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호란의 끝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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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총! 내가 왔네!”
지원군을 이끌고 온 이는 의주부윤 임경업이었다.
이자원은 말을 몰아 그에게 합류했다.
“오랑캐들이 계속 방해했을텐데 어떻게 지원을 오셨소이까?”
이자원의 물음에 임경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놈들이 무슨 일인지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 같네. 그 틈에 감사와 병사 영감의 명을 받고 내가 온 것이야.”
자중지란이라.
확실히 지금 이곳에 있는 청군들은 모두 팔기.
조선군과 대치하고 있는 병력이 우전 초하나 외번몽고군이라면, 전세가 기운 지금 확실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이쪽으로 투항해오는 몽고군이 있을 수도 있겠소이다.”
이자원이 말했다.
외번몽고군은 전쟁 직전 몽골 쪽에서 홍타이지의 명을 받고 초모해온 군대이니 팔기와 같은 유대감이 있지는 않을 터다.
청의 힘에 의해 굴복한 이들이니 그 힘이 꺾인걸 목격했다면 언제든지 태도를 바꿀 수가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세. 심 총병은 어디 있는가?”
“소관도 알지 못하오이다.”
정확히 말하면 별 관심이 없었다.
제 군대 하나 수습하지 못하는데 어디 있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임경업의 의견은 달랐다.
“군은 수습하지 못하더라도 천장들의 목숨은 구하는 것이 좋겠네.”
이유야 뻔했다.
패배해 앙심을 품은 심세괴가 지휘권을 넘겨받지 못해 졌다며 명나라 조정에 참소를 벌이거나, 혹은 아예 죽어버려 조선이 명의 질책을 받는 일을 피하고자 함이리라.
정작 이자원은 그 부분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명군 사이를 찾아보시지요. 소관은 오랑캐의 목을 추수하러 가보겠소이다.”
이자원은 다시금 환도를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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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과 조선 기병은 도망치는 청군을 맹렬히 추격했다.
본디 군의 피해는 도주할 때 가장 많이 생기는 법이다.
이미 청천강을 도하할 때 이자원의 손에 수많은 팔기들의 목숨이 스러졌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조선군은 청군의 등을 난도질했다.
“저 개자식은 쉬지도 않는군!”
호거가 욕설을 퍼부었다.
청천강을 건너온 뒤로 청군은 한시도 쉬지 못했다.
채 강을 넘어오지 못한 병력은 그도 어찌될지 모르겠다. 아마 전부 조선군 사이에 끼어 박살날 운명이리라.
강 너머 정주 일대는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명군에 의해 온통 난장판이었던지라 수뇌들은 살아남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도르곤도, 호거도, 도도도, 다이샨도 모두 살아서 강을 건넜다.
“그래도 명군이 무너진 덕에 반 이상은 도하한 것 같습니다.”
도르곤의 말에 다이샨이 허탈하게 웃었다.
“한께서 조선을 침공할 때 이끌고 오신 4만 중 쿠툴러들은 탈주하고 우전 초하와 외번몽고군은 미처 따라오지 못했네.
오직 팔기만주와 팔기몽고만을 보전할 수 있었거늘, 그마저도 반수에 불과하다니.”
그러나 다이샨의 넋두리가 가시기도 전에 급보가 전해져왔다.
“크, 큰일입니다! 북쪽에서 한 무리의 부대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뭐라?”
목숨을 살려줬더니 불평을 늘어놓는다고 하늘이 그에게 벌이라도 내린 것인가.
친왕들이 놀라 서둘러 전투할 준비를 마치라 다그치고 나자 드디어 내려온 정체불명의 부대가 청군과 마주쳤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던 도르곤은 그 선봉에 서있는 자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도로이 바루르 군왕!”
아지거.
도르곤과 도도의 동복형이지만 두 형제보다 작위가 낮았다.
주력이 조선 정벌을 위해 빠져나간 동안 지르갈랑, 아바하이와 함께 요동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그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친왕들이여! 한께서 붕어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왔소! 이미 야루에는 배가 준비되어 있으니 서두르시오!”
청군이 패주하는 소식을 듣고 미리 압록강을 넘어온 것이다. 게다가 배도 있으니 청천강을 건널 때처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청으로 돌아갈 길이 트인 것이다.
“아쉽게 되었군.”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청군의 흔적을 발견한 이자원은 혀를 찼다.
이런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군은 정예다. 저들이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하고 쫓기게 된 것은 참수 작전의 실패와 갑사창의 상실로 천 리가 넘게 굶주리며 올라온 탓.
아마 만주로 돌아가 다시 재정비를 마치고 나면 이정도로 손쉽게 사냥할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두번이나 ‘무모한’ 전략을 세우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선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하겠지만······
‘저들은 스스로의 걱정부터 먼저 해야하겠지.’
청나라의 만주와 몽골 통치는, 결코 아무런 반발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욱일승천하는 청이라는 나라의 국세가 억눌렀을 뿐.
그러나 청의 천명은 조선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박 초관.”
“예, 나으리.”
