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호란의 끝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능원대군은 거칠게 끌려와 친왕들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다이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너의 신병을 우리가 쥐고 있는데도 조선놈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둘 중 하나로구나. 네놈이 가짜거나, 아니면 조선왕이 제 숙부를 버렸거나. 어느쪽이냐?"
"저자가 죽은 선왕의 친동생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잉굴다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조선왕이 친족을 저버릴 결심을 한 셈이로군."
다이샨이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조선왕은 자기 숙부만 버린 것이 아니라, 나라간의 신의까지 구렁텅이에 처박았다.
'예법이나 읊을 줄 아는 문약한 자들이 잘도 그런 결심을 했군.'
"그래, 너는 일이 이리 될줄 알고 있었느냐?"
덜덜 떨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능원대군에게 다이샨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것을 알았겠습니까? 저를 조선 진영에 보내주시면 당장 서북군을 꾸짖어 길을 열겠사옵니다!"
능원대군이 조선어로 뭐라 지껄였다.
굴마훈, 정명수가 통역했지만 다이샨이 그따위 말을 믿을리가 없었다.
"능원대군을 방패로 삼아서 강을 건너라. 화살을 쏘든 총을 쏘든 조선놈들의 손으로 죽이게 해."
다이샨은 명령을 내리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제기랄!"
모멸감을 참아가며 화약을 맺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위기를 벗어나면 이 조선이란 나라를 모조리 갈아마셔버릴 것이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던 다이샨이지만 감정의 동요를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비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군이 북상하고 있다고."
재정비를 마친 조선군은 임금의 명령대로 청군의 뒤를 쫓아 올라오고 있다.
"이래서 그냥 한양을 불태워버렸어야 한다고 했지 않소!"
호거가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은 이 궁지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요, 숙친왕. 화친은 우리 모두가 동의한 일. 책임을 떠넘겨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소."
그렇지 않아도 다들 심기가 불편한 판이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호거에게 도르곤은 핀잔을 주었다.
"일부 병력은 여기 남아 조선군을 견제하고 나머지는 아래쪽으로 돌아 강을 건너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구 쪽이라면 강폭이 넓어 적들도 경계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도도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평양에서 곧게 북진한 청군은 청천강 중류의 안주 운학리 일대에 주둔 중이다.
그곳에서 70리를 내려가면 바다에 면한 청천강 하구가 있는데, 아무래도 견제가 덜할 것이라는 공산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네 말대로 강폭이 넓으니 대부분의 물자는 가져갈 수가 없다. 이미 한양에서 많은 병기와 말을 버리고 왔는데 몸만 건져서 돌아가잔 말이냐?"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막심한 손해를 본 상태라 차마 그러자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다이샨이었지만 도도가 계속 설득을 해나갔다.
"우리 대청(大淸)은 사람이 귀하고 물자는 그 다음입니다. 부족한 물자는 요동의 한인(漢人) 철장들을 부지런히 다그치고 다시금 화북을 약탈해서 보충하면 됩니다."
도도가 강변했고 친왕들은 생각에 잠겼다.
"청천강만 건너면 야루(ᠶᠠᠯᡠ ᡠᠯ, 압록강) 일대에 우리 군이 배를 대기시켜놨을테니 금방 복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우리 사람들을 보존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명에 비해 그 호구가 극히 부족한 청으로서는 병사 하나하나가 귀중하다.
"급보입니다!"
그때 척후로 보냈던 전사가 뛰어들어왔다.
"명군(明軍)이 청천강 하구에 진을 쳤습니다. 그 수는 약 1만입니다!"
"1만! 가도 놈들이 작정을 했나보군!"
그렇다면 도도의 계획도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친왕들은 침음성을 흘렸다.
오로지 도르곤만이 눈빛을 빛냈다.
"이러면 어떻게 해야하오? 가도 명군이 아무리 약졸이라 한들 이리 나오면 압사당하는 수 밖에 없을텐데!"
"걱정하지 마시오."
호거가 당황해 소리치자 도르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명군을 알고, 명군도 그 자신을 알지요."
