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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8화 (28/213)

〈 28화 〉 소용돌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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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서(淸西)는 본래 조정의 야당(野黨)에 가까웠다.

그러던 차 병자호란을 계기로 척화라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고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정작 그 중심을 지키고 있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해버리면서 수뇌에 공백이 생겨버렸다.

이 청서 세력을 임시로 이끌고 있는 사람은 김상헌의 형 판돈녕부사 김상용(金尙容)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강화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殉節)한 이였으나 강화도가 채 침노받지 않은 이곳에서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미 우의정을 지내고 은퇴했던 김상용이기에 어디까지나 세력이 정상화될 때까지만 일종의 비대위원장을 맡은 셈이었지만, 수장은 수장이다.

그렇기에 청서 일파는 모두 그의 입장을 경청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곧 당론(黨論)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파총 이자원이 가도의 명군을 함부로 참하여서 심 총병이 우리 조정에 항의하는 뜻을 밝혔다······?"

김상용의 말에 사간원 헌납 윤집(尹集)이 말했다.

"그렇사오이다, 대감. 무관이면 오랑캐나 잘 잡을 것이지 어찌 그런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사오이다."

본래 이들 청서 척화파는 이자원에게 상당한 호감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단숨에 황태극을 도살하여 화친의 논의를 끊어버린 사람이 바로 그이고, 그렇기에 죽은 예조판서 김상헌도 그를 보호한 것이 아닌가.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주화가 대세이던 정국을 한방에 뒤집어지고 현실을 모르는 선비들 취급받던 청서가 떠오를 수 있었으니 이자원을 좋게 보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도 논공이 끝나고 나면 이쪽으로 합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리되면 어렵겠구료."

김상용이 이조참판 정온을 보며 말했다.

"이자원 그 사람이 군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근본은 폭급한 무부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사오이다."

정온이 답했다.

"본래라면 그와 함께 쌍령에서 고락을 같이 한 상무헌(尙武軒, 허득량의 호)을 보내어 포섭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무신들은 모두 공서 일파로, 청서에는 변변한 무맥(武脈)이 없었기에 높은 전공을 세운 그가 아쉽긴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국과의 관계다. 그간 가도는 조선과 명의 사이를 조율해왔다. 그런 판이니 가도에서 저리 나오는데 조정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자원이 모병(毛兵)들을 참한 것은 우리 백성을 약탈했기 때문이라 들었는데 참작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사오이까?"

전 이조판서 강석기(姜碩期)의 말이다.

조심스런 변호였다.

그러나 김상용은 고개를 저었다.

"그간 모병(毛兵)이 부린 행패가 결코 그보다 못하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이 그것을 몰랐던게 아니오. 오로지 대명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참아 넘긴 것인데, 이자원이 어그러뜨렸으니 마땅히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오."

나이는 강석기가 스무살 가까이 적지만 조정의 중신에다 국구(國舅)이기에 말을 높이는 김상용이다.

'젊은 혈기에 저지른 일인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전쟁의 공신이니 심세괴가 요구한대로 묶여 보내지는 일은 없겠지만 아마 조정의 사과는 있어야 할 것이고, 이자원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김상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가도의 병폐가 이어진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니 이 참에 기강을 세운 것일 뿐이다. 더구나 심세괴가 군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대적(大敵)이 빠져나갔거늘 어찌 우리 조정에 책임을 묻는단 말이냐?"

임금은 삼사의 탄핵에 호통을 쳤다.

"오히려 우리가 천자께 상주하여 가도 총병 심세괴를 파직해달라 청해야 할 것이다!"

"하오나 전하, 대국과 관계된 일이오니 신들로서는 이런 주청을 드릴 수 밖에 없사옵니다."

"그래서 이자원을 파직하라 한 것인가?"

어림없는 소리였다.

이자원을 자신의 칼로 쓰겠다 마음먹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사직이 무사한 것은 오로지 이자원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힘껏 싸웠기 때문이다. 경들의 말을 들으면 그들이 나라를 어찌 생각하겠느냐?"