“오면서 보니 흩어진 명군들이 민가에 피해를 끼치고 있더군.”
청군을 놓쳤다 해서 할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주를 약탈하는 명군이 있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참하라.”
“예!”
박철균은 더 따져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자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되냐고 묻지 않는군.”
“파총께서 하신 일은 이제까지 다 옳았으니 의심없이 따르는 것이오이다.”
어찌보면 맹목적인 태도다.
그러나 박철균은 그간 이자원이 쌓아올린 전공을 기억하고 있었다.
냉정하면서도 또한 무모해보였지만 그의 상관은 항상 좋은 결과를 냈다.
영웅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박철균은 그렇게 생각했다.
“명에 따라 우리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전부 쓸어버리겠소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을 따라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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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끅······ 꾸욱······.”
남자는 입에서 솟아나는 피에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신음이라기보단 구역질에 가까운 소리였다.
남자가 쓰러진 것은 가슴팍에 꽂힌 한 자루의 일본도 때문이었다.
일본도의 주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시체의 투구를 벗기고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냈다. 그것을 죽은이의 얼굴로 가져갈 때, 뒤에서 근엄한 소리가 들렸다.
“그 자는 코를 벨 것이 아니라 수급을 취해라.”
“예, 정헌대부(正憲大夫) 도노(どの).”
조선의 정2품 산계인 정헌대부에 윗사람에게 붙이는 일본어 도노가 붙어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호칭이다.
하지만 밀양의 항왜촌에서만 나고 자란 청년으로서는 다르게 부를 방도를 알지 못했다.
지적한 김충선도 딱히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고 말이다.
“한인놈들, 무에 그리 끈질긴지 진땀을 뺐소이다 그려.”
김충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뒷수습을 하고 있자니 경상좌병사 허완이 말을 걸어온다.
도원수 김자점이 군을 이끌고 북상할 때 경상도 군도 끼어있었으니 그도 당연히 종군한 것이었지만, 쌍령에서 그랬듯이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충선은 허완을 마냥 무시하진 않았다.
왜란 때부터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의 일을 함께 반추할 수 있는 이는 적었다. 칠십을 넘긴 허완과 육십을 넘긴 김충선 정도가 그때의 치열했던 전쟁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이것도 저들 나름의 충의인 셈이겠지요.”
“제 나라를 버리고 대체 왜······ 아니오. 실언을 했소.”
무심코 내뱉던 허완은 급히 말을 멈췄다.
눈 앞의 김충선도 조선의 모화를 동경하여 투항해온 이가 아니던가.
반역을 일으켰다 제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해 오랑캐에 빌붙은 공유덕, 상가희 등과는 다른 것이라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에게는 썩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니리라.
대신 허완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지금 전투로 오랑캐 밑의 한군들은 소멸했지만 정작 오랑캐들은 반수 이상이 명군을 뚫고 압록강으로 도망치고 있다 하오.”
“도원수 대감이 노발대발했겠군요.”
“무어, 우리 군이 아니라 천병이 무너져 생긴 일이니 도원수라 할지라도 크게 성을 내기는 힘들겠지.”
아직까지 천하의 중심은 명나라이다.
또한 임진왜란을 겪으며 뼈에 새겨진 재조지은, 넉자가 명에 한마디 큰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랑캐의 뒤를 쫓는 자가 쌍령에서 우리와 같이 싸웠던 훈국 이 파총이라지.”
“그 자가 또 공을 세우는가 봅니다.”
김충선의 말에 허완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솔직히 이대로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소.”
한때 그 이순신의 칭찬을 받았던 늙은 장수의 말이다.
“왜란 때도 그랬소. 사람들이 죽어 널브러진 꼴을 보니 못할 짓이더군. 매일 이 전쟁이 끝나게 해달라고 빌었소.”
“······.”
“그러나 지금 다시 혈겁이 몰아치고 있군. 아마 수 년 내로 끝나지 않겠지.”
허완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이미 고희를 넘겼소. 쓸모가 없지.
늙은 몸이 녹봉이나 타려 병마사 자리에 앉아있었더니 못볼 꼴을 너무 많이 보게 되는구려. 이젠 누가 뭐라 하든 벼슬을 버리고 묻힐 자리나 찾으러 가야겠소.”
“병사 영감이 부럽소이다.”
“모하당.”
허완이 김충선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본래 일본에 있을 때도 무수한 싸움을 겪어왔다 들었소. 게다가 왜란, 역적 이괄의 난, 그리고 작금의 호란까지. 전쟁이 지겹지 않으시오?”
“피를 묻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팔자인게지요.”
김충선은 담담히 말했다.
“나라가 이 몸뚱이를 쓸 일이 있으면 그에 응할 뿐이올시다.”
김충선은 단지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역시 가끔씩 진동하는 피냄새에 몸서리칠 때가 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만약 그것을 생각조차 않게 된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아마 저주일 것이라.”
김충선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체 위에 까마귀가 내려앉아 쪼아댔다.
호란은 끝났다. 그러나 진정한 전란은 이제부터 시작이리라.
그러기에 난세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