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호란의 끝 (6)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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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이 도착했을 때 이미 명군 진영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수은갑(水銀甲)을 차려입은 청군 수백 명이 밀어붙이고, 그 뒤로 청군들이 수도 없이 강물을 헤치고 넘어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명군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패주했다.
"죽어라, 명나라의 돼지들아!"
"살려줘!"
이것은 전투라기보단 도살(屠殺)의 현장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사오이다."
박철균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청군이 사선을 탈취한 모양이군."
이자원은 강변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도하를 가로막아야할 명군의 사선들은 모래톱 위에 선체 일부가 얹혀있었다.
어쩌다가 저게 청의 손에 넘어갔는진 모르겠지만, 수백 명 규모의 바야라들이 일거에 넘어가 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청군이 뒤따라 물을 헤치며 도하하고 있는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숫자 차이가 얼만데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진단 말이오이까?"
이건 숫제 군이라 하기에도 뭣한 수준 아닌가.
"허수아비 1만 구를 세워놔도 이거보단 잘싸우지 않겠소이까?"
"싸워본 적도, 싸울 이유도 없는 자들이니 말이다."
훈련도 투지도 부족. 할줄 아는거라곤 조선을 토색(討索)하는 것 뿐인 가도의 명군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군과는 확연히 질이 달랐다.
"이런 자들에게 조선이 그동안 휘둘려 왔다니 뭔가 허탈하오이다."
"불평할 시간 없다. 이곳의 상황을 감사와 병사 영감께 전하고 오랑캐들이 빠져나가지 못해 막아야 한다."
이자원은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심세괴가 전열을 정비시켜야 시간을 더 끌 수 있을텐데······.'
그러나 청군이 공격을 가하자 마자 궤주해버리는 이들이다. 과연 병력을 제대로 추스를 수 있을지 그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천병들을 구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이까?"
이자원의 고민을 눈치챈듯 박철균이 물었다.
"우선해야 할 것은 심세괴 이하 명군들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라도 오랑캐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하되, 그들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목표를 바꿔라."
이자원의 명령에 의해 다시 조선군 진영 쪽으로 병사 하나가 출발했다.
그러나 중류 일대에도 팽팽히 대치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니 저들이 도하를 마칠 때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야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군 수뇌부가 지원 병력의 파견을 결정한 것은 시기상으론 그리 늦은 것은 아니었다.
명군이 아무리 오합지졸이라 해도 허우적거리며 강물을 헤쳐오는 적들을 사냥하는 것은 어렵잖은 일.
여기에 이자원의 지원 병력이 더해지면 능히 청천강을 지켜낼 수 있었겠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자원은 짜증이 솟구쳤다.
"더 늦기 전에 청군을 분쇄해야 한다! 전군 돌입하라!"
이자원이 명령했다.
그러나 뒤돌아 도망치는 명군들을 헤치고 지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총 나리! 이대로라면 속도가 나지 않사오이다! 어떻게 하오리까?"
이자원은 쌍령에서도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자원이 내놓은 답도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베어라!"
이자원이 탄 전마의 발굽이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는 명군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조선 기병의 창칼과 편곤이 명군에게 쏟아졌다.
"여, 여기도 적이냐?"
"도망가라, 도망가!"
조선군의 거센 돌격에 일가(一家)가 실각(失脚)하기라도 한 듯이 앞다투어 흩어지는 명군들이다.
"쓸데없이 힘이나 빼게 하는 놈들이오이다."
"일부 진영은 전열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찾아보아라."
이자원은 명령했다.
1만이나 되는 명군이다보니 하구 일대에 넓게 진영을 세우고 포진해있다.
"패주하는 천병들이 아군 진영을 찾아 들어가느라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고 있사오이다."
그러나 전황을 한바퀴 둘러보고 온 박철균은 비관적인 보고를 내놓을 뿐이었다.
패닉에 빠져 도망치는 아군은 적보다 위험하다.
