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0화 (20/213)

〈 20화 〉 호란의 끝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잉굴다이와 정명수가 방문한 직후부터 남한산성에는 조정이 화의를 맺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원상들을 비롯한 조정의 고관(高官)들이야 이것이 화전양면전술(和戰兩面戰術)임을 알고 있었지만 유생과 종친들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저하! 오랑캐들과 화의를 하는 것은 대행 대왕의 넋을 모욕하는 일이옵니다!"

"저하께서 친정하시지 않는 틈을 타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에 앞장서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원상들은 그것을 막기는 커녕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이것이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도란 말입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군부(君父)의 죽음을 겪고도 화친을 하겠사옵니까! 모쪼록 최명길의 목을 베시고 도원수로 하여금 도성을 들이치라 하십시오!"

행궁 하궐 앞으로 몰려온 유생들이 통곡을 해댔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 세자는 머리가 아팠지만 대놓고 저들에게까지 작전을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입단속을 잘하라 일렀거늘······."

척화의 무리들 중 신익성에게 언질을 받은 고관들을 제외하고는 다 뛰쳐나온 듯 했다.

"저 난리를 주동하는 자들이 누구라 하더냐?"

세자의 물음에 내관이 답했다.

"대군사부(大君師傅) 송시열이라고 하옵니다."

"하아."

그 말에 세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군사부를 천거한 것이 이판이라 들었는데 가차없구나."

최명길이 화의의 실무를 맡은 탓에 모든 화살은 그리로 돌아갔다.

원상들도 비판을 피하진 못했지만,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런 비난은 곧 가라앉을 터.

비록 최명길이 잘 보좌하지 못한 탓에 선왕께서 돌아가셨다고는 하나 세자로서는 그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안타깝다고나 할까.

그런 안타까운 시선은 악명을 뒤집어쓴 최명길 뿐만 아니라, 눈 앞의 중년 남자에게도 향했다.

"숙부."

'그대'도 아니고 '경'도 아닌, 정말로 여염(閭閻)의 조카가 작은아버지를 부르는 듯한 호칭.

그 호칭에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는 당황했다.

"저하, 어찌하여 신에게······."

"숙부께서는 잠저(潛邸) 시절부터 저를 귀여워 해주셨지요. 잠시 그 때의 추억을 되살려 부른 것 뿐입니다."

"황공하옵니다."

엎드린 능원대군은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세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숙부께서는 제게 참 의미가 각별한 분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종실의 큰 어른이기도 하시지요. 원종대왕의 세 아들 중 남으신 분은 숙부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사옵니다."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에게는 적자로 세 아들이 있었다. 적장남인 능양군은 곧 인조이니 남한산성에서 죽었고, 적삼남 능창군은 광해군 시절 역모에 엮여 죽었으니 정말 남은 사람은 능원대군 뿐이다.

그 밖의 자식으론 능풍군도 있지만 서자에다 일찍 죽어 논외이다.

"그렇다면 신이 감히 종실을 대표하여 한 말씀을 올리겠사옵니다."

이러다간 계속 세자가 말을 돌리겠다 싶었던 능원대군이 직접 입을 열었다.

"대행 대왕께서 청병의 총에 맞아 망극한 일을 당하셨음에도 어리석은 신하들이 화친을 논의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사옵니다.

임금이 오랑캐의 손에 돌아가셨으니 비록 사직이 망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도륙된다 할지라도 싸워야 하거늘, 하물며 작금의 유리한 형세에겠습니까."

"적들이 외롭고 고단하다 하지만 조상의 능묘와 백성들을 쥐고 있으니 고민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싸워서 징벌해야 마땅할 것이옵니다. 임금과 백성은 그 의리로 따지자면 아버지와 자식이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지 않을 자가 어딨겠사옵니까?

또한 오랑캐가 사세가 급하여 여러 대왕들의 능묘를 파헤친다 하면 매우 통탄스럽겠지만 그렇다고 화친을 맺을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능원대군은 열변을 토했다.

과연 남한산성에서도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명나라가 망하자 집문을 걸어닫고 통곡하던 골수 척화파다웠다.

그러나 세자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눈빛이었다.

"저하, 결단을 내리시옵소서. 저하와 신을 포함해 이 땅에 머무르는 생령 중 대행 대왕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으니, 누구든 원수를 갚자 하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능원대군이 보다못해 재촉하자 세자는 그제서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결심이 선 듯한 세자가 말을 이었다. 어느틈에 말투는 여느 신하들을 대할 때처럼 예사높임으로 낮추어져 있었다.

"나도 화의를 이룰 생각은 없소. 다만 도성을 온전히 되찾기 위해서 꾀를 부린 것 뿐이오."

"하오면!"

능원대군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지만 세자의 표정은 반대로 딱딱하게 일그러져갔다.

세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들이 화친을 믿게 하기 위해서 청천강까지 인질을 붙여주기로 했소. 오랑캐가 믿을만큼 종실에서의 지위가 높은 사람을."

"누구를······ 생각하고 계시옵니까?"

능원대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바로 숙부요."

그 말을 내뱉는 세자의 입술은 떨렸다.

"저, 저하!"

"숙부라면 흔쾌히 목숨을 걸어주리라 믿소."

세자의 말에 능원대군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저하, 대, 대행 대왕께서 신을 아낀 정을 생각해서라도 부,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숙부,"

세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감정을 떨쳐내야 한다.

"분명 방금 전까진 이 나라 산하의 모든 백성이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 않았소? 감히 나를 기망한 것인가!"

세자의 주먹쥔 손이 서안을 내리쳤다.

"기군망상(欺君罔上)은 종친이라 해도 봐줄 수가 없고, 화가 자손들에게까지 미치는 대죄(大罪)이거늘!"

