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소용돌이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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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御命)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부름을 받아 입궐한 강석기는 임금이 사실상 중매를 서기로 한 것을 어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명이라 해도 달갑지 않은 것은 달갑지 않은 것이다.
"대감, 전하께서 무어라 하셨기에 안색이 밝지 않으신지요?"
그의 부인 신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강석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친히 중매를 서겠다 하시었소."
"중매를요?"
신씨가 눈을 크게 떴다.
슬하에 아직 시집장가 가지 않은 자식은 5남 문정(文井) 정도다.
그 아이가 올해 열다섯이니, 슬슬 혼처를 알아볼 때가 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국에 뜬금없이 임금이 중매를 서겠다니?
"도대체 어느 집안의 여식을 말씀하시었기에······?"
임금이 직접 나섰으니 필경 명문대가(名門大家)의 딸과 맺어주려는 것일텐데, 무엇이 대감의 마음에 들지 않는가 싶어 신씨가 슥 물어보았다.
"혼사는 문정이가 아니라 우리 딸을 두고 이르신 것이오."
강석기가 허탈하게 대답하자 부인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따, 딸이라니요? 우리 유주(瑜珠)란 말입니까?"
장녀는 이조좌랑 정양우의 아들 정태제(鄭泰齊)와 혼인했고, 차녀는 곧 지금의 중전이다.
그리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이 삼녀 유주.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임자가 없는 몸은 아니다.
“하오나 그 아이는 이미 정혼자가 있는데······ 어찌.”
전 진주목사 이소한의 아들 이홍상(李弘相)이 그 대상이다.
비록 집안 어른들끼리만 논의해 결정한 바라지만 아이들도 익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터인데 하루아침에 새로운 사람에게 시집을 가라는 말인가.
"사정이 생기면 혼사를 도로 무르는 일도 있는 법이지만······ 어떤 대갓집 자식이기에 있는 혼사까지 깨어야 한단 말입니까? 설마 셋째를 후궁으로라도 들이실 생각이시랍니까?"
그럴리야 없겠지만 신씨는 황당해서 그렇게라도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상대는 파총 이자원이라는 자요."
"예에?"
부인도 이자원의 이름은 들어보았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영웅이었으니 그 이름이 퍼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청주 황태극을 죽인 일과 전쟁에서 보인 활약상은 요즘 두셋만 모이면 나오는 단골 화제였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마나님이 듣기에는 흉흉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싸우는 모습을 보면 악귀나찰(惡鬼羅刹)이 따로 없다'
'키가 구척에 턱에는 주먹만한 혹이 두 개나 붙어있다더라'
'원래는 하늘의 신장(神將)이었는데 죄를 지어 그렇게 태어났다더라, 그렇지만 재주는 남아있어 싸움을 잘한다더라'
노복들이 나누는 허튼 소리가 분명했기에 단단히 주의를 준 터였지만, 지금 그녀의 귓가에는 그 말들이 살아나 떠돌고 있었다.
강석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자원이 전쟁의 영웅이요, 공신이라 하나 출신은 무반가의 천얼(賤孼)에 불과하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일단 지금으로선 청서가 이자원을 탄핵하는 입장이니 같은 도당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거절하지 못한 것은, 이미 그는 임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자원을 나의 칼로 쓸 것이오.'
조선의 지존인 그의 사위는, 전쟁 이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친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 혼사는 그를 끝까지 쓰겠다는 내 신뢰의 표시고, 실제로도 그리할 것이오. 그리되면 국구께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소?'
막내 사위로 맞으려는 자가 제아무리 헌앙한 선비라도 임금의 총신에 비하지는 못할테니까.
임금은 그렇게 말했다.
그 이유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임금이 생각하는 조정 내 세력 구도 개편과도 연관되어 있을지 않겠는가.
강석기는 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부인, 유주를 불러오시오."
"그 아이에게 말을 전하시겠다구요?"
"어찌할지 결정은 해야할게 아니오."
강석기의 말에 신씨는 마지못해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그녀와 함께 강석기의 삼녀가 들어섰다.
매사에 침착한 아이긴 했지만 이만한 이야기에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태연한 모습에 강석기는 조금 놀랐다.