원래 역사의 김화 전투에서도 유림이 패주하는 홍명구의 병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덕에 혼란을 최소화하고 청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명군은 그마저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듣기로 본영을 버리고 달아난 가도 총병 심세괴가 패주병의 앞열에 서니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인 것 같소이다."
"가지가지하는군."
그러나 청군들 또한 강을 넘어오는 것만 해도 기진맥진한 상태다.
각 니루의 군교들이 서둘러 휘하 전사들을 정비시키고 있지만 기병대 앞에서는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전부 목을 내놓아라!"
이자원의 기병대가 갓 강변에 기어올라온 청군들에게 짓쳐들어갔다.
빠르게 말에 올라타 반격을 시도하는 청군이었으나, 차가운 강물에 잔뜩 젖은 말들은 주인의 의도처럼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크악!"
박철곤의 편곤에 후드려맞은 청군이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위를 조선군의 말발굽이 짓밟았다.
"죽어라, 솔호 놈!"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창을 내미는 적을 이자원이 환도로 그어버렸다.
그의 환도가 춤출 때마다 청군이 피를 내뿜고 쓰러졌다.
"조선놈들이 쳐들어왔다! 명군보다 놈들이 우선이다! 조선놈들을 막아라!"
니루 어전 하나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쏘아진 화살이 그의 목에 박혔다.
청군이 정예라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 지금 조선 기병은 강변의 청군들보다 명백한 우위였다.
그러자 먼저 도하했던 청군들이 이쪽의 기동을 막기 위해 몰려왔다.
저들도 지쳐보였지만 예기(銳氣)만큼은 살아있었다.
"자칫하면 포위당할 수 있다. 이쯤해서 물러서자."
이자원의 명령에 조선 기병들은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명군 진영을 피해 대령강변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포위를 무산시키고 그곳에서 전열을 추슬러 다시 한번 쳐들어가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번 조선군을 포착한 청 기병은 순순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명령을 듣고 나자 갑자기 미친듯이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장을 보려는 모양입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이미 명군은 전투력을 상실했으니 원병으로 온 조선군을 제압하고 나면 청천강에 쳐진 그물은 구멍이 뚫리게 된다.
그들을 쫓는 것은 전방의 일개 부대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기병들이 그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떡할깝쇼?"
박철균의 물음에 이자원은 답했다.
"싸울 뿐이다."
===
명군은 종잇장처럼 무너졌다.
이참에 강을 건너 명군들을 완전히 분쇄해버리고 조선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내달리면 끝날 일이었지만 역시 하늘은 일이 그렇게 되게 놓아두지 않았다.
방해꾼이 등장한 것이다.
"기주, 저 자입니다. 기주께서 경계하라 이르셨던 자 말입니다."
도이격의 말에 도르곤이 눈을 치켜떴다.
강물을 헤쳐넘어오는 청군을 학살하는 조선 기병.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는 자.
도르곤은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조선왕과 도성에 입성하지 않고 이리로 왔나보군요."
"우리를 잡으러 여기까지 왔다라······ 대단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로군."
도르곤은 냉막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늦었다. 명군이 패주하고 나면 저 정도 병력으로 어찌 우리 군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겠느냐?"
그러나 피해를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이격."
"예, 기주."
"이 참에 갑사창에서의 복수를 하도록."
"명을 받들겠나이다!"
도이격이 대답을 마치고 말을 재촉하려 할 때였다.
"잠깐."
도르곤이 말했다.
"내가 직접 가겠다."
"기주, 위험합니다!"
"놔두면 두고 두고 화근이 될 자다.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도르곤은 도이격의 만류에도 안모도(雁毛刀)를 빼어들었다.
"양백기(鑲白旗)! 나를 따르라!"
도하 순서를 놓고도 친왕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사선을 탈취하는 것은 적들에게 기습을 가할 바야라들이었지만, 청군이 한둘이 아닌 만큼 그 뒤에 강을 건너야 하느냐도 논쟁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다행히도, 도르곤 휘하의 양백기는 이미 도하를 완료한 상태였다.