"저하, 저하.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세자는 심호흡하는 시늉을 했다.

그는 조금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오랑캐들을 모조리 쓸어 없앨 기회가 왔습니다. 그런데 숙부는 한 목숨을 두려워 하십니까? 저들이 숙부만 보내면 도성에서 물러나겠다 하는데도요."

"신은······."

"걱정 마십시오, 숙부."

세자는 능원대군의 말을 막았다.

"영풍군과 영은군, 영신군은 조카가 친형제처럼 돌보겠습니다."

저 셋은 모두 능원대군의 서자들이다.

적자가 없는 능원대군의 후사를 이을 자식들. 그들을 거론하자 능원대군은 눈물을 흘렸다.

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후일 저들의 신병을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

배신감에 눈물까지 흘렀지만 능원대군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오로지 이 말만 할 수 있을 뿐.

===

세자는 쓰라린 마음을 안고 능원대군이 물러간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짜 왕제를 보냈다 일이 잘못되면 모든게 허사로 돌아간다.'

그것이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다고 강화도에 있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불러올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정말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안될, 그런 동생들이었으니까.

해서 세자는 직접 능원대군을 선택했다. 마침 청이 요구한 것도 그였다.

도성과 숙부.

세자는 전자를 골랐고, 그래서 숙부를 강제로 찍어눌러 사지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이 임금의 통치란 말인가?

돌아가신 부왕께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저하."

곁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자가 부른 인물이다. 입궐을 시켜놓고 아무말도 없으니 자신을 부른 것이리라.

"이 파총."

세자는 이자원(李子元)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가 나라도 이런 선택을 했을까?"

"물론이옵니다."

이자원은 즉답했다.

"망설임이 없군. 아니, 그대는 항상 그랬지."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세자는 이 자를 좀 알 것 같았다.

모든 일에 확신을 가지고 뛰어드는 인간.

설사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더라도, 그것을 돌아보지는 않을 인간.

여러모로 자신과는 달랐다.

번뇌하는 세자는, 이왕(李汪)은 자조하며 말했다.

"온전히 도성을 되찾기 위해 숙부를 팔았다. 그것이 옳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어째서냐?"

신하들에게 하문(下問)하면 틀림없이 춘추시대의 옛 고사에 빗대어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위로할 것이다. 이러저러한 성군들도 행하였으니 예와 덕을 잃는 일이 아니라고 하리라.

그러나 이자원은 달랐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기 때문, 아니겠사옵니까."

예와 덕 따위는 상관없다.

도성을 피해없이 수복한다는 목적이 옳기 때문에 그 수단도 옳은 것이다.

이자원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너에게 들을 얘기는 다 들은 것 같구나. 이만 물러가보아라."

세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배우지 못한 무부(武夫)의 말이로다.'

능원대군의 일로 번민하던 그를 더욱 흔들어놓은 이자원이었다.

이자원은 세자 자신과 다르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기에 망국(亡國)의 직전에서 나라를 구한게 아닐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세자는 끊임없이 그 말을 되뇌였다.

해가 지고, 농성하는 유생들이 흩어지고, 능원대군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질 때까지.

===

삼전도(三田渡).

원래 역사에서는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을 절하고 아홉 번을 고개 조아린 치욕의 장소이지만, 두 사람 다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지금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삼전도는 이곳에서도 화의를 맺는 장소로 간택되었다.

송파 인근 하중도(河中島)의 나루터인지라 양 세력의 경계에 걸쳐져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조선의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나라 호부승정 타타라 잉굴다이는 이곳에서 만나 사람과 국서를 교환하기로 했다.

"기어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군."

포박당해 끌려온 요토는 모래밭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이놈! 주상 전하를 시해한 오랑캐놈이 감히 어디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게냐!"

"네놈은 거열당해 마땅하다!"

삼전도의 조선 신하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닥쳐라, 멍청이들아! 그날 성벽을 넘은 것은 바야라들이지 우전 초하 따위가 아니거늘 어찌 총으로 너희 임금을 죽일 수 있었겠느냐!"

요토가 발악하며 소리쳤지만 만주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 관리들은 그저 죽을 때가 되니 놈이 저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잉굴다이도 이 상황에서 화친을 파할 수 없으니 가만히 요토의 입을 막을 것을 지시했고 말이다.

"이들이 그날 야습을 감행한 장수들이오. 직접 조선왕 전하를 시해한 우리 전사들은 그쪽이 처리했다 하였소?"

"그렇소."

최명길은 그 날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감췄다.

죄책감에 속은 뒤틀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훙서하신 전하의 동생, 능원대군 대감이올시다."

"처음 뵙겠소이다, 대군."

잉굴다이는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능원대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눈짓하자 청군에 붙잡혀 있던 능원대군저의 하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는 뜻이었다.

"대군께서 길잡이를 해주신다니 우리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습니다."

잉굴다이는 제법 진심으로 말했다.

퇴로를 열어준다는 유일한 보증이 바로 능원대군 아니겠는가.

이제는 양국의 국서를 교환할 차례였다.

최명길은 잉굴다이에게 두 개의 문서를 내밀었다.

모든 것을 잊고 화친할 것을 다짐하는 국서와 서북의 조선군에게 화의가 성립되었으니 공격하지 말 것을 이르는 명령서였다.

잉굴다이가 내민 것은 역시나 화친에 관한 국서와 다이샨이 대표로 쓰고 친왕들이 수결한 사죄문이었다. 만주문으로 한 부, 한문으로 한 부.

"허, 이것 참."

노추 노이합적이 나라를 세운 이후로 오랑캐들이 사과라는 것도 할줄 알던가.

미리 화친 조건에 들어가있던 내용이지만 최명길은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최명길은 한문으로 된 사죄문을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