 되찾으신 임금께서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청서는 그간의 설움에 절어 자신들이 무슨 비간(比干)이라도 되는줄 알고 임금의 명에 거침없이 반대를 표하는 중이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권세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일단은 연대하고 있는 김류의 고민도 깊어지는 것이다.
‘한껏 기세가 오른 왕권이 타격을 받게 된다면 또 모르지만.’
“주인마님, 병판 대감께서 찾아오셨습니다요.”
상념에 잠겨있던 김류를 하인이 공손히 불렀다.
“낙서(洛西, 김자점의 호), 그 사람이? 어서 안으로 드시라 이르거라.”
김류의 말에 중년 남자 하나가 방 안에 들어섰다.
“영상 대감. 그간 강녕하셨사오이까?”
“어제도 보아놓고 무얼 그러시오. 병판은 평안하오?”
같이 앉아있던 김경징이 김자점에게 꾸벅 인사까지 올리고 나자, 김자점이 본론을 꺼냈다.
“영상 대감, 지금 좌의정 신경진이 훈련도감의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하오이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니오?”
도제조가 실무를 맡아보지는 않는다지만 신경진은 그 출신이 출신인만큼 훈련도감의 관리에 나선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병조를 맡더니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일러바치러 왔나 싶어 어이가 없던 그때, 김자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출진에 앞서 준비를 하는 것 같사오이다.”
“출진? 출진이라니?”
김류가 입을 떡 벌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왔을리는 없고······ 설마 가도 때문이오?”
“그런 눈치오이다.”
김류가 혹시 싶어 물어보자 김자점이 대답했다.
“가도와 아무리 사이가 나빠졌다 한들 군사까지 일으키다니 말도 안되는 일! 전하께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신다는 말이오?”
“대감, 이것은 훈련도감 쪽에서 나온 말이온데 소관이 듣자하니······.”
김자점의 속삭임에 김류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풀어졌다.
드디어 그가 원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오. 청서 쪽에도 이를 알려야겠소.”
청서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불길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럼 주상은 사면초가에 놓일 수 밖에 없으리라.
김상용의 집으로 아들을 보내며, 김류는 생각했다.
===
책봉주청사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했다.
원활한 책봉과 해명. 그리고 10만 냥의 하사금까지.
이자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획했던 일은 모두 끝냈다. 지금은 계획에 없는 일을 하러가는 터였지만 말이다.
“요동에서 병력 일부를 차출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오이다.”
이자원이 내민 칙서를 살펴보던 요동총병(遼東總兵) 오양(吳襄)이 옆에 있던 청년에게 눈짓했다.
그가 맡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좌도독께서 청을 치러가신 까닭에 많은 병력을 내기는 어렵소. 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