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소용돌이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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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총병 심세괴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어하는 사이 전투는 끝났다.
목숨은 건졌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가도에서 거느리고 나온 병력 중 절반이 사라졌다······?"
죽은 자보다 도망친 자가 더 많았다.
전사자의 사인(死因)도 살펴보자면 필경 청군에 의해 죽은 자보다 서로 밀치고 밟혀죽은 자가 더 많으리라.
그러나 심세괴는 마냥 한탄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총병 대인, 우선 흩어진 우리 군세부터 수습하시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비록 청군을 보자마자 무너져버린 군대였지만 거두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간 잔뜩 위세를 부렸던 조선군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였으니 숫자라도 충원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뜻밖의 암초를 만나고 말았다. 정주 근방에 흩어진 명군을 모으기 위해 향한 부하들이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해온 것이다.
"총병 대인! 조선군이 도망간 우리 천병들이 약탈을 했다 주장하며 함부로 죽이고 있나이다!"
"뭐라?"
심세괴는 놀라 외쳤다.
"이 자들이 감히 천조(天朝)에 반역이라도 한 것인가? 누구의 명을 받고 그 따위 짓을 한다더냐?"
"파총 이자원이라는 자라고 합니다."
"이자원······!"
심세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고보니 제가 황태극을 죽였답시고 조선군을 인수하러 갔던 부하들을 내쫓았던 자로 기억했다.
"천병들이 지치고 굶주려 채량(寨糧, 군량을 거둠)을 좀 했기로서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엄연히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에는 위계질서라는 것이 있거늘 아무리 군공 있는 자라해도 어찌 이리 방자하단 말인가.
"독보(獨步)."
"하명하시지요, 대인."
심세괴의 막사 안에 머물러 있던 승려 하나가 말했다.
그는 본래 조선 사람이나 지난해인 병자년 가도에 볼 일이 있어 넘어갔다가 심세괴의 막하에 들었다.
"임경업(林慶業)에게 가서 전하라. 이번 싸움에서 그대가 나를 구하였기에 일전에 조선이 반항한 일은 잊기로 했으나 이 것은 그냥 묵과할 수가 없다고! 이자원의 신병을 천병에게 인도하라고 말이다!"
"예, 대인."
"그리고 황상(皇上)께는 따로 장계를 올리겠다. 조선이 협조하지 않아 천병이 무너진 사실, 천병을 함부로 죽인 사실을 낱낱이 고하리라!"
심세괴는 이 참에 자신의 패전까지도 죄다 덮어씌울 심산이었다.
===
한편 명을 받은 독보는 곧장 조선군 진영으로 향했지만 이자원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안주를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귀한 분을 모시고 가는 길이었다.
"흐윽, 흐윽······."
능원대군 이보(李俌)는 말이 흔들릴 때마다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명백히 불안한 모습. ptsd의 전조 증상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자원으로서도 지금은 딱히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실제로 임금도 이자원도 그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한 목숨을 건진 것은 오로지 조선군과 대치하던 청군 사이의 내분 때문이었다.
'다르한 조리그투라고 하던가.'
지휘를 맡은 사람은 누르하치의 장손으로 청의 황족인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多羅安平貝勒) 두두였지만, 통제를 위한 일부 팔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병력은 외번몽고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퇴로가 막히자 외번몽고군은 기어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그 와중에 능원대군을 빼돌려 조선에 투항 의사를 밝힌 이가 바로 몽골 장수 다르한 조리그투였다.
'저들은 여진이 아니라 몽고의 족속인데다 이미 항복의 의사를 밝혔으니 보통의 포로로는 대할 수가 없네. 능원대군 대감을 모시고 가면서 전하께 이를 어찌 처결해야 할지 여쭤보게.'
그렇게 이자원은 전장의 수습을 서북군에게 맡겨놓고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귀하신 분이 이리 고초를 겪게 되니 마음이 좋지 않사오이다."
박철균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는 능원대군을 보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 약탈을 벌이던 명군을 죽이고 온 그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그래도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가.
"견뎌낼 수 밖에 없다. 스스로가."
이자원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전생에서도 같은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간단한 면담 뿐. 그것만으로도 좋아지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능원대군의 품성이 박하여 사람을 때리고 더러는 죽였지만, 스스로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으리라.
그리하여 정축년 1월 30일.
한양에 도착하자 능원대군은 입궐도 하지 못하고 부축을 받아 집에 들어갔고, 이자원만이 경과를 보고키 위해 창경궁에 들어갔다.
"적괴(賊魁)들은 모두 몸을 간수하여 도망쳤단 말인가······."
이자원의 보고에 상복을 입은 임금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하나 실로 대승이옵니다, 전하!"
"그러하옵니다. 도원수도 적의 후위를 깨뜨렸으니, 잔병(殘兵)들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지만 그 수효는 8천 명을 넘지 않을 것이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신료들의 축하를 들으며 임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명군이 그리 빨리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이 조선땅에서 살아가는 놈들은 한 명도 없게 할 수 있었을 터인데.'
노추 황태극과 함께 천하를 종횡무진했던 친왕들의 목은 결국 얻을 수 없었다.
"드디어 전쟁은 끝났구나. 이 소식을 전국에 알리고 악탁(岳托, 요토) 등 청장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이라."
임금은 그러면서 말했다.
"또한 전쟁이 끝났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공을 논하고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비변사(備邊司)는 녹훈(錄勳)할 이를 추려 올리라."
"어명을 따르겠나이다."