"하오나 전하, 아직 책봉(冊封)을 주청(奏請)하는 사신도 보내지 않았사온데 자칫 대국에서 트집을 잡을까 두렵사옵니다. 우선은 이자원을 파직하시고 상황을 보아 공을 인정하고 복직시키시지요."

조공사대 관계에서 책봉은 군주의 정통성과 직결된다.

이자원은 절대 황제가 단물 빠진 가도를 위해 조선과 각을 세울리 없다 장담했지만, 임금으로서도 책봉 이야기가 나오자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대국에서도 경위를 조사하면 시시비비가 온당히 가려질 것이다. 이자원을 파직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임금은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것은 청서(淸西) 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총애라고 봐야 하는가?'

김류가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적당히 논의가 무르익으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자원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두손두발을 다 들고 사위가 되기를 청하면 그때 기회를 엿보아 나서려 했던 김류였으나, 예상 외로 임금이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남한산성에서 몇번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정도의 총애를 받을 수는 없을 터인데?'

본래 임금이 새로 즉위하고 나면 황제의 고명을 받는데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단순한 총애라고 보기에도 무엇하고, 이자원에게서 얻어낼 것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

'이자원, 설마 주상 전하를 끌어들였는가?'

김류의 눈꼬리가 움직였다.

'군공이 많다하나 얼자 출신 무인이라고 가벼이 봤더니, 이런 재주를 숨기고 있었구나.'

더욱 탐나는 자다.

임금이라는 새로운 뒷배를 얻었다고는 해도 이자원이 구태여 김류의 손을 내칠 필요는 없다.

김류의 목표 또한 조정의 판도를 조율함으로써 임금의 친위(親衛)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뒤는 든든하면 든든할수록 좋지 않은가?

어찌보면 그를 놓쳐버린 셈이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시급한 국사가 많이 있으니 더는 이 일을 거론하지 말라."

임금이 이리 말한다해도 신하들이 입을 아니 대지는 않겠으나 어쨌든 그날의 조회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조회가 파한 후, 김류는 임금을 찾았다.

"영상이 무슨 일이오?"

선대왕은 김류를 총애했다. 그렇기에 그는 영의정까지 오르게 되었고, 대가로 어심(御心)에 앞장서며 아낌없는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새로운 임금도 그와 같은 관계를 바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신 영의정 김류, 청이 한가지 있나이다."

"말해보시오."

"신이 슬하에 과년(過年)한 서녀가 하나 있사온데 파총 이자원의 사람됨이 괜찮아 보여 그를 집안에 들이려 하옵니다. 모쪼록 허락해주시옵소서."

이자원과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인데, 거기에 자신도 좀 끼워달라는 뜻이었다.

"일개 군관과 영상 서녀와의 혼인을 나에게까지 허락을 맡는 것이오?"

그러나 임금은 모르는 척 물었다.

"주상 전하께서 이자원을 아끼시니 신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아낀다라······ 그래, 아낀다고 봐야지.'

김류의 말에 임금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이자원의 내자(內者)될 사람은 따로 있으니 말이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자원은 그런 소리가 없었다.

김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임금이 웃으며 답했다.

"내가 중매를 한번 서볼 생각이오."

신뢰의 증표를 달라 했었지.

그러나 숙부인 능원대군도 사지로 내몬 자신을 온전히 믿게 하려면 무엇을 내어줘야 하는가.

"국구(國舅)에게는 딸이 셋이었지, 아마?”

그것은 임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정치적 공동운명체의 딸 정도가 아닐까.

"영상은 논공이나 잘 마무리하시오."

김류는 임금의 뜻을 알아들었다.

논공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은?

김류의 눈이 절로 차가워졌다.

===

훈련도감 병력 대다수는 도원수 김자점과 함께 북상한 상태였다.

전쟁도 끝났고, 평시처럼 일정이 잡혀있는 것도 아니니 이자원은 일종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은 셈이 되어 집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사가독서라지만 비나 새지 않으면 다행인 초가삼간에 변변한 서적이 있을리는 만무했다.

