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마지막 황제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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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가 이자원을 따로이 부른 것은 조회가 파하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관(內官) 한 사람의 통변을 거치고서야 고두(叩頭)하고 있던 이자원은 고개를 들었다.
"우리말을 아직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숭정제는 중얼거렸다.
그는 가만히 이자원의 낯을 내려다보았다.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의 시선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황망하여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할 것이나, 이자원은 차분히 숭정제의 발치만 쳐다볼 뿐이었다.
"짐을 똑바로 바라보라."
이자원이 조용히 눈동자를 들어올리자, 그 시선이 숭정제와 맞부딪혔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숭정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번이 두번째로구나."
"······."
알 수 없는 말에 이자원이 침묵하고 있을 때, 숭정제가 말을 이었다.
"사양하지도, 떨지도 않고 짐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자 말이다. 첫번째는 원(袁) 상서였지."
죽기 전 병부상서 겸 좌부도어사를 지냈던 원숭환을 말함이다.
황명으로 능지형을 받아 죽은 그에 빗대었으니 살이 떨릴 법도 하건만, 이자원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러나 너와 원 상서는 큰 차이가 하나 있지. 무엇인지 알겠느냐?"
숭정제의 물음에 이자원은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신은 일개 번장(番將)에 불과하니 폐하의 위엄에 털끝만큼도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 아니겠사옵니까."
원숭환과 달리 이자원은 숭정제에게 그 어떤 정치적 위협도 될 수 없다.
이자원은 그것을 말한 것이었다.
숭정제와 같은 의심병 환자는 휘하에 능력 있는 부하가 있더라도 믿지 못해서 쓰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이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들만 기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자원은 그에 딱 들어맞는 인간이었다.
"조선에서 올라온 전쟁의 개황(槪況)을 모두 읽어 보았다. 과연 조선왕이 그간 너를 총애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더구나."
숭정제의 눈이 번뜩였다.
"조선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 썩기는 아까운 재주다. 중원의 혼란을 잠재우는데도 쓸만할테지. 그래서 조회 말미에 너를 두고 친히 이른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이자원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하오나 신이 저희 임금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 감히 조선을 떠날 수가 없사옵니다."
따지고 보면 임금에게 빚진 것 따윈 없는 그였지만 명령을 거절하기에 이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숭정제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이미 너희 나라의 전쟁은 끝났다. 조선왕이 쓰임이 다한 너를 삶지 않을 것 같으냐?"
황제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스리는 법 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숭정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임금이 북벌(北伐)을 원하는 한 절대 이자원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
이자원은 가만히 숭정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중원은 천하의 중심이다. 이런 곳에서 뜻을 펼칠 수 있는데도 거절을 한다라······ 도대체 조선왕이 너에게 무엇이기에?"
그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가 뭐냐는 표정으로 숭정제가 물었다.
하지만 잘못 짚었다. 이것은 충성 따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왕도, 조선도 이자원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것도 의심병 걸린 황제보다는 훨씬 쓸만한.
설령 이자원이 모든 것을 버리고 명에 출사한다 해도 곧 닥쳐올 환란을 막아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명나라는 비유하자면 갑작스런 태풍에 뿌리뽑힌 나무라기보다는 저 11대 가정제로부터 시작되어 15대 천계제로 귀결되는, 백 여년의 실정 속에서 깎여나갈대로 깎여나간 바위에 가까웠다.
장거정 사후 심각할 정도로 진행된 관료들의 부패와 기강 문란, 위정자와 백성 간의 괴리,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지방 토호들, 각지에서 발흥하는 반란군과 도적떼, 그리고 끔찍한 기근과 재난.
이 모든 문제는 국체(國體)를 송두리째 바꾸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왕조가 청으로 바뀌고 나서도 강희제(康熙帝) 때나 되어야 완전히 해결될 문제였다.
"좋다."
잠시 생각하던 숭정제가 말했다.
"조선왕에 대한 너의 충심을 인정하마. 하지만 따지고 보면 조선왕이 나의 신하이니 너 또한 내 신하가 아니냐?"
"그렇사옵니다."
"그럼 잠시 네 재주를 빌리는 것 정도야 충효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지."
숭정제는 말했다.
"이것은 또한 조선에도 도움이 될만한 일이니라."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지금 짐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존재한다."
첫째는 섬서의 반란군.
둘째는 청.
"그런데다 이제는 가도의 심세규가 불궤를 도모했다."
"그렇사옵니다."
아직 심세괴가 군사행동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반란 혐의가 씌워진 이상 마찬가지였다.
"가도가 이런 짓을 도모한 것은 한 두해의 일이 아닌즉, 이제는 정말 믿을만한 자를 보내 이를 토벌하고 가도를 재건코자 한다. 만약 네가 조선군을 이끌어 가도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 너를 그 총병(摠兵)에 앉히고자 하는데, 어떠냐?"
숭정제의 말에 이자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폐하, 신은 번국의 군관으로 그 품계도 낮사옵니다. 어찌 그처럼 높은 자리를 신에게 내어주려 하시나이까?"
"조선의 품계 따위보다 짐의 말 한 마디가 더욱 중요하다. 짐이 필요하다면 쓰는 것이지, 어느 누가 토를 달 수 있단 말이냐?"
유례없는 전제군주제를 구축한 명나라다.
그렇기에 숭정제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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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이자원과 상관없이 조선에 내밀기 위해 마련해놓은 안이었다.
