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분기점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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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왕정(十王亭)이란 대정전 앞의 광장에 양편으로 늘어서있는 건물들을 말한다.
홍타이지가 살아있을 때야 심양궁 중원의 숭정전이 청의 정사를 주관하는 핵심 건물이었지만, 어린 쇼서가 즉위한 뒤 모든 권세는 이곳 동원의 십왕정으로 옮겨왔다.
좌우섭정왕의 대립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동쪽에는 좌익왕정과 정황기정, 양황기정, 정람기정, 양람기정이 있고, 서쪽에는 우익왕정과 정백기정, 양백기정, 정홍기정, 양홍기정이 있었다.
당연히 섭정이 시작된 첫날부터 좌섭정왕 호거의 편은 좌익왕정에서만 모이고, 우섭정왕 도르곤의 편은 우익왕정에서만 모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호거의 편이나, 그럼에도 호거의 말에 대놓고 찬성을 하고 나서는 이는 적었다.
아민을 사면하자니.
호거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좌섭정왕, 아민은 죄인입니다."
지르갈랑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 말처럼 홍타이지의 사촌형 아민은 정묘호란 당시 조선에서 철군하려 하지 않고 자립을 꿈꾸었다는 이유로 유배에 처해졌다.
"나도 알고 있소, 정친왕. 하지만 한께서 흉험한 일을 당한 이때에 대사령(大赦令)을 내어 덕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보이오."
'좌섭정왕, 설마······.'
지르갈랑이 진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가 아민의 사면을 반대하는 것은 단순히 아민의 죄가 중하기 때문이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지르갈랑이 쥐고 있는 양람기(鑲藍旗)는 본래 형인 아민의 것.
그가 홍타이지에게 숙청당한 뒤 지르갈랑이 계승받은 셈인데 여기서 아민이 복권된다면 과연 양람기의 소유권은 누구에게로 가야하는가.
'내가 좌섭정왕을 미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이러는 것인가?'
이를테면 정치적 보복인 셈이다.
"좌섭정왕, 아민은 위험한 자입니다. 그렇기에 선제께서도 끝내 그를 내치신게 아닙니까?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지르갈랑은 호거에게 매달렸다.
정 안되면 우섭정왕 도르곤에게 부탁해야겠지만, 도르곤이라고 그의 편을 들어줄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한을 옹립할 때 간을 보던 것이 패착으로 돌아온 지르갈랑이었다.
"소왕(小王)은 오로지 영명한 좌섭정왕만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드리는 충언이니 모쪼록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지르갈랑이 납작 엎드리자 호거는 그제야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정친왕께서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왜 모를까. 하지만 이미 모든 날개가 꺾여버린 그 자가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겠소?"
"하오시면······."
"나도 아민에게 양람기를 돌려줄 생각 따위는 없소. 다만 새로 즉위하신 한의 덕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는 것 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오."
호거가 짐짓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민이 풀려나는 이상 언제든지 그에게 양람기를 돌려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지.'
다시 말해 호거는 지르갈랑의 기강을 잡기 위해 이런 수를 두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도르곤과의 정쟁에서도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 곤란하니 말이다.
"······섭정왕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지르갈랑은 영 찜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귀한 분이 여기에 배석을 해주셨소."
호거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범 대학사(大學士). 분명 그대를 청하긴 했지만 국사는 우섭정왕의 소관이니 분명 그에게 먼저 가리라 생각했소."
범문정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좌섭정왕께 먼저 말씀드릴 일이 있어 오게 되었습니다. 곧 우섭정왕 전하도 찾아뵐 것입니다."
그의 말에 호거가 끙, 하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몽골 문제입니다."
범문정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몽골은 내각 하의 몽고아문(蒙古衙門)이 관리하고 있는게 아니었소? 어찌 내게 와서 말하는 것이오?"
"좌섭정왕, 지금 즉시 차하르 친왕을 묵던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범문정의 말에 호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차하르 친왕을 끌고 오다니? 어째서?"
"아직 몽골까지는 한의 붕어 소식이 닿지 않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반적들 손에 차하르 친왕이 넘어가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북원 최후의 대칸 콩고르 에제이는 아버지 릭단 칸의 사망 이후 세력이 기울자 쿠빌라이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옥새, 제결지보를 홍타이지에게 바치고 투항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차하르 친왕에 봉해져 청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여전히 몽골 차하르부에 남아 있었다.
몽골의 부활을 기도하는 세력에 있어 에제이 칸의 신병을 손에 넣는 것보다 강력한 명분은 없었다.
"선제께서는 차하르 친왕의 장인이시기도 하니, 조문하라는 핑계로 데려오면 되겠지."
범문정의 말을 들은 호거가 말했다.
"아니, 한께서 붕어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됩니다. 태종의 명령으로 꾸며서라도 은밀히 데려와야지요."
에제이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하나 본인이 야심을 품고 있지 않으리란 법 또한 없다.
당장 홍타이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 세력을 키우면 어떡하나?
하지만 범문정의 대책에 따라 움직이기도 전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전하, 외번몽고군이 우리 군에 합류하지 않고 몽골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옵니다!"
===
"조선 놈들이 외번몽고군을 풀어줬다······!"
청천강 전투에서 투항했던 외번몽고군은 대부분 풀려났다. 그들은 청나라의 중심지인 요심(遼瀋) 일대를 우회해 동만주를 통해 몽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면 한께서 붕어하셨다는 사실이 전부 다 퍼졌을게 아닌가?"
그간 혼란을 막기 위해 홍타이지의 죽음은 최대한 공표를 늦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면 외번몽고군이 지나가는 지역에서 대부분의 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게 뻔했다.