"혼약을 깨는 일은 도리상 함부로 행해야할 바가 아니지만, 이번은 전하께서 명하셨으니 하는 수 없겠군요."
자초지종을 들은 딸의 말에 신씨가 울면서 가슴을 쳤다.
"그럼 이대로 너는 아홉 살이나 많은 천얼 무반의 재취(再娶)로 가겠다는 말이냐?"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병을 칭하는 수도 있다. 그렇게 주상 전하의 관심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연안 이씨 집안과 혼사를 이루면 되지 않겠느냐."
강석기의 말에 유주가 차분히 반론했다.
"오륜(五倫)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속일 수 없고, 신하가 임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고구려 평원왕의 딸도 한낱 비럭쟁이였던 온달을 모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만들었는데 그 출신이 대수이겠사옵니까."
"허면 너는 이 혼사에 찬성한다는 말이냐?"
강석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정작 유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 파총이란 분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랑캐를 베고 사직을 구한 영웅이라고요. 다만 진정한 영웅이라면 주상 전하의 뒤에 숨어 세파(世波)가 지나가기만 기다리지는 않겠지요."
"너도 그가 명군을 참한 일을 들은게로구나."
저자에도 슬슬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니 그녀의 형제들이 전해줬거나 노복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겠다 싶은 강석기였다.
가도 명군의 행패는 이곳 도성까지도 익히 알려져 있던지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자원의 행동을 칭송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청서는 명나라의 추궁을 두려워했다.
유주도 그것을 꼬집은 것이다.
'전하의 말씀으로는 대국의 사정을 보았을 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하셨지만······ 이 아이는 지금 이자원이 어떻게 행동할지 보고 싶어 하는 것인가.'
"네 말이 맞다."
강석기가 말했다.
"이자원도 일이 이렇게 될줄 모르고 모병들을 죽였겠느냐? 옳은 일을 했답시고 막연히 남의 보호만 바라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린다면 전쟁으로 얻은 명성이 울 것이다. 그렇다면 너를 그 자에게 줄 가치도 없을 것인 즉······."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다.
집안이 뒤떨어지는 것이야 애써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인물이 딸의 눈에 차지 않는다면 사위로 들일 수 없었다.
===
'강석기의 막내딸과의 혼사라, 주상도 제법이군.'
기별을 받은 이자원은 마음속에서 임금에 대한 평가를 살짝 상향조정했다.
아무리 자신이 내민 미끼가 달콤하다 해도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혼주인 강석기가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마 임금이 직접 나섰으니 거부할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래도 그의 처지가 처지다보니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의외로 강석기와 대면할 자리는 빠르게 만들어졌다.
"전하, 이번에는 가도의 심 총병이 직접 파총 이자원의 신병을 요구하였사옵니다. 더는 그의 처분을 미룰 수 없사옵니다."
"천조(天朝)에서 직접 내려온 명이 아니라면 따를 수 없다. 일개 총병 따위가 어찌 감히 우리 조정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인가?"
이 날의 상참(常參)에는 이자원도 불려와 있었다.
심세괴의 직접적인 서찰이 날아오자 임금이 부른 자리였다.
임금과 청서파의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자원은 그저 태연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전하, 그러나 심세괴도 천조에 제 입장만 담아 고했을테니, 오해가 생길까 두렵사옵니다. 책봉과 관련해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대국에 반드시 소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옵니다."
그때 돈녕부의 당상관으로서 상참에 참여해있던 강석기가 나섰다.
그는 청서이면서도 그간 논쟁에 끼어들지는 않았기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파총, 그대의 행동으로 온 조정이 시끄럽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하였는데 어찌 책임질 생각인가?"
강석기가 이자원을 보고 외쳤다.
'주상이 미리 얘기를 끝내놓았으리라 예상했는데 의외로군.'
그의 말을 들은 이자원이 생각했다.
'지금 하는 것은 가도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딸을 보낼 수 없다는 시위인가.'
이자원의 신분이나 가계를 문제 삼는 것보다는 나았다.
