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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34화 (34/213)

〈 34화 〉 맹호출림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가는 길은 쉬웠지만 오는 길은 어려웠다.

그 사이 심세괴의 명이라도 떨어진 것인지 길목을 접어들자 명군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자원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비켜라!"

이자원의 검이 적의 허리를 갈랐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검격이다.

검을 되돌리고 난 다음 순간, 칼날이 다시 벽력같은 속도로 앞을 향한다.

“컥!”

그를 겨냥하고 달려오던 명군이 핏물을 울컥 뿜으며 쓰러졌다. 생명이 끊어지며 나오는 단말마의 비명이 그의 귀를 찌른다.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경외. 공포.

그런 감정이 담긴 시선이 이자원의 얼굴에 와닿았다.

"히익, 괴물!"

이자원이 앞장서서 걸음을 떼자 창을 치켜든 명군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렇게 사람을 쉽게 베는 실력은 원래 이자원의 것이 아니다.

그가 육사 시절 무술을 조금 배웠다 한들 어디까지나 호신 용도에 불과했다.

'이 정도 무예를 가지고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별다른 전쟁이 없던 조선 후기에도 김체건(金體乾)이나 백동수(白東脩) 같은 이는 그 무위에 대해서 적게나마 기록이 남아있다.

하물며 본신 같은 경우는 전시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자일텐데 말이다.

그러나 본신에 대한 생각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이크!"

뒤따라 오던 병사가 괴상한 신음을 내며 펄쩍 뛰었다.

발 근처에 화살 한 대가 날아와 꽂힌 것이다.

"길잡이는 무사한가!"

"예에, 이 친구는 아주 멀쩡합니다요."

이자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자 병사가 대답했다.

미리 수배해놓은, 장삼(張三)이라 하는 명나라 출신 선원은 갑자기 일어난 싸움에 얼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탈주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거침없이 피를 뿌리고 있는 이자원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박철균이라도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뒤를 따르라며 악을 쓰던 명 군교(軍校)의 눈을 그어버리면서 이자원은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그 덩치며 험상궂은 얼굴은 위압감을 주는데 도움이 됐을 터다.

하지만 그는 따라오지 못했으니 할 수 없는 일.

이자원은 장삼을 데리고 무사히 포구까지 나아가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마 동강진의 명군들이 정예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대로 포진을 갖추고 대응했다면 이자원도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종사관 나리! 도착했습니다!"

겁먹어 끝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창날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창대를 그대로 타고 미끄러진 환도가 명군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나가자 펼쳐진 것은 바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 배들은 모두 바다로 나가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한 무리의 명군이 그 쪽과 대치하고 있었다.

대충 주고 받는 말이 이러했다.

"독보라는 중은 죄를 짓고 도망친 자로, 조선에 무슨 말을 꾸며 일렀는지는 모르나 모두 거짓이오! 총병께서는 조선 사신들과 만나 오해를 풀고자 하시니 출항 준비를 멈추시오!"

"조선의 사정이 어려워 한시바삐 천조에 아뢰어야 하는 터라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소! 모쪼록 총병께 이러한 사실을 전달해주기를 바라오!"

"종사관 나리, 저 사이를 뚫고 들어가야겠습니까?"

그러기엔 명군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이자원이 잠시 고민하던 그때, 이쪽을 발견한 모양인지 조선 쪽 포판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이윽고 포판 위 삼사(三使)의 처소에서 사람이 나왔다. 구굉이었다.

그가 무어라 외치자 잠시 뒤.

- 퍼펑!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명군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아앗!"

"조선 놈들이 포를 쐈다!"

사행길이라 하나 이런 시대에 무장을 갖추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판옥선 같은 병선은 아니었기에 각 배마다 현자총통 1문을 실은 것에 불과했으나 명군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원래부터 상태가 좋다고 보기에는 힘든 명군이었으니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자원 일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뚫고 나갔다.