청천강 전투에서 가도군이 허물어졌으나 재정은 날로 악화되어가고 내부적으로 산적한 문제가 많은 명으로서는 재건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가도를 통제하는데 실패했으니 아예 이를 포기하자는 여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만약 이자원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요동에서 소수 병력만 내고, 나머지는 조선에 명해 가도 토벌을 맡길 셈이었다.
심세괴가 순순히 목을 내놓는다면 그조차도 필요없고 말이다.
'가도의 재건을 조선이 맡아준다면야 총병 벼슬 따위는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다.'
동강진을 아예 조선에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심세괴에게 가있던 관직을 이자원에게 주는 것 뿐이다.
어차피 자신이 끌어들이려고 했던 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조금 숙고하게 해달라며 한발짝 물러나버렸다.
"이자원이 이를 받아들일 것 같은가?"
조선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며 대국 벼슬을 거절한 그지만, 가도 총병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황명(皇命)인데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옆에 서있던 태감 노유령(盧維寧)의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도 있지만 이자원은 어디까지나 번신이었으니 봐준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숭정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조선왕은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그간 가도가 조선과 천조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조선인이 총병이 된다면 쌍수(雙手)를 들고 환영하지 않겠사옵니까?"
"처음에는 그럴 것이다."
숭정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조선에 가본 일이 있지."
"예, 폐하."
숭정제가 노유령에게 말했다.
"당시 충문왕(忠文王, 인조)과 세자를 보았지 않은가?"
"그렇사옵니다."
갑자기 조선에 칙사로 갔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노유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들과 비교할 때 이자원의 기백이 어떠하던가?"
숭정제가 물었다.
"조선왕 부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오나, 이자원의 기세가 더욱 강맹해 보였사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유령이 답했다.
"그래······."
숭정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스스로는 자신의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노라 말하지만, 윗사람은 얼마든지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때가 되면 이자원이 붙잡을 줄은 하나 밖에 없어지리라.
자연히 그의 충성도 다른 곳을 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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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얕은 수를 쓰는군.'
이자원은 숭정제와의 만남을 되새겼다.
공은 조선이 들이고 복구된 가도는 명이 챙기겠다는 수. 나중에 얼마든지 핑계를 대고 총병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자신으로서도, 조선으로서도.
그가 가도를 장악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러니 이자원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최종적으로는 임금의 재가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가 온 목적은 단순히 가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나리, 마령서(馬鈴薯)라는 놈의 종자를 구해왔사온데, 혹시 이것이 맞는지요?"
북경에 도착했을 때부터 역관을 통해 마령서, 즉 감자를 구해보게 한 이자원이었다.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등이 들어온 것이 명말(明末)의 일이었으니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이자원이 과연 보니 현대에 비해서 많이 작기는 하지만 그가 알던 감자가 맞았다.
아무래도 지속적인 품종개량은 필요해보이지만 말이다.
"황제께 하사받은 은자로는 쌀을 사가기도 빠듯하거늘 이상한 물건이나 사모으고 있는게요?"
씨감자를 손에 쥐고 있던 이자원의 뒤에서 호령이 들렸다.
동지사 김육이었다.
"이것이 장차 쌀 수십만 석 이상의 역할을 할 작물이오이다."
이자원의 대답에 김육이 황당해져서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쌀 사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오?"
"생육기간이 짧고 거친 밭에서도 잘 자라며 흉년에도 양식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 이 마령서지요. 당장의 구휼은 몰라도 장차 마령서를 재배한다면 쌀 수십만 석에 비긴다는 말이 가히 허언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자원의 설명을 들은 김육이 눈을 빛내며 감자를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과연 조선 제일의 경세가(經世家)답게 이런 말을 듣자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 종사관은 어떻게 이런 물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이오?"
"부방살이를 하다보면 이리저리 들리는 풍문이 많았사오이다. 혹시나 해서 알아본 것인데 손에 들어왔지요."
이자원은 자신의 지식에 대해 대부분 1년간의 부방에서 얻은 것이라 설명해왔다. 청나라의 정세도, 지금의 감자에 대한 것도.
주위에서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박철균은 그냥 자기가 관심이 없어서 그런 얘기를 못들었나보다 하고 넘어갔고 말이다.
"그렇다면 남만교(南蠻敎) 절에 들른 것도 부방 시절 때 들은 얘기 때문이오?"
김육의 말에 이자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쪽은 항왜(降倭)들에게서 들었지요. 조총을 비롯해 많은 기물과 기술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온다 하니 호기심이 생겨서 말이오이다."
사실은 단순한 호기심 따위는 아니었지만 김육에게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오기 전 임금에게는 나름의 설명을 해놓았긴 해도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표로 했던 인물은 자리를 비워 만날 수 없었기에, 돌아올 때 전갈을 전해달라 부탁해놓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종사관."
감자를 뜯어보던 김육이 그를 불렀다.
"그대는 참 비밀이 많은 사람 같소."
"어째서 그렇사오이까?"
뭔가 이상함이라도 느낀 것일까.
이자원이 묻자 김육이 웃으며 말했다.
"전쟁만 잘할 뿐 아니라 마령서 같은 효자(孝子)도 구해오니 숨기고 있는 재주가 도대체 몇개인지 모르겠구려. 이러다 문예(文藝)에도 두각을 보이는 것 아니오?"
김육의 너스레를 이자원이 흘려 넘길 때였다.
누군가가 회동관 너머를 기웃거리더니 이내 이자원을 찾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중국인이었다.
"신부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