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소용돌이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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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척 하지만 몸이 달았군.'
이자원은 김류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가 원하는 것이 출세라면, 그를 위해 정치적 방패막이를 구하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보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오이다."
"뭐든지 말해보게."
"영상 대감께서는 작금의 정국을 어떻게 보시오이까?"
그 말에 김류는 잠시 이자원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 여식의 미색이나 품성보다 그것이 궁금한겐가?"
아무리 정략이라지만 이렇게 목석 같은 자가 있단 말인가.
"영상 대감의 생각을 듣기 전에는 그런 것들은 다 의미가 없지 않겠소이까."
"장인이 사위 책문(策問, 정견을 묻는 과거 시험의 과목)을 본다는 말은 들었어도, 사위될 사람이 장인 책문을 보는 경우도 있군. 하기사, 한 식구가 된다는 것은 그 집안의 흥망(興亡)을 같이 한다는 뜻이니 그럴만도 하지."
김류는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영의정 쯤 되는 이가 서출이라지만 자기 애녀(愛女)를 주겠다 하면 대번에 절부터 올릴 자들이 부지기수다.
허나 이 자는 다르다. 그러니 대답해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공서(功西) 주화파의 문신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하겠지. 당장 이조판서 최명길도 그러할테고. 그러나 신경진, 구인후, 구굉 같은 무신들은 호란의 공신이니 그들은 살아남아 공서를 주도하려 들 것이야."
"그렇겠지요."
아마 김류 또한 그러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고.
그가 뭐라하든 기세가 오른 무인들이 듣는 척이라도 하겠는가.
“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려 하네.”
그렇다면 김류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바로 탈당(脫黨)과 재창당(再創黨)이다.
"이미 도원수와는 교감을 나누었네. 뒷정리까지 완전히 끝나고 나면 그를 조정으로 들일 생각일세. 군공을 세웠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이고, 아마 병조판서 쯤이 되겠지."
그래서 도원수 중 한 명으로 지휘권을 일원화할 때 김자점을 택한 것이다.
"공서의 무부들과 청서의 꽉 막힌 선비들이 서로 화합할 수 있겠는가? 결국 조정은 아당(我黨)을 중심으로 굴러갈 수 밖에 없어."
김류의 말에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캐스팅 보트를 쥐시겠다······.'
그래서 그가 중요한 것이다.
홍타이지를 죽이고 인조에게 항전을 주장해 관철시킨 척화의 상징.
그리고 앞으로 방해만 없다면 승승장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무인.
서녀 하나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그리되면 새로운 주상 전하께서도 이 김류를 쓸 수 밖에 없으시리라.'
도성을 되찾고 호란을 이겼으니 강력한 명분을 쥐었지만 아직까지 친위 세력이라 할만한 것은 없는 임금이다.
그런 판에 조정의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들어씀이 옳다.
이것이 김류가 구상하는 상부상조 전략이었다.
그때.
김류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있던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사오이까?"
"그 끝이라니?"
김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영상 대감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말이오이다."
"······내가 이러는 목적을 묻는겐가?"
김류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이 자가 정말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권력을 쥐는 것. 그리고 유지하는 것. 그것이 유사 이래 모든 권력자의 목적이다.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당연히 이 나라 종묘 사직을 지키고 백성을 위무하는 것이지."
그러니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을 수 밖에 없는 김류였다.
뻔한 거짓말이다.
이자원도 그걸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영상 대감의 고견(高見) 잘 들었소이다."
"그렇다는 말은······?"
"다만 혼인은 인륜지대사이니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 깊이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사오이다."
김류의 기대감 어린 표정에 약간 실망감이 감돌았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말게. 이런 기회가 자주 오지는 않을 터이니.”
김류의 핀잔에도 이자원은 태연하게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아버님, 어찌 되었사옵니까?"
이자원이 떠난 자리를 보며 김류가 다시 장죽에 불을 붙이고 있자니, 아들 김경징이 사랑채로 들어와 물었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줄 알았더니 영 뻣뻣하구나."
