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맹호출림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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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사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가?"
사신단의 실무를 맡은 서장관(書狀官) 윤선도가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이자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남인(南人)으로 한때 세자시강원에 있으면서 금상을 가르치기도 한 인물이다.
원래 역사에서라면 인조의 항복에 충격을 받아 은거해야 했지만, 그런 것은 이미 뒤틀려버린지 오래인지라 책봉주청사의 서장관에 보임받아 사행길에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훗날의 보길도는 그의 이름을 딴 관광지를 잃은 셈이나,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이자원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아, 혹시 석다산(石多山)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윤선도의 말에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환도의 존재감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요동이 후금에 의해 함몰된 후 육로로 명과 통할 수 없게 된 조선은 사신단을 평안도까지 올려보내 그곳에서 바다로 북경까지 향하게 했다.
원래 출항지는 대동강이었으나, 수로가 험하여 불만이 거듭 제기된 끝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석다산 근처에서 배를 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식으로 따지면 평안남도 증산군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자원은 딱히 생각지 못한 해프닝을 맞닥뜨렸다.
고을 관아에서 유숙하고 있던 책봉주청사 일행에게 대뜸 촌로(村老) 여럿이 찾아온 것이다.
'도성에서 오신 양반님들 중에 이번에 청천강에서 오랑캐를 쳐부순 이자원 장군님을 아시는 분이 계신지요?'
'내가 이자원이다만, 무슨 일이냐?'
이런 곳에 사는 노인네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보다 뜬금없이 찾는 이유가 궁금해진 이자원이 물었다.
놀란 촌로들이 서로 무어라 쑥덕대더니 말했다.
'장군님이 친히 이곳 석다산에 거동하시다니 이 또한 하늘의 뜻입니다. 부디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더니 대뜸 촌로들이 환도 한 자루를 공손히 내미는 것이 아닌가.
'칼? 왜 나에게 칼을 바치는 것이냐?'
'석다산은 옛날 을지문덕 장군께서 나신 곳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을 산신(山神)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데, 장군님께서 살수에서 오랑캐를 쓸어버렸다 하시니 그 분이 다시 세상에 나신 것이 아닐까 싶어 놀라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이 고을 야장(冶匠)들이 깊이 의논하여 장군께 바치기로 하고 칼 한 자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청천강 전투의 총지휘관은 유림과 홍명구였으나, 가장 많은 수급을 취한 것은 이자원의 별동대였던 탓에 그런 소문이 난 듯 했다.
촌로들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으나 자신의 전생이 딱히 을지문덕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는 이자원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만 마침 칼이 낡았으니 잘됐다는, 실용적인 감상만 들 뿐이다.
그래서 굳이 사양하지 않고 환도를 받아 들어 뽑아보니 과연 잘 벼려진 명검이었다.
'······.'
그러나 칼에 새겨진 검명(劍名)을 본 이자원은 잠시 굳고 말았다.
'이것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고 있는가?'
'고을 양반님께 관련된 구절 하나 가르쳐달라 부탁을 드려 얻어온 글자인지라, 송구하옵게도 소인들은 모르옵니다.'
관련된 구절이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고, 드러난 뜻만 놓고 보면 좋기는 했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헤아리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노라.
'······이거 그냥 비꼬는거잖아.'
바로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에서 나온 구절이었다.
하지만 그냥 좋은 뜻이라 생각하고 새긴 야장들을 경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이자원은 그냥 아무말없이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옆에서 싱글거리며 구경하던 윤선도의 표정을 못본체하며 말이다.
"이 종사관의 명성이 서북을 진동시킨게 분명하군. 그러니 이런 명검도 다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출항한 이래로 윤선도는 이를 두고 계속 은근히 놀려댔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친해지려는 뜻임을 알기에 가만히 놔두었지만 말이다.
"흔히 평안도 사람들을 두고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 일컫는데, 그에 맞게 과연 사나운 검이올시다."
이자원은 환도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그 칼을 쓸 일이야 많겠지만, 부디 이번 사행에선 뽑아들 일이 없도록 하시게. 그렇지 않아도 가도 동강진(東江鎭)이 멀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해 죽겠거든."
윤선도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자원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
보통 명나라로 가는 사행선의 숫자는 5척 정도다.
하지만 갑사창에서 대거 투항했던 쿠툴러들을 속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배가 필요했는데, 갑자기 수십 척을 보내기에도 서로 부담인지라 우선 명에 1차적으로 사실을 고할 70여 명만 태워 2척 정도만 추가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7척의 사행선이 가도에 닿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도는 별로 오고 싶지 않은데 말이외다······."
부사(副使) 윤휘(尹暉)의 말에 정사(正使) 구굉(具宏)이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발해(勃海)를 지나다 표류하는 일이 드물지 않으니 뱃길이 밝지 않은 우리로서는 가도의 안내를 반드시 받아야 하오. 다만 문제는,"
그러면서 구굉이 이자원을 바라보았다.
"종사관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도에서 힘으로라도 위해를 가하려 들 가능성이 있소."
이자원은 딱히 송구하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조정에서도 다 감안하고 그를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가도에서 우리 주청사의 인선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사오이다. 심 총병과 만나는 분들도 여기 계신 삼사(三使) 뿐. 나머지는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고, 식수만 보충하고 길잡이를 빠르게 구해 떠나면 될 일입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가도와의 접촉을 피한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강진으로부터 사람이 왔습니다!"