도르곤이 말했다.
"오히려 돌아갈 길이 보이는 것 같소이다."
===
"우리 친왕들께서는 이미 형세가 외로운데다 천병이 돌아갈 길을 막고 있어 스스로 보전할 수 없다 여기시니, 이에 몸을 묶어 항복하고자 하십니다."
"하하하! 그럴줄 알았다."
사절로 온 잉굴다이의 말에 심세괴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심 모가 천조가 열린 이래 제일의 대공을 세우게 되겠구나!"
심세괴가 가도를 장악한지도 벌써 수년. 그는 명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밀무역과 약탈로 겨우 무리를 유지할 뿐, 정규군이라 하기도 힘든 도적떼가 바로 가도의 명군이었다.
그렇기에 조선군의 지휘권을 집요하게 노린 것이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심세괴는 마음이 급했다.
그런 판에 청군이 여력이 다한 것인지 목숨이라도 건지고자 항복 의사를 밝혀오니 심세괴로서는 기꺼울 수 밖에 없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병략이다. "
사실 싸울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다만 조선과는 이미 원한을 맺어 그리로 가면 친왕들의 안위가 위태로울 것이므로 장군께 항복하는 것이니 모쪼록 이 점을 고려해주십시오."
잉굴다이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예로부터 오랑캐라 할지라도 항복하면 초무(招撫)해줌이 관례였다. 개국 때의 나합출(納哈出, 나하추)도 그랬지 않은가? 너희 수괴 황태극만이 근심이었으나 이미 죽었으니 다른 이들은 내가 직접 천자께 아뢰어 복록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
나하추는 옛날 원나라 말엽의 몽골 군벌로서 북원의 세가 다하자 명에 항복해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진 사람이다.
심세괴가 진실로 청의 친왕들을 위로해주고자 하면 나하추의 예를 드는 것이 옳기는 했으나 심세괴에게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말을 믿고 항복한다면 좋은 꼴을 못볼게 뻔했지만, 잉굴다이는 그저 다음과 같은 청만 꺼낼 뿐이다.
"오면서 강 어귀에 사선(沙船) 여러 척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왕들께서 거기에 타서 항복하러 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사선은 수심이 얕은 연안이나 하천 일대를 지나가기 좋도록 설계된 배였다.
서해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하던 가도군은 이 배를 주로 활용했고 당연히 지금도 쓰고 있다.
"좋다. 네 주인들도 윗사람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할테니, 구태여 물에 젖어가며 강을 건널 필요는 없을 터. 배를 내어주마. 우리 군영에 오면 환대하겠다 일러라."
"예, 장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잉굴다이를 보며 심세괴는 얼굴에 비웃음을 떠올렸다.
'머저리 같은 조선놈들. 네놈들이 공을 독식하려 한 덕에 오히려 눈치보지 않고 오랑캐들의 항복을 받아줄 수 있게 되었구나. 게서 손이나 빨며 이 심세괴가 대공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아라.'
===
"두두, 외번몽고군과 함께 이곳에 남아라. 공순왕과 지순왕은 우전 초하를 이끌고 조선군의 북상을 지연시키시오. 마부타가 그대들을 지원할 것이오."
친왕들은 포위망을 뚫기 전 누군가가 후위를 지켜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그게 자신들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최대한 자기가 쥐고 있는 팔기를 보전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 덕에 조선군을 견제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누르하치 시절에 숙청당한 추옝(褚英)의 아들이라는 약점을 지닌 두두나, 이미 역적의 낙인이 찍혀 청에 코가 꿰여버린 공유덕과 상가희가 그들이었다.
'설마 우전 초하가 배신하지는 않겠지?'
'같은 한족이라도 쿠툴러들과 우전 초하는 다르오. 우전 초하는 팔기와 대우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고, 명과의 싸움도 여러 차례 도맡았으니 신뢰할 수 있지.'
전투 때 쿠툴러들이 손을 들어버리면서 갑사창을 내어주어야 했던 청군이기에 호거가 미심쩍게 물었지만 도르곤이 무마했다.