"차라리 다행이옵니다. 저런 자에게 서매(庶妹)를 주자니 아깝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무어냐?"
그러고보니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아들이 이자원이 떠나자마자 그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보낸 자가 방금 장계를 들고 입궐했다가 이리로 들렀사온데, 이자원이 정주에서 사고를 친 것 같사옵니다."
"사고?"
아들의 말을 가만히 듣던 김류가 담배 연기를 흘리며 웃었다.
"이자원 그 자가 나를 다시 찾아올 수 밖에 없겠군."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그러나 이것을 찻잔(茶盞) 속의 소용돌이가 될지 태풍이 될지는 그처럼 높은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리라.
===
훈련도감의 위치는 경희궁 근처로, 현대로 따지면 신문로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훈련도감에서 복무하던 이자원의 집도 자연히 그와 가까운 곳이었는데, 별달리 위세가 있는 집안도 아니요 벼슬자리도 높지 않은 탓에 집이래봤자 세 칸짜리 퇴락(頹落)한 초가에 불과했다.
이자원은 본신이 남긴 몇줄 기록에 의지하고 물어물어 겨우 찾아든 차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본 집에는 이미 선객이 와있었다.
"훈련도감 파총 이자원은 서둘러 입궐하라는 전하의 명이시오!"
'쉬게 해주지 않는군.'
이미 오전에 다녀갔거늘 다시 궁에 들라는 말인가.
아까 전에는 영상, 이제는 주상이 그를 불렀으니 훈련도감의 파총 정도 되는 이로서는 겪기 힘든 일이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창경궁에 도착한 그는 곧장 임금에게 안내되었다.
"늦었구나."
"신이 집에 있지 아니하였고, 따로이 출타 여부를 일러둘 사람도 없어 어명을 제때 받들지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임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자원을 바라보았다.
"누구와 같이 있었느냐?"
"영상 대감께서 다과를 대접하신다기에 들렀나이다."
"영상이······."
김류가 이 자에게 손을 내민 것인가.
임금은 잠시 불쾌함을 느끼며 손을 머리 위에 짚었다가 곧 뗐다. 이자원의 뒤에서는 열심히 사관(史官)이 이 대화를 적고 있다. 섣불리 입을 대기에는 좋지 않았다.
"원래는 너를 불러 서북군에게 투항한 몽인(蒙人)에 관한 문제를 물어보려 했다."
임금은 대신 이자원을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 임경업이 치계하기를, 네가 패주한 천병을 죽이라 명한 까닭으로 가도의 심세괴가 노하여 너를 묶어 보내라 요구했다 하니 이 문제부터 들어보아야겠다. 해명할 것이 있으면 해보아라."
당연히 심세괴의 반발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문제였다.
살짝 빠른 감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이 우리 백성을 약탈했기 때문이옵니다."
"그것 뿐이냐?"
임금은 물었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심 총병에게 인도하거나, 우리 조정에 알린 후 명을 받았어야지!"
"전하."
이자원의 눈빛에 임금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저들이 가도에 웅거하여 승냥이처럼 재물과 곡식을 요구하고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어언 15년이옵니다. 심세괴에게 넘긴들 그가 제대로 처벌하겠으며, 조정에 알린들 달리 손쓸 방도가 있었겠나이까."
"대국(大國)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
그렇기에 이자원이 가도군을 참하라 한 것이다.
한번은 짚고 넘어갈 문제였기에.
"심세괴가 이미 황제께 이를 고했다 하는데 우리나라에 이를 추궁하면 어쩔 셈이냐?"
그러나 이자원의 생각에 그럴 일은 없었다.
"전하, 황제가 보기에 저들은 이제 천병이 아니라 일개 도적 무리에 불과하옵니다."
청과 밀무역을 벌이고 수시로 반란이 일어나는 곳이 가도다.
숭정제가 그런 가도를 가만히 놓아둔 이유는 간단했다. 그나마 청의 후방에서 군세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명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번 전쟁으로 소멸했다.