아랫사람의 보고에 구굉이 물었다.
"누구라 하더냐?"
"심 총병 밑에 있는 독보(獨步)라는 중이라고 하오이다."
명나라 관리도 아니고 승려라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구굉에게 이자원이 속삭였다.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독보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명 사이에서 비공식적 외교활동을 수행하던 승려였다.
이자원과는 악연이라면 악연이었으니, 임경업에게 그의 신병을 넘기라는 심세괴의 명을 전달했다고 들었다.
"자네는 자리를 좀 비켜야겠네."
이자원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서 좋을게 없었다.
그는 별 말 없이 자리를 비켰다. 그러나 삼사와 독보가 나누는 이야기는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행선의 구조상 벽이 나무로 된지라 소리가 잘 샜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게. 심 총병이 보낸 사람이라고?"
벽 너머로 구굉의 인사가 들려왔다. 독보는 합장으로 답례했는지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최근 가도와 조선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지요."
독보의 말에 구굉이 답했다.
"맞네. 그렇지만 조만간 해결이 될걸세. 심 총병이 언제 만나자고 하던가?"
"참으로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소승은 사실 심 총병이 보내서 온게 아니오이다."
독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구굉과 윤휘, 윤선도는 모두 당황했다.
"심 총병은 삼사 어른들을 지금 별로 만나지 싶어하지 않습니다."
"뭐라? 어째서?"
가도에 들른 김에 사신과 총병이 접견해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지금 사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말인가?"
윤휘가 물었다.
그러나 독보는 그것을 부정했다.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올시다."
"허면?"
"지금 동강진에 청나라 사람들이 와있습니다."
"······!"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구굉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는 말은 설마!"
"맞습니다."
독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 총병이 반역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심세괴가 반란을?'
이자원은 표정을 굳혔다.
원래 역사의 동강진 전투에서 그는 그래도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역할 뜻을 품었다는 것은······
"혹시 대국에서 심세괴의 처분이 결정된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이 어찌될지 추이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겠지요. 언제든지 저쪽에 투항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런!"
숭정제에게 패장은 곧 숙청 대상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 때문에 송산-금주 전투에서 패한 홍승주도 청에 투항해버린게 아닌가.
청천강에서 대패한 심세괴 또한 목숨이 위험해질 위기에 처했으니 청에 붙어버릴 생각을 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을 수는 있어도, 그 나라에게 배신을 당해 죽는 것은 싫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그대는 심세괴와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겠지?"
"소승(小僧)은 오로지 대국과 조선에 충심을 품은 사람입니다. 심 총병이 소승을 제법 신뢰하고 있긴 하나 감히 하늘을 거스르는 일에 가담할 수는 없지요."
독보가 말했다.
"심세괴가 우리를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오이다. 어서 채비를 마치고 떠나 빨리 대국 조정에 이 사실을 고해야 하오이다."
부사 윤휘가 그리 말하자 구굉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금쯤 심 총병도 소승이 이리로 온 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시지요."
독보의 말에 삼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심 총병의 협조를 얻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리 여염의 길잡이를 수배해두라 일러두기는 했소. 하지만 그를 데리고 오려면 사람을 보내야 할 터인데······."
"소관이 가겠사오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방으로 들어온 이자원이었다.
"자네는 몸을 숨겨야할 때가 아닌가?"
"이미 심세괴가 얘기가 샜음을 알아챈다면, 소관이 있건 없건 위해를 가해올 것이오이다. 그럴 바에야 소관이 빨리 가서 길잡이를 데려오겠사오이다. 그를 아는 사람만 붙여 주십시오."
독보는 이자원의 얼굴을 알지 못했지만 나누는 얘기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심 총병이 파총을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잡히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이 종사관은 대국에 정황을 소명해야 하는 임무가 있지 않은가? 그대를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는 없네."
그러나 이자원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미 심세괴는 반역을 재기 위해 청인들을 불러들인 것만으로도 끝장입니다. 그러니 소관보다는 저 승려의 증언이 더 중요할 터.
바닷길을 아는 사람이 없으면 무작정 배를 띄웠다 난파하기가 십상인데, 지금 사행단에 명군을 뚫고 길잡이를 데려올 수 있는 무관이 소관 말고 있사오이까?"
구굉은 고민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심세괴가 정말 여차하면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부디 보중하시게."
===
"독보가 조선 사행단에게 간 것 같다고?"
심세괴가 대노해서 외쳤다.
청에서 온 마부타와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나서 불공을 드리기 위해 독보를 찾은 직후였다.
"분명 조선 쪽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라 명하지 않았느냐!"
심세괴도 대놓고 명에 반역할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접근해온 것은 청 쪽.
청은 심세괴에게 공유덕과 경중명, 상가희가 받았던 왕작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쪽도 뭔가 정세가 혼란스러워보여 여지만 열어두고 있는 상태였다.
'우선 조정에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살펴가며 대응하려 했건만······.'
이러면 빼도 박도 못하고 역적이 될 판 아닌가.
"빌어먹을······!"
심세괴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빨리 병사들과 수군을 풀어라! 조선 놈들이 섬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그 뒤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대로 저들을 북경까지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했다.
상관의 채근에 동강진의 명군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은 배에서 나온 이자원과 조선군에게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