그 말처럼 다이샨의 명령을 들은 공유덕과 상가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조선군의 발을 붙들겠습니다."
"그대들을 버림패로 쓰는 것은 아니오. 우리가 강 저편을 장악하고 나면 즉각 도하를 위해 따라 올라오시오."
다이샨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우리라도 살아 돌아가야 한다.'
===
- 투둥!
조총의 총구에서 초연이 뿜어져나오며, 또 하나의 청군이 유명을 달리했다.
적은 새까맣게 강을 덮으며 몰려오기도 해보고, 건너편에서 화살이나 쏴대며 견제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조선군의 수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저 양반은 목숨도 질깁니다."
청군들이 황급히 물러나며 끌고 가는 남자를 보면서 박철균이 말했다.
"능원대군 대감 말인가?"
뒤통수를 거하게 후드려맞은 청군은 쏴볼테면 쏴보라는 것인지 그 뒤부터 능원대군을 매달아 진격해왔다.
조선어로 악을 쓰는 중년 남자를 보자 조선군은 당황했다.
아무리 신경쓰지 말고 싸우라는 명령이 있었다지만 감히 종친을 쏘기란 상당히 주저되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잠시 동요가 일어났을 때, 이자원이 나섰다.
'너희는 저게 능원대군 대감으로 보이느냐! 이 중에 대군의 얼굴을 본 자는 있는가! 그렇다면 청군이 꾸며낸 자가 아님을 어찌 확신한단 말이냐?’
그러면서 활을 쏘아 능원대군을 붙잡고 있던 청군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자칫 잘못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군사들이 다시 보니 과연 조선어로 뭐라 외치고는 있으나 도저히 분간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자, 막상 아군도 흥분에 그걸 신경쓸 틈이 없어 화살과 총탄이 마구 날아다녔다.
보통 사람 같으면 유시(流矢), 유탄(流彈)에 맞아 죽었으련만 그런 틈바구니에서 능원대군은 용케 살아남아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파총."
그때 한창 지휘를 도맡고 있던 이자원을 임경업이 불렀다.
"무슨 일이시오이까, 부윤 영감."
"청군 상당수가 하구 쪽으로 이동한 것 같네. 아무래도 그쪽으로 도하하려는 것 같아."
"그곳에는 이미 명군이 있지 않사오이까?"
여러 요인으로 인해 오히려 그쪽에서 도하하긴 더욱 힘들 터다.
그러나 임경업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말한 것처럼 가도의 천병은 잡졸떼나 마찬가지네. 강 어귀 정도야 지킬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 모조리 패주해버릴게 뻔해."
"허면 어째서 명군에게 지휘권을 넘기자고 하셨소이까?"
갑자기 명군의 저조한 전투력을 언급하는 임경업에게 이자원이 물었다.
"심 총병의 뒤에는 대명(大明)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대국인들이 얼마나 콧대 높은 자들인지를 아네. 화근을 만들고 싶지 않으면 어느정도 숙여주는 것이 필요해."
"그렇소이까."
임경업은 명과 조선 양국을 위해 한 주장이라고 하지만 이자원은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의 생각처럼 명이 건재하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거인일 뿐이다.
"그래서, 소관에게 명하실 것이 무엇이오이까?"
구태여 그를 찾아온 이유가 지리한 해명이나 하려고는 아닐 것이다.
임경업은 큼큼대며 말했다.
"마병(馬兵) 일부를 이끌고 천병을 지원하게. 이것은 감사 영감과 병사 영감도 동의하신 부분일세."
이자원은 이미 쌍령과 남한산성, 갑사창에서 지휘력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임경업이 자기 휘하의 군관들을 놔두고 이자원을 찾아온 것이리라.
명군이 무너지면 포위망의 한축이 뚫리게 된다.
유림과 홍명구가 이를 염려한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불행히 그것은 기우(杞憂)가 아니었다.
"청군이 청천강을 넘었사오이다!"
이자원이 채 차비를 마치고 출발하기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