도르곤은 양백기 기병들을 데리고 조선군을 향해 돌격했다.
놈들은 당황했는지 뒤로 물러났지만, 곧 도망칠 곳 따위는 없어질 것이었다.
그때 조선 기병이 반전(反轉)해 청군에게 부딪혀왔다.
선두의 창칼이 교차한다. 피아가 뒤섞이며 피를 내뿜었다.
그야말로 난전(亂戰). 전술 따윈 없는 순수한 힘의 대결이 펼쳐졌다.
'기량으로는 우리 군이 우위. 그러나 춥고 지쳤다. 숫자야 우리가 더 많으니 조여가면 되겠군.'
서로를 향한 살육이 끝나고 나자 남는 공간으로 양측이 물러서며 자연스레 빈틈이 생긴다.
다시 한번 공격을 명하려는 그때, 적이 뭐라고 외쳤다.
"군기를 보니 양백기인 것 같은데 혹시 지휘관이 도르곤이라는 자인가!"
옆의 부관 같은 자가 만주어로 다시 외치고 나서야 도르곤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가.'
도르곤은 응해줄 마음이 없었다. 전부 죽여버리라고 외치려던 찰나, 저쪽에서 또 고함을 질렀다.
"제안을 하겠다! 너희 양백기는 뒤쫓지 않으마! 대신 정람기가 있는 곳을 알려다오! 그놈들의 수급을 얻어가지!"
도르곤은 눈을 치켜떴다.
'놈, 팔기의 구도를 꿰뚫고 있구나.'
정람기는 호거 휘하의 부대. 조선군이 도르곤의 양백기와 싸우지 않는 대신 정람기를 친다면 황위 경쟁에 앞서 호거를 차도살인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기주, 저 제안을 받아들일 작정이십니까?"
도이격이 도르곤에게 물었다.
확실히 지금 당장 청에 돌아가게 되면 호거가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그 본인은 이번 전쟁에서 큰 실책을 범하지 않았고, 사죄문으로 인한 정치적 타격이야 여기 있는 모든 친왕들이 입은 것이니까.
하지만 도르곤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이격. 우리 대청이 이렇게 비루한 꼴이 된 것은 한이 돌아가신 후 친왕들이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런 간악한 꾀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도르곤은 그러면서 안모도를 겨누며 소리쳤다.
"어디 얕은 수작을 부리느냐! 한을 시해하고 신의를 저버린 너희 조선놈들의 말을 들을 것 같은가! 양백기, 쓸어버려라!"
도르곤의 말에 양백기가 재차 돌격했다.
조선군의 지휘관은 걸려들지 않아 아쉽다는 표정으로 역시 환도를 휘둘렀다.
그때였다.
"기, 기주!"
도이격의 외침에 도르곤이 그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또다른 조선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병력이 튀어나온 것인가? 두두가 조선군을 붙잡고 있는게 아니었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도르곤의 생각이 끝날 새도 없이 그의 입에서 명령이 튀어나왔다.
"양백기, 지금 당장 명군을 뚫어라! 조선군들이 합류하기 전에 말이다!"
저들에게 발이 묶여 있을 틈은 없었다. 다행히도 조선 기병 측도 병력이 많이 상했다. 뒤를 쫓기보단 몰려오는 조선군에 합류하리라.
도르곤은 호위 병력을 이끌고 물러서기 전에 저쪽을 향해 물었다.
"네놈, 이름이 뭐냐."
도르곤의 물음이 통역을 거치고 나자 조선 군관이 대답했다.
"훈련도감 파총 이자원이다."
"이자원······."
도르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네 이름을 기억하마."
"돌아가면 내 이름을 생각할 겨를은 없을 것이다."
이자원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가 너희들의 목을 노릴테니까."
도르곤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렸다.
"파총 나리,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쫓는 편이 낫지 않겠소이까?"
"글쎄."
박철균의 말에 도르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자원은 대답했다.
"그보단 두 호랑이가 서로 물어뜯게 하는 편이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