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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30화 (30/213)

〈 30화 〉 분기점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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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의 지휘는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의 3사가 맡는다.

이자원은 정확히 말하자면 책봉 주청이라는 주 목적보다는 가도라는 불안 요소를 해결하기 위해 가는 쪽이었기에, 3사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가 맡은 것은 사행의 종사관이었다.

대개 서장관과 종사관 중 하나만 파견되지만 1607년 일본에 보낸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에서와 같이 서장관과 종사관이 같이 파견된 경우도 있으니 이자원도 종사관이 된 것이다.

"이번 사행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가신다 들었습니다."

"소식이 빠르군."

이자원이 작설차(雀舌茶)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어린 찻잎을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려(九蒸九曝) 우려낸 차다. 전생에선 상관이 괜히 젠체하며 차 자랑을 하는 통에 몇번 마셔본 적이 있었다.

들어가는 품도 품이거니와, 향기를 맡아보니 잎 자체가 여간 고급이 아니다. 제법 비싼 물건임이 분명한데도 눈 앞의 청년은 딱히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이것을 내왔다.

하기야, 그의 집안의 재력을 감안하면 고급차 정도로 쩔쩔매는 것이 더 이상한 터이지만.

"명나라에서 사온 물건인데 어찌 나리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청주와 요리가 나았을지요?"

"딱히 상관없다."

장현의 말에 이자원이 말했다.

너 같은 무부가 차 맛을 알긴 하느냐고 은근히 비꼬는 의도가 숨어있다면 과한 해석일까.

"아직 역과 입격도 하지 못한 제가 나리를 맞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버님께서는 잠시 출타 중이신지라."

이제는 아버지인 장경인(張敬仁)도 없단다. 그가 역관으로서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거물이라 해도 이자원도 품계로만 따지면 종4품의 관리.

나이로는 비슷해도 장현이 맞는 것은 결례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초청해놓고 말이다.

'아직 어리군.'

눈빛을 숨기는데 익숙하지 않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반응을 한번 보겠다는 식으로 달려들면, 이쪽이 싫어도 알아차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떠보기는 그만하지."

"······!"

이자원이 그저 담담하게 말하자 장현의 표정이 변한다.

그가 은근히 다른 사람의 신경을 긁을 때 보이는 반응은 대개 두 가지였다.

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본 부(富)에 눌려 쩔쩔매거나, 아니면 벌컥 성을 내는 것.

전자라면 그대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버리고, 후자라 해도 머리 한번 숙여주면서 달래면 금방 스스로 민망함을 느끼고 만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말려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물론 조정의 고관들에게는 감히 쓸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장현은 이런 식으로 같은 역관의 자제들이나 유생들, 시전의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상대하는 이들로부터 능수능란하게 주도권을 잡아채왔다.

그러나 이 무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 말하지 않는가.

"떠보기라니요? 혹 아버님께서 계시지 않아 그리 느끼셨다면······."

허나 그것을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다. 장현이 급히 말을 이을 때, 이자원이 가로막았다.

"자네 춘부장(春府丈)이 계시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 애초에 자네가 만든 자리니까."

초대는 장경인의 이름으로 날아왔지만 그 뒤에 있는 것은 장현이다.

이자원은 그렇게 확신했다. 갑사창 전투부터 본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일테니까.

"그러니 빨리 본론을 꺼내지."

이자원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장현은 그 속에 숨겨진 불쾌한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화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자원의 심기를 더 거스르는 것은 좋지 않다.

장현에게는 그런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인 같은 역관들은 중인(中人)이니 높은 관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오로지 치부(致富)만이 목적입니다."

제법 솔직한 말이었다. 누구든 알고 있는 얘기였지만 말이다.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이미 성공했군."

이자원의 말에 장현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너무 많아 더이상 돈벌 필요가 없는 부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재물은 가만히 손을 놓고 있다면 언제고 허물어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는 뜻.

이자원은 어째서 이 청년이 역사에 국중거부(國中巨富)라는 이름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역관은 무역으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력 연간 이래로 요동의 정세가 불안하니 자연히 사행로가 어려워지므로 이문 또한 줄어들었지요."

"그래서 조정에서 지참할 수 있는 인삼의 상한을 팔포(八包)로 늘렸지 않은가?"

사행에 따르는 여비는 참여자 개인이 지참해야 한다.

은자를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인삼을 들고 가 교역함으로써 비용을 충당했다.

팔포란 인삼을 10근씩 여덟 꾸러미를 묶은 것으로서, 종전의 10근에서 여덟 배나 늘어난 것이었다.

"맞습니다. 팔포제 덕분에 거래할 수 있는 인삼이 아주 많이 늘었으니, 오히려 이전보다 인삼에서만큼은 이문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인가?"

"바로 성행한 거래 그 자체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장현은 말했다.

"인삼은 그리 많이 나는 물건이 아닙니다. 족히 수 년 묵은 것이라야 약용으로 쓸만하지요. 그 덕에 귀한 대접을 받고 있으나, 증가한 인삼 무역 때문에 오히려 조선에서 인삼을 구하기가 서서히 힘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장현의 말은 타당했다. 숙종대에 가면 인삼이 너무 많이 수출되는 탓에 국내에는 약으로 쓸 인삼이 돌지 않는다는 상소까지 올라온다.

"그러면 어찌하자는 말인가? 다시 상한을 10근으로 낮추자는 뜻인가?"

그럴리는 없었다.

