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분기점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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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이 조선을 떠날 즈음.
청나라에서는 귀환한 장병들을 재편하고 홍타이지의 상을 치르는 일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아직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빌어먹을!"
숙친왕(肅親王) 호거가 소리쳤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의 그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정람기(正蓝旗)의 구사 어전인 교로 설어가 나섰다.
"기주, 기주! 진정하십시오! 아직 일이 다 끝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숙친왕 전하. 고정하십시오."
교로 설어와 함께 두 황기(黃旗)의 구사 어전들도 진정시키려 말했다. 호거는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생각하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호거가 입은 것은 흰 비단으로 지은 옷.
죽은 아버지 홍타이지의 상을 치르기 위해 입은 상복이었다.
"왜 아직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인가?"
호거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압록강을 넘어 심양으로 돌아온지도 여러 날.
홍타이지의 시신은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에 봉안되고 여러 신하들은 그 앞에서 3일간 곡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주군에 대한 추모보다도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미래 권력의 향방이다.
대청의 후계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 누구라도 보위를 이을 수 있다는 말.
다만 지금의 구도는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도르곤과 장남인 호거로 좁혀져 가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들 정황기, 양황기, 정람기의 상삼기(上三旗)는 호거에게 붙은 상태였다.
'한께서 돌아가신 이상 우리를 비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숙친왕 밖에 없다.'
원래라면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 훗날의 효장문황후 붐부타이(布木布泰)와 결탁해 그녀의 아들을 황위에 올렸을 황기 무장들이었지만 정작 지금 그 아이, 아이신기오로 푸린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붐부타이는 아들 하나 낳지 못한 일개 측비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아무리 호거가 성질이 급하고 생각이 짧아 보인다 해도 말이다.
"정친왕(鄭親王)은 왜 이리 꾸물럭거리는 것이냐? 원래 나를 지지하기로 하지 않았나?"
호거가 짜증을 내는 대상은 정친왕 지르갈랑(濟爾哈朗)이다.
누르하치에게 숙청당한 그 동생 슈르가치의 아들로, 호거에게는 오촌 당숙이 된다.
이미 상삼기가 호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므로 양람기를 관장하는 그가 합류하기만 하면 단숨에 8기 중 4기를 확보하는 셈.
호거의 눈 앞에 황위가 아른거렸다.
그러나 지르갈랑은 알겠다 대답은 해놓고 영 소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자가 혹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양람기 또한 조선과의 전쟁에 차출된 것은 사실.
그러나 기주인 지르갈랑이 심양 방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숫자는 다른 기들보다는 덜했다.
"몸값을 올리려는 심산이 아니겠습니까?"
측근인 양샨의 말에 호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한이 결정된 뒤엔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
그러더니 잠시 숙고하던 호거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지금 우리 상삼기로는 묵던을 장악할 수 없는가?"
"수, 숙친왕!"
정황기 구사 어전 아다이가 놀라 외쳤다.
또다른 정황기 구사 어전인 탄타이가 전쟁에 참여한 반면 그는 심양에 머물러 있던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홍타이지의 부음이 들려온 후 벌어진 심양의 혼란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청은 더 이상의 혼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전을 벌인다면 그것으로 나라는 끝장입니다."
"도르곤의 양백기, 거기에 더하면 도도의 정백기 정도일텐데 한의 친위인 상삼기가 그 정도도 상대할 수 없단 말인가?"
"싸움이 일어나면 예형친왕의 양홍기와 정홍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친왕조차 전하를 배신할지도 모릅니다."
아다이의 말에 호거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얼마든지 피를 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아다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마 확신하지 못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모두 황권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에게는 가차없이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다.
만약 도르곤과 호거, 둘 중 한 사람이 황위에 오른다면 다른 한 쪽은 처참하게 몰락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아는 두 사람이 칼을 뽑지 않을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다이샨 또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
'대청의 천명은 끝난 것인가.'
내각대학사 범문정(范文程)은 숭정전 앞에 양쪽으로 갈라서있는 친왕, 군왕, 버일러들을 보며 생각했다.
조선을 정벌하러 갔다가 한이 변을 당한 것만 해도 큰일인데, 빠르게 후계를 결정해 나라를 수습해야 할 판에 각자 한을 옹립하고자 두 패로 나뉘어 버렸으니 말이다.
'분명 천하를 평정하고 자금성을 차지하실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 조선 같은 작은 나라에서 명을 다하셨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오랑캐에 부역한다 손가락질했으나 범문정은 그 오랑캐야 말로 중원에도 없는 왕재(王材)라 믿었다. 그랬기에 거리낌없이 태조 누르하치와, 지금은 태종이란 묘호가 올라간 홍타이지를 섬겼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변방 선비의 헛된 꿈일 뿐이었던 것인가?
‘우리 같은 한족의 법도로는 장자가 보위에 오르는 것이 맞겠으나······ 이 나라에서는 그것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로구나.’
"우리는 태종의 아들이 황위에 오르지 않으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정황기와 양황기, 두 황기의 무장들은 호거와 무슨 작당을 했는지 그렇게 강력하게 외쳤다.
"한을 추대하는 것은 그리 간단히 처결할 문제가 아닐세."
다이샨은 준엄히 그들을 꾸짖었다.
조선에서 생긴 약점으로 인해 그 본인이 직접 황위에 오를 수는 없었으나, 그렇기에 그가 중재자 역할을 맡기에 적절했다.
"우리는 예친왕께서 한이 되시기를 원하오."