"황제는 무슨 이유가 됐든 패배를 용서하지 않사옵니다. 가도의 효용이 다한 지금 심세괴 등은 경사(京師)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겠지요. 그 잔병들이야, 천조에서도 신경을 쓰겠사옵니까."
조선이 가도를 그간 용납한 것은 오로지 명의 군대라는 것 때문.
그 후광이 걷힌다면 더이상 그들을 봐줄 이유 따윈 없다.
'가도라는 암덩어리는 더이상 조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자원은 그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베었다.
임금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 말했다.
"그러나 너를 옭아맬 구실로는 충분하지."
사관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춘 상태다. 사관의 귀가 쫑긋했지만 감히 엿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해달라 요구하지는 못한다.
"가도군이 끼친 패악질이 심하다 하지만 일단은 천병이다. 대국에서 추궁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문제 삼는 이들이 많을테지. 그것을 막으려면 그래, 영상 정도 되는 방패는 있어야 하겠군."
꽤나 빈정거리는 말투지만 이자원은 그것이 의도적인 것임을 알았다.
"영상 대감과는 아무런 약속도 나누지 않았나이다."
정확히는 제안을 받았을 뿐.
"전하께서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이자원의 말에 임금의 표정이 변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라는 말이냐?"
배경 없는 얼자. 능력 있는 무관. 그 뿐이라면 총신(寵臣)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임금은 이자원이 꺼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자. 그래야한다고 마음먹는다면, 사람도 거리낌없이 벨 수 있는 자.
그러나 임금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자원이 가진 재주는 몹시 끌렸다.
흉금에 품은 하나의 소원 때문에 그가 필요한 것이다.
"전하의 목적은 무엇이옵니까?"
이자원은 그것을 기어이 캐물었다.
"나는······."
임금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선대왕의 복수를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시는 침노받지 않을 나라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폐주 광해를 내쫓고 즉위하신 인조대왕께서도 바른 정사를 펼치셨지만 끝내 호기가 도성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눈 앞의 이자원만큼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어려웠던 전황도 단번에 뒤집어버린 이 자라면.
그렇기에 임금은 이자원을 완전히 마음 속에서 밀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묻겠다. 내가 만약 너를 보호해준다면,"
임금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따지자면 거래에 가까운 뉘앙스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 나눌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자원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북벌(北伐)이옵니다, 전하."
북벌.
17세기 후반 조선의 조야(朝野)를 풍미한 그 단어가 처음으로,
이자원의 입에서 나왔다.
"북벌······."
임금은 그 말을 되뇌였다.
“허나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임금의 비관적인 말에 이자원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사옵니다. 조선은 작고 가난한 나라지요. 요동으로 병력을 옮기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또한 싸움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신에게 하문하신 것 아니겠사옵니까?"
"허면?"
"나라의 근간을 바꿔야 하옵니다. 물산을 장려하고, 길을 닦아야 할 것이옵니다."
"그것 뿐인가?"
"또 천한 이를 등용하고, 때로는 예도에 어긋나더라도 행하며, 먼 나라의 문물을 수용한 뒤에야 이룰 수 있는 꿈이겠지요."
이자원의 속삭임에 임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신의 목을 걸겠나이다.”
“좋다.”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무너지지 않을 나라를 위해서.
임금은 말했다.
"그리해서 군부의 치욕을 갚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오랑캐를 물리치고 천조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기에 이르자 이자원의 표정은 드물게도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생각났다는 투였다.
"영의정은 신에게 서녀를 맞이하라 하였사옵니다, 전하."
김류의 예에 빗대어 신뢰의 증표를 달라는 뜻인가.
“알겠다. 조만간 기별을 보내마.”
이자원이 떠나고 임금은 생각에 잠겼다.
===
“가능성으로 따지면 반반이었거늘.”
임금의 앞에서 물러나온 이자원은 남쪽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남한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자원은 남한산을 향해 무심코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정말, 정말 감사한다.”
역사를 바꿀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서.
이자원은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