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2화 (22/213)

〈 22화 〉 호란의 끝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원래 역사에서 평안병사 겸 안주목사 유림은 2천 명을 이끌고 평안감사 홍명구의 3천 군세와 합세,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하했지만 이자원의 활약으로 그럴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인지라 서북군은 대부분 안주에 머물러 있었다.

백마산성에서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 임경업이 나와 합류하며 안주의 병력은 더욱 늘어났다.

이자원이 안주에 닿은 것은 산성에서 출발한지 7일째 되던 날이었다.

교지를 받들고 온데다, 지금 전황을 중앙에서 내려온 그보다 더 잘 파악하는 이가 없었으니, 홍명구는 급히 이자원을 안으로 들이게 했다.

그리고 이자원에게서 그간의 일을 전해들은 서북군 수뇌부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이 개같은 오랑캐들이!"

임경업은 거세게 탁상을 내리쳤다.

인조의 부음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는 군중(軍中)임을 잊을 정도로 분노했다.

"이것은 주상 전하께서 내리신 교지이오이다."

시기상 이미 즉위를 마친 후이니 이자원은 자연스럽게 세자를 주상으로 칭했다.

교지를 전해받은 홍명구는 사배(四拜) 후 진중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감사 대감, 주상 전하께서 무어라 명을 내리셨소이까? 저 오랑캐들을 단숨에 쓸어없애라는 왕명이지요?"

한참 말이 없던 홍명구를 향해 임경업이 뭐라 말을 해보라는 듯 외쳤다.

"······우선, 청군은 우리와 화의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오."

"말도 안되는!"

"그러나,"

홍명구는 임경업을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사냥을 할 때는 속임수를 써 짐승을 몰아넣기도 하는 법. 이곳 청천강에서 오랑캐들의 발을 붙들고 도원수의 군대와 함께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이오."

"마침 날이 좋으니 곧 청천강의 얼음이 풀릴 것이오이다."

평안병사 유림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날씨는 점차 따뜻해져가고 있다. 날짜가 어느덧 1월 하순으로 접어들었으니 양력으로는 2월을 반이나 넘겼다. 혹한에 얼었던 강들은 서서히 해빙이 진행되었다.

"지금 서북군이 7천. 강을 끼고 버틴다면 충분히 도원수 대감이 올 때까지 오랑캐들을 막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유림이 말을 이었다.

"여기 훈련도감의 이 파총도 있으니 말이외다."

홍명구와 임경업의 시선이 이자원을 향했다.

홍타이지가 죽은지도 여러 날이라, 이미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서북군 장수들이다.

그러나 그 장본인이 눈 앞에 있으니 느낌은 사뭇 달랐다.

"비단 황태극을 격살한 것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승전도 거둔 명장이라 하니 분명 도움이 될 것이오이다."

유림은 군문에 몸을 담은지 오래된 숙장(宿將)이다. 그런 사람이 칭찬하니 낯이 간지러울 법도 하건만, 이자원은 표정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청군을 어떻게 붙들지 궁리를 해보는 것이 좋겠소."

홍명구가 논의를 위해 말을 꺼냈다.

"군대가 가장 무방비해질 때는 강을 건널 때이니, 우선 화약(和約)에 따르는 척 하며 청군 일부가 강을 건너오면 들이쳐서 모조리 섬멸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이까?"

유림이 그렇게 제안할 때였다.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 감사 대감, 가도에서 사람이 왔사오이다."

"뭐라?"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무슨 일 때문이라 하더냐?"

"오랑캐와 싸우는데 협조를 명하러 왔다고 하오이다. 이미 천병(天兵)이 섬에서 나왔다고 했사오이다."

홍명구와 유림, 임경업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고, 이자원은 조용히 눈매를 좁혔다.

===

1만.

가도 총병 심세괴(沈世魁)가 출륙하며 끌고 온 병력의 숫자였다.

가도의 병력이 1만 2천이었으니 최소한의 수비군만 빼놓고 전부 상륙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군은 독 안에 든 쥐이니 자신들이 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거로군.'

이자원은 청이 궁지에 몰리지 않았던 원래 역사를 떠올려보았다.

가도의 명군은 병자호란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에 쫓겨 회군하는 청군을 보자 욕심이라도 생긴 것일까, 전력을 끌어모아 뭍으로 나오다니.

만약 명군이 그저 포위에 가담할 뿐이라면 조선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심세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선을 넘었다.

"지금부터 서북의 조선군도 자신들이 지휘하겠다고? 심세괴, 이 자가 미친 것인가?"

심세괴의 서신을 읽은 홍명구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과 싸우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협력하라니.

"······그래도 천장(天將)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이까?"

임경업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심세괴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전하의 교지 어디에도 명군의 지휘를 받으라는 어명은 없네. 우리 강토가 유린당하는 동안 섬 안에서 관망만 하던 자들이야. 이제 와서 자기네 명령을 들으라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네."

유림이 흥분한 투로 말했다.

모문룡(毛文龍)이 가도에 입보한 이래로 조선 조정은 웬만하면 그들의 떼를 다 들어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상국의 장수라 해도 엄연히 지켜야할 도리가 있거늘 숫제 맡겨놓은 것처럼 우리 군대를 달라니.'

홍명구 또한 마찬가지 생각이었으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경업의 말도 그랬다.

"감사 대감, 이것은 우리 선에서 처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이다. 차라리 도원수께 파발을 보내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사오이까?"