반면 아지거와 도도는 동복형제인 도르곤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지르갈랑은 소극적으로 호거의 편을 드는 모습이었으니, 결국 선택권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나 도르곤이 한이 된다 해도 호거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다이샨은 아버지 누르하치 대부터 이어온 이 나라가 내전으로 허망히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장 명나라가 요하 너머에 버티고 있고, 몽골은 복속되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진실로 원수가 되어버린 조선도 있다.
다이샨은 한숨을 크게 내뱉고는 말했다.
"좋소. 태종의 아들을 한으로 세웁시다."
그의 말에 도르곤 일파는 당황하고, 호거에게는 웃음이 감돌았다.
하지만 다이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에 종군한 이들은 모두 한을 보필하지 못하고 군세도 보전하지 못한 죄인이오. 적에게 치욕스런 사죄문까지 보냈으니 어찌 한에 적합하다 하겠소?"
범문정이 다이샨의 의도를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그럼 누구를 세우자는 말씀이십니까?"
뒤집힌 말 때문에 당황한 호거와 달리 도르곤이 차분히 물었다.
"태종의 차남과 3남은 모두 조졸(早卒)했고, 4남은 그 어미가 천하여 적합하지 않소.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하나 뿐."
다이샨은 천천히 말했다.
"본왕은 화석승택친왕(和碩承澤親王)을 한으로 세우자고 주장하는 바요."
다이샨이 주장한 자는 홍타이지의 5남 아이신기오로 쇼서(愛新覺羅 碩塞)다.
그는 측비 예허나라 씨 소생으로서 올해 아홉 살에 불과했다. 그러나 살아있는 홍타이지의 아들들 중에서는 가장 모친의 지위가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 만주족이 금나라 이후로 다시 하나가 되었다 하나 불과 수십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승택친왕의 어머니는 예허부 출신이니 혹시 모를 분열을 막기에 적합하지.'
"그대 황기 무장들은 이제 별다른 불만이 없겠지?"
이미 호거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 황기 무장들이었으나 당장 내세운 명분이 '태종과의 의리를 위해 그 아들을 세우자'는 것이었으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다이샨의 제안일 뿐.
호거와 도르곤이 대체 무엇을 보고 여기에 동의해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승택친왕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마땅히 섭정을 세워야 할 것이오. 나는 그 대임을 숙친왕과 예친왕이 맡아야 한다고 보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오?"
그래서 다이샨은 실권을 나누라는 것으로 호거와 도르곤을 설득했다.
'과연. 지금 싸우다 다 죽기 전에 이 정도로 만족하라는 뜻인가.'
도르곤이 다이샨을 지긋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때가 아닐 뿐.
"본왕 또한 예형친왕 전하의 말에 찬성합니다. 승택친왕이라면 한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좌중의 시선은 호거에게로 쏠렸다.
범문정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이샨의 2기에 도르곤 세력의 2기가 합세했으니 이미 팔기의 반이 이 제안에 넘어갔다.'
아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리라.
범문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호거는 한참을 주위를 노려보았다. 마치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마냥.
하지만 상삼기만으로 승기를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
"······본왕도 찬성하오."
결국 호거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불만이지만 실권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에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 것이다.
"본왕도 찬성하는 바요."
따라서 지르갈랑이 재빨리 말했다.
===
친왕과 군왕, 버일러와 버이서, 그 이하 신하들이 홍타이지에게 제를 올리고 후계가 결정되었음을 고하는 것으로 정쟁은 끝이 났다.
그리하여 화석승택친왕 아이신기오로 쇼서가 심양궁의 독공전(篤恭殿)에서 황위에 오르니, 곧 대청의 제3대 황제 강덕제(康德帝)이다.
연호를 강덕이라 한 것은 다분히 아버지 숭덕제(崇德帝) 홍타이지의 위세를 빌리려는 의도였다.
이자원이 들었다면 실소를 감추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본래라면 역사에 별달리 큰 행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소년은 한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정치적 타협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존재가 삭제된 동생, 순치제 푸린과 비슷한 처지였지만 그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보르지긴씨라는 외척이 존재하는데다 황기무장들의 지지를 받던 푸린과 달리, 쇼서에게는 아무런 친위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당장의 내전을 막기 위해 옹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실권 또한 그의 손에 있지 않았다.
"예형친왕 다이샨을 황백부왕(皇伯父王)으로 높여 예우한다. 아울러 숙친왕 호거를 좌섭정왕(左攝政王)에 삼아 병권을 맡기고, 예친왕 도르곤을 우섭정왕(右攝政王)에 삼아 국사를 맡긴다."
다이샨은 적당히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나며 명목상이나마 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지켰다.
호거와 도르곤은 각자 실권을 나누어 가졌다.
내전없이 계승이 마무리된 셈이었지만, 범문정이 보기에는 너무나 아슬아슬한 균형이었다.
'실질적으로 대청의 머리가 둘이 된 셈이다. 당면한 문제가 만만찮은데 이를 어찌 손볼지.'
각자 관할이 나누어졌다 하나 두 사람 다 그것만으로 만족할리는 없었다.
특히 군사국가인 청의 경우 팔기 그 자체가 행정단위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호거는 얼마든지 병권을 핑계대며 국사에 개입하려 들 수 있었다.
역시나 범문정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조차도 놀랄 정도로 과감하게 움직인 것이다.
“아민(阿敏)을 사면하려 하오.”
그것이 좌섭정왕이 된 호거가 꺼낸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