비단 몽골 뿐만 아니라 청에 아직까지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동해여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병력을 보내서 놈들을 박살내야 합니다! 명령도 듣지 않고 우리에게 사전통보 하나 없었다면 이는 반란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호거가 옥좌에 앉은 어린 황제에게 말했다.
그러나 별로 공손한 태도가 아닌데다, 실제로는 우섭정왕인 도르곤에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병권을 쥐고 있다 하나 아직 적이라고 공식적으로 결정되지도 않은 자들을 함부로 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이런 요식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저들이 돌아가는 길에 라파를 약탈했으니 확실히 반역이라 봐도 무방하겠지요."
의외로 도르곤도 순순히 인정했다.
라파는 현 길림성 교하시 일대에 세워진 만주족 도시다.
조선이 외번몽고군을 돌려보내며 친절하게 식량까지 챙겨줬을리도 없으니 라파를 털어 군량을 보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던 호거는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정보 계통이 아주 따로 노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각 기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외번몽고군을 토벌하겠소. 최소한 5천은 필요할 것이오."
"좌섭정왕, 조선에서의 패전 때문에 병력 동원이 여의치 않소. 외번몽고군도 전쟁에서 만만찮게 소모되었으니 팔기 모두에서 3천 정도만 뽑아 보내면 될 것이오."
"병권은 본왕의 소관이오! 우섭정왕은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오?"
호거가 소리치자 도르곤이 맞받았다.
"정백기와 양백기는 지치고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그 이상은 낼 수 없소. 원한다면 그대 휘하의 상삼기에서 병력을 더 뽑아 데려가시오."
도르곤이 판단하기에는 그 정도 병력으로도 충분했다.
호거가 병권을 내세워 더 많은 병력을 휘두른다면 그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호거와 도르곤의 언쟁이 계속되었지만 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백부왕 다이샨은 사실상 반 은퇴 상태였고, 유일하게 둘보다 지위가 높은 강덕제 쇼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범문정은 그 모습을 보고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명의 조대수(祖大壽)가 대릉하성에서 나올 준비를 한다는 말도 들리고 있소. 그런 판에 외번몽고군 토벌에 많은 병력을 돌릴 수 없소이다!"
"명군이야 수만 많은 잡졸들. 외번몽고군이 그대로 제 부족에 돌아가면 즉각 행동에 나설텐데 그때가면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오!"
호거와 도르곤 휘하의 친왕과 군왕, 구사 어전들까지 편을 나눠 다투었다.
'저 생각 짧은 숙친왕에게 섭정왕 자리를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언제든지 황위를 노릴 수 있는 자.
도르곤은 그렇기에 호거를 견제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청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호거를 쳐내야 한다.'
도르곤의 그런 생각이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폐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도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대신 대답했다. 그의 무의식 속에서도 질린 표정으로 어른들의 입씨름을 지켜보는 황제는 아예 제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들려온 말에 아무도 그에 대해 트집을 잡지 못했다.
"솔론 수령 봄보고르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 라고······?"
솔론은 흑룡강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의 한 일파다.
청나라에게 복속되긴 했지만 에벤키계에 가까운 탓에 생활 양식과 언어에서 차이가 있었고, 이들 건주여진과는 이질성이 강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대릉하에서 준동하는 명군과 몽골,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솔론까지.
얼이 빠진 친왕들 틈에서,
도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쓸었다.
===
"드디어 그 홍타이지가 죽었다지?"
솔론의 수령 봄보고르(博穆博果爾)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그 무서운 한이 조선에서 죽을 줄은 어떻게 알았겠나이까?"
부하들의 맞장구에 봄보고르가 짐짓 호탕하게 말했다.
"한인(漢人)들이 천명(天命), 천명하는 것이 실제로 있는가 보아. 한때는 온 만주와 몽골을 다 일통하고 천하를 쥘 줄 알았던 한이 조선에서 처참하게 패해 죽다니."
외번몽고군이 지나가며 흘린 홍타이지의 사망 소식은 얼마 되지 않아 만주 전역으로 퍼졌다.
과중한 세공에 시달리던 동해여진들은 이 참에 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봄보고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한번 칼을 빼어들자 자신이 이끄는 솔론 부족 외에도 북만주의 여러 부족들이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불어나는 세력을 본 봄보고르는 지체없이 남하했다.
'아니, 이제 천명을 이어받은 것은 바로 내가 아니겠느냐. 바로 이 상경(上京)이 내 손 안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금나라의 옛 도읍인 상경 회령부는 이 시대에는 비록 쇠락했으나 그 성벽만은 남아 있었다.
사실상 상경이라기보단 그 터라 불러야 할 정도요, 지키는 이도 없는 성이었지만 봄보고르가 그것에 가지는 의미는 대단했다.
"맞습니다!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한 명분이 조선을 정벌했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산산히 깨어졌으니 그 아들들이라 한들 무슨 염치로 황제를 자처하겠습니까?"
"그들은 이제 만주의 한조차 아닙니다!"
"한이 되십시오!"
봄보고르는 그렇게 권하는 부하들과, 자신에게 가담한 부족장들을 보며 웃음지었다.
'그래. 완안의 아골타도, 건주의 누르하치도 처음 이렇게 나라를 세웠을 것이다. 나라고 한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생각을 마친 봄보고르는 외쳤다.
"사하랸 우라(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 흑룡강)에 거주하는 모든 부족의 뜻이 나에게로 향하니 어찌 거절하겠는고! 나는 한이 되겠다!"
그리고는 당당히 선언했다.
"이곳 상경에 금나라를 부활시킬 것이다!"
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