명나라의 상황상, 숭정제의 성격상 처단되는 것은 심세괴 쪽일게 뻔했기에, 이자원으로서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강석기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예상치 못하게 나선 이가 있었다.
"신 영의정 김류도 마찬가지 생각이옵니다. 물론 가도군의 행패가 심하였기에 이자원이 기강을 세운 것이라는 전하의 말씀은 옳사옵니다."
김류가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작게는 십 년 넘게 이어온 가도와의 연계가 끊기고, 크게는 이백 년을 섬겨온 명나라의 질책을 받을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이자원이 앞장서 해결해야 할 것이옵니다."
서녀와의 혼인을 거절한 보복인가.
중간에서 눈치를 살피던 김류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뭐, 좋다.'
임금이 뭐라 반박하려 할 때 이자원이 나섰다.
"들어보니 실로 여러 고관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또한 천자께 자초지종을 고할 때는 백가지 말로 글을 꾸며도 직접 소명하는 것만 못하겠지요."
한번 청서와 김류를 쓸어본 이자원의 눈길이 강석기에게 가서 멈췄다.
'당신이 원하는게 이거라면, 맞춰 드리리다.'
"신은 터럭만큼의 거리낌도 없사옵니다, 전하. 어차피 조만간 책봉주청사를 보내야 할 것이온데 그 일행에 신을 포함시켜 주시옵소서."
청서 관리들도 그 말에는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명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이자원에게 조치를 취해 불편한 일을 피하자는 입장이었으니까.
김류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다니······!'
하지만 그로서는 나쁠게 없었다.
조선에 이자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이자원이 제발로 찾아오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명 조정이 이자원 그에게 트집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책봉도 꼬일 것이고 정치판에는 혼란이 찾아온다.
임금으로서는 김류의 정치력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런 요행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어차피 낙동강 오리알이 될 김류로서는 여기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전하, 파총의 뜻이 참으로 갸륵합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천조에서는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릴 수 있을 것이오니, 이자원을 보내서 좀 더 소상히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게 하소서."
"아직 논공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자원을 보내서야 되겠는가?"
임금이 묻자 김류가 말했다.
"이자원이 비록 품계가 낮다하나 공은 으뜸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마땅히 1등으로 녹훈하여야 할 것이니, 그에 관해서는 장본인을 앉혀놓고 따져 묻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논공에서 적극적으로 옹호해줄테니 주청사를 받아라.
뻔히 보이는 속내다.
그러나 이자원이 생각하기에 딱히 손해볼 것은 없었다. 논공도 논공이거니와 강석기 또한 이 문제를 매듭짓기 원하는 눈치였으니 말이다.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던 임금이 이자원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를 이미 믿기로 했다.
"······좋다. 윤허하노라."
결국 임금의 재가가 떨어졌다.
===
조회가 파한 후.
이자원은 어김없이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몽고인들을 국경에서 풀어주셨다 들었사옵니다."
"이이제이(以夷伐夷)를 하라는 네 말을 들은 것이다."
안주에서 조선군에 투항한 청나라 외번몽고군에 관한 이야기다.
"이번에 왜인(倭人)들의 활약도 대단했지. 기질이 사납고 날카로우니 군대로 삼기 좋으나, 그 숫자가 적은 것이 아쉽다. 인조대왕께서 역적 이괄의 흉난 때 왜관에서 병력을 빌리고자 하신 뜻을 알 것 같구나. 헌데,"
그리 말하던 임금은 이자원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가도의 일은 대국에서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대국행을 자청하는 이유가 뭐냐? 단지 국구 문제 때문이냐?"
자신을 믿지 못하냐는 물음.
그 은근한 불쾌감을 모른체 하며 이자원은 말했다.
"설마 그 뿐이겠사옵니까? 신이 대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대국에서 해야 할 일?"
"그렇사옵니다."
이자원이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확신에 찬 어조다.
임금은 그것을 느끼고 더는 입을 대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심세괴가 명 조정에 많은 인정(人情)을 바쳤다 들었다. 어쩌면 그곳은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임금은 말했다.
"너를 쓰기도 전에 부서지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이자원은 임금의 염려 아닌 염려에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누구를 쓰는 것일까.
참으로 기묘한 군신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