본신이 무과를 칠 때 뒤적거린 것으로 보이는 낡은 무예서와 병법서, 그리고 틈틈이 끄적인 기록 정도가 전부였다.

무예서와 병서는 그렇다치고 기록들도 대부분 남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적은 것은 아닌지 파편화된 단상(斷想)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것으로 본신의 삶을 유추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럴 필요성도 이제 와선 잘 느끼지 못했고 말이다.

이자원은 그저 가만히 앉아 명상했다.

그는 본래 만사에 초연한 인간이지만 잡념만큼은 남들과 다르지 않게 찾아온다.

귓가에 수화기 소리가 생생하게 맴돌았다.

- 이 중령, 미안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동기(同期)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그때,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파총 나리, 계시오이까?"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텁석부리 사내의 얼굴.

"어쩐 일이냐?"

아무리 17세기 조선이라지만 너무 겉늙어버린 남자, 박철균이 그를 반겼다.

"동료 초관들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으니 적적하고 무료하기도 해서, 인사도 드릴 겸 어찌저찌 찾아왔소이다. 같이 탁주라도 한잔하지 않겠사오이까?"

과연 박철균의 손에는 작은 항아리 하나가 들려있다.

그 안에 술이 가득 찼다면 상당한 무게일텐데 힘든 기색도 없는 것을 보니 이 청년도 제법 장사였다.

이자원은 일단 박철균을 안으로 들였다.

"술은 있지만 안주 삼을 것이 없군."

오늘 아침을 먹고 나니 깨진 옹기에는 쌀 한 줌 남아있지 않았다.

이자원의 말에 박철균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내라면 냉수 한잔으로도 속을 차리는 법이지요. 파총 나리는 호걸이지만 술에 관해서는 그런 이치를 잘 모르시는가 봅니다."

그러나 잠시 뒤 박철균은 새빨개진 얼굴로 혀를 꼬기 시작했다.

연거푸 탁주 사발을 들이켰으니 중간중간에 냉수를 마신다한들 괜찮을리가 없었다.

오히려 멀쩡한 것은 이자원 쪽이었다.

"흐끅."

거나하게 취한 박철균은 주사(酒邪)하는 이가 대개 그렇듯이 묻지도 않은 자기 인생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충청도 향반의 자식으로서 제법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동리의 신동으로 소문난 형들과 달리 머리가 둔해 구박을 받고 자라났다,

그래도 배운 가락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일신의 힘만은 자랑할 만하여 단번에 무과에 붙었다,

게다가 실직(實職)도 금방 받았다,

그런데도 아직 생원(生員)·진사(進士) 준비나 하고 있는 제 형들은 무관이라고 얕잡아보더라─

따위의 내용이었다.

"끅, 애초에 무반을 괄시하는 이유가 뭐란 말요. 이런 난세에."

박철균이 한탄하듯이 말했다.

"문(文)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있으면 무(武)로써 나라를 지키는 자들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외까?"

그러더니 게슴츠레한 눈을 내리깔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 부방 살 때나 남한산성에 있을 때는 솔직히 파총 나리가 꺼려졌지만 이제 알겠소이다. 내 꿈을 이루려면 나리의 옆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대공을 세우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형님들도 나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 꿈이오이다."

"그러하냐."

이리 솔직하게 출세하고 싶어서 자신의 옆에 있다고 말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그 책임은 박철균의 몫이지 그의 것이 아니다.

"파총 나리."

그때 박철균이 물었다.

"나리의 목적은 무엇이오이까?"

술을 입에 가져가던 이자원이 멈칫했다.

여기서 나올줄은 몰랐던 질문이다.

"나의 목적은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자원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그리고 덤벼드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응징할 수 있도록.

그것이 이자원의 목적이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뤄야할 목적 말이다.

"끅."

이자원의 대답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정신이 팽 도는듯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리던 박철균은 기어이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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