영의정 김류를 필두로 한 신하들이 말했다.
"하옵고 지금 영상(領相) 아래로는 정승과 판서가 많이 비었사온데 이 또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옵니다."
"그것도 녹훈한 바를 보고 결정토록 하겠다."
이조참판 정온의 말에 임금이 답했다.
그의 시선이 이자원에게 가서 닿았다.
어느덧 임금이 즉위하여 정무를 본 지도 스무 날이 되어가니 나름대로 위엄이 붙은 터다.
그런 임금이 내려다보았으나 이자원은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했었지.'
임금은 아직까지 이자원의 말을 기억했다.
자신도 그리 떳떳한 인간은 아니다. 부왕이 훙서에 이른 원인을 숨기고 숙부를 오랑캐들에게 보냈다. 후자는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모든 것은 나라를 위함이라며 스스로를 달랬으나······ 그렇다면 이자원의 말과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포로에 관한 일과 북방의 정세도 논의해야 한다.'
이자원.
그의 말이 꺼려진다 하여 내치기에는, 임금은 그가 아직 필요했다.
===
퇴궐한 김류는 안방에서 조용히 장죽(長竹)을 피워 물었다.
폐에 머금었던 담배 연기가 다시 입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남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강화도 검찰사(檢察使)로 있다가 대군 및 빈궁들과 함께 환도한 아들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요즘 담배를 자주 피우시는 것 같사옵니다."
김경징의 말에 김류가 웃으며 말했다.
"계곡(谿谷), 그 자가 담배를 몹시 좋아하기에 한번 피워보았더니 나쁘지 않구나."
계곡은 공조판서를 지낸 장유의 호다.
김류의 말에 김경징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동생 강화부유수 장신(張紳)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그리 인상을 굳히지 말거라. 이번 논공이 끝나면 자연스레 계곡도 그 동생도 모두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할 터이니."
"공서(功西) 주화파들은 죄다 사라질거라 듣기는 했사옵니다. 그런데 허면 우리 부자도 위험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니 이 아비가 고민이 많은 것 아니겠느냐."
김류가 담배 연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김광찬(金光燦) 등이 의병장 허득량과 접촉했다지?"
"허득량이 예판 대감의 문하에 있었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사오이까."
"벌써 꿍꿍이들을 하기 시작했구나."
김광찬은 김상헌의 양자다.
저들 청서파도 벌써 이번 전쟁의 공신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포섭해야 할 자는 따로 있지."
그리고 지금 그 자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고 도성으로 내려온 상태다.
마침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감마님, 훈국 이 파총이란 분께서 기별을 받고 오셨습니다요."
"어서 사랑방으로 뫼셔라."
행랑아범의 말에 김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너는 예서 기다리고 있거라."
김경징에게 말한 김류는 곧장 사랑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그가 익히 지켜보았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영상 대감을 뵈오이다."
이자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급히 불러 미안하네. 약주(藥酒)라도 한 잔 하겠는가?"
"괜찮사오이다, 영상 대감."
이자원은 김류가 들고 있는 장죽에서 피어오른 담배연기에 얕게 기침했다.
김류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담배를 껐다.
"자네 같은 장부가 담배 연기에는 맥을 못추는군."
"부끄럽사오이다."
이자원은 별로 부끄럽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현대와는 달리 담배 연기도 독하니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이다.
"그래도 일신의 무용이 대단하니 되었네. 금번 싸움에서도 앞장서서 공을 세웠다지?"
"과찬이시오이다."
전략이 아닌 무용을 논한다면 아마 그 공은 본신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간 이자원은 칼을 휘두를 수록 점점 검술이 익숙해짐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어있던 기억이 의식의 영역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청군의 정예와 다투어 볼 만한 실력이었으니 본신이 얼마나 무예를 갈고 닦았는지 알만 했다.
"자네도 그 자리에 있어 알고 있겠지만 논공행상이 머지 않았네."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군.'
말을 빙빙 돌리던 김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하와 비국(備局, 비변사) 당상(堂上)들께서 현명히 결정하시겠지요."
이자원은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뒷배가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누락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일세."
당장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인조반정 때도 그랬다.
"소관도 그리될 것이란 말씀이시오이까?"
"자네가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하나 고깝게 보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예를 들어 쌍령의 싸움 같은 경우, 지휘관은 경상좌병사와 우병사 아니었나? 자네 공을 그리로 돌린다면?"
이자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꼭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그리 할 수도 있다는 말 같지 않은가.
"반면 앞장서서 공을 주장해줄 사람이 있다면 일은 훨씬 쉬워지지. 1등 공신도 가능할만큼."
김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영상 대감께서 소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오이까?"
이자원이 묻자 김류는 냉큼 답했다.
"내 밑으로 들어오게."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이자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았다.
이자원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많았고.
이것을 세간에서는 당여(黨與)라고 부른다.
"자네, 집안과 슬하는 어찌 되는가?"
"성산(星山) 본관이옵고 처자는 모두 병으로 죽었사오이다."
"그랬는가."
김류는 골똘히 생각하다 말을 건넸다.
"허면 재취할 생각은 아직 없는가?"
"어인 말씀이신지요?"
"내가 서녀 딸아이가 하나 있네. 내 딸이라 하는 말은 아니고 몹시 현숙한 아이일세. 그야말로 천금(千金)도 견주지 못할 자태이지."
이쯤되면 바보라 해도 김류의 의도를 알아들을 것이다.
과연 김류는 그 말을 꺼냈다.
"자네, 내 사위가 될 생각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