장사꾼은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장현은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장사꾼이다.

이자원은 그렇게 생각했고, 역시나 맞았다.

"설마 그런 바보같은 상소를 올리겠습니까. 소인이 생각하고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요. 파총 나리께서 이것을 조정에 고해주셨으면 하여 모신 것입니다."

"왜 나인가?"

누대에 걸쳐 역관을 해온 집안이니 정승이라 해도 안면을 트고 지낼 터다.

보통의 청탁 같으면 그리로 해도 될 터.

굳이 갑사창에서부터 일개 파총인 이자원을 따라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뭔가?"

이자원의 물음에 장현은 말했다.

"나리께서는 소인의 제안을 듣고 전하께 직접 고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에 계실 때, 금상께서 여러 번 불러 계책을 물어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하지만 아직 대답은 되지 않는군."

"둘째는 나리께서는 패도(霸道)적인 면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께 청탁을 해보았자 미심쩍어하며 들어주지 않으시겠지요."

도대체 어떤 방법이길래 이런 말까지 하는걸까.

이자원이 쳐다보자 장현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털어 놓았다.

"사람을 동원해 요동의 인삼을 캘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인삼의 밀채 문제는 그간 조선과 청(후금) 사이에서 상당히 뜨거운 감자였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인삼을 통한 명과의 호시 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웠고, 본격적으로 반기를 든 이후에도 인삼은 여전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또한 이 즈음에는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만주 일대의 인삼을 밀채하는 일이 잦았는데, 정묘호란 이후 후금에 저자세를 취하던 조선은 항의를 받고 밀채꾼들을 처형하는 등 관리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세가 많이 수그러든 상태였다.

"헌데 이제 청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지 않았습니까? 원수의 것을 취하는 셈이니 오히려 장려를 해야할 판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모아 국경을 건너겠다?"

이자원이 지긋이 쏘아보며 말하자 움찔하는 장현이다.

그러나 그는 곧 꿋꿋이 항변했다.

"사사로이는 이문을 취하고, 크게는 나라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나리께도 섭섭지 않게 후사(厚謝)하겠습니다."

장현은 밑에 부리는 이들이 이자원에 대해 물고 들어온 정보를 떠올렸다.

본가도 썩 잘사는 편은 아니고 또 지금은 얼마 안되는 녹봉만으로 생활하고 있어 빈한하다던가.

사흘 굶어 담 안 넘을 인간이 없다.

그것이 장현의 지론이었다.

"좋다."

'역시.'

장현은 속으로 웃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무관. 저 입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를 줘도 아깝지 않았다. 자신과 집안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돈을 벌테니까.

"이건 자네 집안만 주도하는 일인가?"

"그럴수도 있지만 동료 역관들과 함께 할 생각입니다."

역관들은 각각 혼맥과 사업 관계로 엮여있다.

그들을 따돌리고 이런 건을 혼자 먹어봤자 고립을 자처하는 것일 뿐.

'각자가 출자(出資)해서 인삼을 배분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다만 그 일은 여항이 아닌 조정에서 맡아야 할 것이다."

이자원의 말에 장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리도 똑같은 분이시군요. 물건이 들고 나는 것은 모두 관이 쥐고 처리해야 한다고 믿는······."

"요동이 넓고 사람은 적다지만 청군의 감시가 닿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럼 너희들은 밀채꾼들에게 무장을 시킬 것이고, 그건 사병이라 해도 할말이 없겠지. 정여립과 이몽학의 일을 떠올려 보아라."

하지만 장현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말씀 드리지요. 무슨무슨 감사, 병사하는 양반들이 북방군을 부려 인삼을 캔다면 그 1할만 한성까지 가도 다행일 것입니다. 차라리 소인 같은 사람들은 아랫사람에게 삯이라도 넉넉히 내릴 것이고, 교역을 통해 은자가 조선에 돌도록 할테지요."

이자원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려 한다는 생각에 날카로운 태도였다.

"생각이 얕구나."

"예?"

이자원의 말에 장현이 되물었다.

"인삼을 가로채는 것은 북방군이 아니라 다른 곳에 맡길 것이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요동의 인삼이 제대로 수급되지 않는다면 어찌할테냐?"

"그야······."

"그러나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이자원이 말했다.

"가삼(家蔘)을 재배하는 것이다."

"가삼, 이라니요."

"방법은 내가 알고 있다. 이 편이 너희들에게도 비용은 적고 이문은 많을 것이다."

장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자가 허튼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삼은 언제나 그 수가 모자라다. 만약 그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하, 하하. 역시 나리께선 배포가 크시군요. 되기만 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요.”

장현은 그러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사별하셨다 들었는데 혹 재혼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제 사촌누이가 제법 아리땁습니다. 원하신다면 숙부께 말을 넣어보지요."

사촌누이라면 종제 장형(張烱)의 누나일 것이다. 그럼 그 유명한 희빈 장씨의 고모일테니 아름답다는 것도 과언은 아닐 터.

하지만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몇번째일까.'

어차피 장현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것이나, 그저 쓰게 웃을 뿐이다.

===

이자원은 판옥선의 갑판에 서있었다.

드디어 명나라로 출발하는 길이었다.

장현과 나눈 대화는 이미 임금에게 전달하고 온 터였다.

청의 경제적 기반에 타격을 주자는 건이었으니 임금도 나름대로 좋은 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하께선 이 남만교(南蠻敎)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임금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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