이자원의 칼이 춤추고, 조선군 병사들은 장삼의 양팔을 잡은 채로 고개를 숙이며 뛰었다.

"이 파총! 무사해서 다행이네!"

구굉이 소리쳤다.

"정사 영감, 어서 출발하시지요!"

"알겠네!"

구굉이 답했다.

이자원이 길잡이를 데리고 오는 동안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격군들도 준비를 마쳤다.

식수는 미처 많이 채워넣지 못했지만 다음 경유지까지는 버틸만 했다.

"포까지 쏘실줄은 몰랐사오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꼼짝없이 가도에 붙들릴 판이 아니었는가. 심세괴가 불궤를 도모한 것이 사실이라면 수단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네."

이자원 그라도 그리 했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도 이리로 오면서 명군을 두 손 두 발로 못셀 정도로 베어넘긴데다, 애초에 사행을 오게 된 계기도 명군을 참했기 때문이었으니.

그렇더라도 구굉의 결단이 과감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과연 무신(武臣) 출신답군.'

인조반정 때 적극적으로 참여한 무신이자 임금의 인척이었으니 정사로 보내기에 적합한 인선이었다.

다만 외교 실무에는 약할 수 밖에 없었는데, 부사로 따라온 윤휘가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길잡이를 데려와라!"

배가 가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선원 장삼은 이자원의 서늘한 눈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자원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은 가도인데 심 총병이 남아있는 가족들한테 해를 가하면 어떻게 하냐고 묻습니다."

"심세괴는 곧 해임될 것이라 일러라."

해임이 아니라 죽음에 이를게 뻔했지만 구태여 이 자에게까지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품삯도 넉넉히 쳐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길이나 잘 안내하라고 해라."

장삼은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이자원의 말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미 배가 떠나버렸으니 내릴 방법도 없었고 말이다.

"가도에서 배가 쫓아옵니다!"

그러나 이자원이 그쪽을 쳐다보니 급히 움직일 수 있는 소선(小船) 몇 척만이 떠있을 뿐이었다.

"총통 몇 발만 쏘면 감히 쫓아오지 못할 것이오이다."

이자원의 말에 구굉이 허락했다.

곧 후미의 배들이 현자총통을 한 발씩 쏘자 소선들은 과연 황급히 포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문룡이 있을 적에 명군의 군기가 엄정하지 못해 폐단이 많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그나마 있던 정병도 모두 공유덕·경중명·상가희 등이 끌고 청으로 넘어갔으니 남아있는 자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군."

구굉이 혀를 차며 말했다.

"대국 본토의 군사도 저렇지는 않기를 바랄 뿐일세."

===

"기어이 조선 놈들을 놓쳤단 말이냐?"

심세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했다.

"총병 대인, 그것이······."

"시끄럽다! 전부 나가거라!"

무언가 변명을 시작하려던 부하에게 심세괴가 외쳤다.

홀로 남은 심세괴는 울분이 치솟았다.

"젠장, 젠장!"

따지고 보면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꾸민건 아니다. 그냥 만약을 대비해 마부타를 만난 것 뿐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황제에게 알려진다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반역 혐의로 규정할 것이다.

이 상황까지 몰린 지금 심세괴에게는 한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소이다, 총병 대인."

"그래, 어서 오시오."

마부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안절부절 못하던 심세괴는 본론부터 꺼냈다.

"내가 당장 군사를 일으키면 청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소?"

"······?"

갑작스런 심세괴의 말에 마부타가 입을 벌렸다.

"그 말은 우리 대청에 귀부하겠다는 뜻이오이까?"

"그렇소."

하지만 마부타로서는 답을 줄 수 없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혼란스러운 청의 정세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도를 흔들어보라'는 것 뿐이었다.

'애초에 대릉하의 명군과 몽골, 봄보고르의 반군까지 대처하려면 하늘에서 병력이 떨어져도 모자란 판인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모두 본토로 건너오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런다면 청의 병력 부족도 해소되고 일석이조일 터.