"도원수 대감도 그 서신을 받지 않았다면 다행이겠지요."

이자원은 딱 잘라 말했다.

"윗선에 물어 결정을 하자면 도원수 대감도 말을 돌릴 것이고 결국 한양에 계신 전하께 여쭙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시간이 있겠사오이까."

결전이 눈 앞에 다가왔는데 심세괴에게 지휘권을 맡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고, 비답을 받는 것은 말이 안된다.

"허면 총병의 말을 들어야지!"

임경업은 답답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가 의지할 곳은 대국의 군대 뿐인데 불화가 생기면 되돌리기 힘드네. 그러니 공을 양보하더라도 지금은 천병과 협력하는 편이 나아. 통제공 이순신이 그랬지 않은가."

"이 통제는 대신 전투는 자신이 도맡았지요."

이자원이 반박했다.

"가도의 명군은 그간 서북을 수탈할 뿐, 제대로 싸워본 적이 있는지도 의문인 군대오이다. 그런 자들의 지휘를 받는다면 필경 다 잡은 고기를 놔주게 될 것입니다."

홍명구는 고심했다.

명군과의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따로 움직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명군의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수많은 상념들이 스쳐지나갔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본 가도 명군은 무능했다. 그런 자들에게 군부의 치욕을 갚는 대업을 맡길 수 있을까?

"심 총병에게 제안을 거부하겠다 말하겠소."

상국이든 무엇이든 조선의 신하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임금의 복수가 아니겠는가.

===

우여곡절 끝에 명군 1만과 조선군 7천은 진을 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듣기로 너희 조선이 이미 오랑캐와 화친하여 그 군사를 돌려보낸다 하였는데, 그것은 상국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해명하기로 오랑캐를 속이는 계책이라 했으나 진위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천병의 지휘를 받도록 하라.」

심세괴는 포진 후에도 집요하게 지휘권을 요구해왔다.

이를 감당하는 것은 이자원의 몫이었다.

"화친은 없소. 나는 황태극을 죽이고 역적 경중명의 목을 벤 사람이오.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조선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 전하시오."

"그, 그게 정말입니까?"

통변을 하러 나온 조선 출신 가도인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통역을 들은 가도의 장수도 마찬가지였다.

"믿기지 않거든 우리 조정에 확인을 하면 될 일. 거짓이라면 내 목이 잘리겠지."

이자원이 이렇게 버티고, 유림과 홍명구도 명군의 지휘를 거부하자 심세괴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결국 공조(共助)로 방향을 선회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전후(戰後)에는 골치를 좀 썩일 듯 했다.

그리하여 명군은 대령강이 흘러들어가는 청천강 하구에 진을 치고 조선군은 중류에 진을 쳤다. 명군이 수군으로 하구를 봉쇄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해서였다.

그리고 청군이 도착했다.

===

친왕들은 조선을 온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화친을 맺은 것은 세가지 이유에서였는데, 그것말고 길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굴욕적인 조선의 요구를 다 들어줬으니,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뒤통수를 치겠냐는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능원대군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두번이나 거짓말로 가짜 왕족을 보내 사기를 시도한 덕에 오히려 진짜 왕제를 보낸 이번에는 신뢰도가 올라간 셈이다.

이제 그를 써먹을 때가 왔다.

"이미 우리나라와 조선은 화친을 맺었소. 우리가 왕제를 데리고 있고, 여기 조선왕 전하의 명령서도 있으니 서둘러 길을 여시오."

막사에 도착한 마부타가 그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청천강을 건널 때 능원대군 대감을 돌려보내겠다 하는데, 정확히 언제 속환할 것이오?"

"우리 군이 청천강을 전부 건넌 후, 후위대가 왕제를 그대들에게 데려다 줄 것이오."

마부타의 말에 서북군의 제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타가 확답을 받아오자 청군은 청천강을 건너 움직이기로 했다. 코 앞의 조선군 진채는 피하여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다.

강은 녹았지만 겨울이라 유량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허벅지까지는 충분히 적시는 정도의 수위인지라 청군들은 뼈를 깎는듯한 차가움을 느끼며 도하했다.

"드디어 저 강만 건너면 되는가······!"

청군 호군교 다이진(多爾津)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조선을 침공할 때 본 기억으로는 청천강을 지나면 대군이 막아설 곳이 없다. 압록강도 건너야 하지만, 그 뒤편은 청나라의 땅이니 패전 소식을 들은 아군이 마중을 나와 있을 터.

이 지옥 같은 땅을 드디어 벗어난다는 생각에 웃음꽃이 피는 그다.

그도 처음에야 한이 죽었는데 어찌 군대를 물리느냐며 분노했었지만 여기까지 올라오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생각은 날아간지 오래였다.

비록 말을 타고 강을 건너긴 힘든 까닭에 직접 찬물에 하반신을 담그고 말을 끌어야 했지만 집에 돌아간다는 기쁨은 고통을 감내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다이진의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청군 선봉이 열심히 청천강을 건너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기병이 나타났다.

"오랑캐들아, 어디를 가느냐!

조선군이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모두 해치워라!"

겨우 건너편 강변에 닿은 청군들은 미처 무기를 고쳐잡고,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조선 기병에게 도륙당했다.

"조선놈들이 약속을 어겼구나!"

다이진은 경악해서 외쳤다.

그러나 그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선군들이 쏘아올린 화살에 목이 꿰뚫려버리고 만 것이다.

강변으로 조선군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다이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능원대군을 불러와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