하지만 심세괴는 마부타를 노려보았다.

'그리로 가면 허울 좋은 왕작이나 받고 세력이 흡수당할지도 모르는 노릇. 차라리 여기 가도에서 버티는 것만 못하다.'

"내가 청의 한 팔이 되어서 조선의 서북을 점거하면 대업을 능히 거들 수 있을 터. 어찌 약간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오?"

지금 청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 마부타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심세괴는 침묵을 동의의 뜻이라 여겼는지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나의 뜻을 들으면 반드시 그 이로움을 아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귀국 조정에 말을 전해주기만 하시오."

심세괴가 이렇게 나오자 마부타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다. 충절을 지키려는 뜻을 하늘이 막아 세우니 남은 길은 끝까지 가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마부타의 곤란을 알아채지 못하고 심세괴는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

조선 사행선들은 황해와 발해(渤海)에 펼쳐진 여러 섬들을 경유하여 상륙지인 영원위(寧遠衛)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부터 육로로 북경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본래라면 영원성에서 며칠간 머물며 여독을 풀어야 했지만, 지금 책봉주청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총병(總兵) 조환(趙宦)에게 심세괴의 역모 사실을 알리고 하룻밤 유숙한 뒤에 사신단은 곧장 북경을 향했다.

"좌도독 조대수(祖大壽)가 금주에 있어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

구굉이 말했다.

"이 참에 적을 공략하려 하는 것이 아니겠사오이까."

병자호란이 청의 참패로 끝나지 않았던 원래 역사에서도 조대수는 청의 빈 집을 노리려 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정녕 사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상황으로선 그런 뜻을 품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청이 패했다 하나 그래도 요동을 진동시킨 위세가 있을 터인데 좌도독이 이길 수 있으리라 보는가?"

"어렵겠지요."

공격과 방어는 다르다.

조선도 명도 수비전에서는 승리한 적이 있어도 공격에 나서 다시 청에게서 영토를 빼앗아오지는 못했다.

'금주는 몽골과 접한 도시로 녹용과 초피 따위의 거래가 번성했으니 차라리 몽골과의 연계를 점차 강화시켜나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몽골의 정세도 곧 혼란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조대수가 이기든 지든 청의 한 자락을 붙잡고 늘어져준다면 조선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명이 당장 망해 청이 입관해버리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는 이상, 이자원이 알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길을 바삐 걸었던 덕인지 사신단은 영원위에 도착한지 불과 보름만에 북경에 다다랐다.

조선 사신이 머무르는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에는 불이 환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비어있어야 할 터였지만 선객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보다 반 년 쯤 앞서 동지사(冬至使)로 보내진 서장관 이만영(李晩榮)이 상복을 입고 일행을 맞았다.

주청사가 들어오기 전 북경에 먼저 사람을 보내 인조의 훙서를 알렸던 까닭이다.

울음을 터뜨렸던 탓인지 이만영의 눈가가 벌갰다.

"본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흉변을 당한 터에 소관들은 북경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으니 면목이 없사오이다."

"어찌 자네들 잘못이겠는가. 그 뒤 전쟁은 크게 이겼으니 이 또한 돌아가신 선대왕께서 굽어살피신 것이 아니겠나. 자책을 그만두시게."

인조가 살아서는 못이긴 전쟁을 죽어서야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는 얘기였으니 신빙성이 없었지만 이자원은 굳이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정사는 어디 있는가?"

"안에 계실 것이오이다."

구굉과 이만영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듯 방문이 열렸다.

이자원은 거기서 나온 남자를 눈으로 살폈다.

차분한 인상의 중년이다.

이만영처럼 눈이 벌개졌긴 하지만 감정이 과해보이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가 책봉주청사 일행을 보며 입을 열었다.

"동지 정사 김육(金堉)이 주청사 분들을 뵈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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