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호란의 끝 (1) 수정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화친을 빙자하여 적을 도성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간계로 오랑캐를 속이자는 말이오?”
세자는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오랑캐를 속인다는 부담감 때문은 아니었다.
청과의 협상을 위해 형조판서로 승진했던 심집 같은 이는 정작 능봉군 이칭을 인조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낼 때 “평생 충과 신을 지키기 위해 살았으니 오랑캐라 할지라도 속일 수 없다”며 사실대로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심집처럼 꽉 막힌-어디까지나 세자와 신경진이 생각하기에-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지, 오랑캐들 따위와의 약속을 지켜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 즉위조차 하지 않은 세자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거짓으로나마 화친을 제시하기에는 난감하다. 아무래도 위엄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신들이 한번 의논을 해보겠사옵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원상들이 총대를 맬 수 밖에 없다.
“영의정과 동양위가 찬성을 하겠소?”
“도성을 온전히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짓을 말하는 정도야 거리낌이 없을 것이옵니다. 허나 과연 어떻게 오랑캐들을 속여 넘길 수 있을지······.”
청군은 바보가 아니다.
화친해줄테니 도성을 떠나라고 한다 해도 순순히 믿을리가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임금이 돌아가셨는데 화친을 시도했다는 오명이나 얻고, 불탄 도성만 남을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영상이나 동양위를 믿을 수가 없소.”
김류는 보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잘못될 수도 있는 협상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을 것이고, 신익성도 골수 척화파니 청군을 잘 속여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판은 오랑캐의 사정을 잘 아니 그와 논의해보겠사옵니다.”
최명길은 주화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하루가 멀다하고 삼사의 탄핵을 받고 있다.
좌의정 홍서봉과 우의정 이홍주가 사퇴한 마당에도 그가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활한 책임 소재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 때가 왔다.
“적을 속이는 일은 수고로우나 영예롭지는 않으니, 이판이 무거운 짐을 지는구려.”
아마 이제 최명길은 이 일을 마지막으로 파직될 것이다. 세자가 즉위하고 나면 그 자리엔 이미 판서의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이조참판 정온이 올라가리라.
병조판서 이성구도 마찬가지였다.
‘영상이 척화신들과 요즘 가까이 지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겠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신들을 제외하고 공서에 속한 주화파 문신들은 자리를 지키기 어려운 상태였으니 말이다.
‘저하께서는 과연 전후의 조정을 어떻게 조성하실 생각이실까.’
선왕의 급사로 세자는 갑작스레 후사를 잇게 되었다.
친위세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대장인 자신을 원상에 앉혔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세자의 심중을 지금 미리 헤아려보았자 쓸데없는 노릇.
신경진은 세자의 뜻을 원상들에게 전하기 위해 물러났다.
그리고 붓 끝으로 펼친 거짓된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청군에서 사람이 왔다.
===
갑사창이 점령당하자 군량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고, 철군길도 지난할게 뻔했던 청군이 내세운 안은 사실 뻔했다.
‘도성을 내줄테니 길을 열어달라.’
‘그렇지 않으면 다 태워버리겠다.’
화친 조건이라기보단 숫제 협박이었다. 그리고 원상들이 익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한이 죽은 일에 대해서는 저들도 잊지 않고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세자는 상중이니 맞이하지 못하고, 원상 셋이 늘어섰다.
그러나 조회 중 사신을 맞이하는 예의가 아니라 마치 죄인을 공초하듯이 뜰에 꿇어앉혀 얘기를 들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제안을 가지고 온 잉굴다이는 별로 환영받지 못할거란건 예상했지만, 숫제 죄인 취급을 하니 크게 놀랐다.
“나는 사신이오. 그런데 이리 포박을 해도 되는 것이오?”
잉굴다이가 죽일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조선놈들이 조그만 승리를 얻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오로지 전황이 뒤바뀌어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 생각한 잉굴다이였으나 이어지는 신경진의 말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감히 너희 오랑캐들이 성을 넘어와 주상 전하를 시해했으니 그 씨를 말려버려도 모자랄 판에 무슨 협박이냐? 너희들이 이 조선땅에서 모조리 그 명을 다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뭐, 뭐요?"
‘조선왕이······ 죽었다고?’
인조의 죽음은 며칠 되지 않은 일이니 남한산성에서 밀려난 청군이 채 알 수는 없었다.
‘일을 그르치게 됐구나!’
통탄할 일이었다.
한이 죽었으니 조선왕도 죽어야 공평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고 있을 때의 일.
왕을 제 아비처럼 섬기는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곱게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잉굴다이는 반쯤 자포자기해버렸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인간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이, 일단 잘 생각을 해보시오. 한양이 곧 조선이고 조선이 곧 한양인데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오? 서로 유감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좋게 전쟁을 끝내면 되지 않겠소?”
“네놈! 나라를 배신한 한갓 노비 주제에 함부로 입을 지껄이는구나!”
신익성이 노해 소리쳤다.
찔끔한 그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나마 안면이 익은 사람을 찾았다.
“이, 이판 대감! 대감은 이래서 좋을게 없다는 것을 아실게 아니오! 어서 이 사람들을 말려보시오!”
“정명수(鄭命壽), 네가 왔구나.”
최명길은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갈 시간을 벌기 위해 마부타의 선봉대에게 갔을 때는 일개 노비 출신인 통역 정명수에게 공대를 해야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가 병자호란 이후 벌인 패악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청군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군 것은 최명길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완전히 입장이 뒤바뀐 지금 최명길의 태도는 엄혹했다.
“전하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신하로서 화친을 입에 담겠는가.”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신인 점을 감안하여 목은 붙여줄 터이니 너희 상전에게 전하라. 이 조선땅에서 시체를 죄 묻고 갈 각오를 하라고.”
“잠깐, 이판 대감! 원하시는게 무엇이오이까! 무엇이든 부디 말씀해주시면 청군에 전하겠사오이다! 이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겨주십시오!”
정명수는 발악하듯이 말했다.
“굴마훈! 경거망동하지 마라!”
잉굴다이의 호통에 정명수는 찔끔했지만 급히 그에게 속삭였다.
“호부승정, 우리 대청이 뒤를 도모하려면 저들을 달래 협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팔기들이 전멸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조선왕도 죽은 판에 순순히 우리를 보내줄 것 같으냐? 다 끝난 것이다.”
잉굴다이와 정명수가 묶여서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던 원상들은 최명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좋다. 임금께서 비록 지극히 망극한 일을 당하셨지만 우리 조선인은 본래 사람 죽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건을 얘기할 터이니 자세히 듣고 너희 추장들에게 전하라.”
===
잉굴다이와 정명수가 돌아왔을 때 친왕들은 모두 다이샨의 게르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우리 친왕들이 수결하여 사죄하는 서한을 보내고, 약간의 말미를 줄테니 도성에는 털끝 하나 손대지 않고 퇴각하라.
길을 열어주도록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잉굴다이와 정명수가 엎드려 최명길이 한 제안을 고했다.
인조의 죽음에 연관된 전범들, 그러니까 남한산성의 야습을 지휘한 장수들을 묶어보내고 친왕들이 직접 수결하여 사죄하는 서한을 보낼 것.
“그러면 화친을 정말 해주겠다 하던가?”
다이샨은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선인들은 예를 중시하는 자들이니 조상의 무덤을 범하려 드는 것을 산 부모가 칼에 맞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깁니다.”
잉굴다이의 말에 호거가 외쳤다.
“거봐, 내가 뭐랬소! 때로는 이리 과격하게 나가는 것이 활로를 뚫을 수가 있는 것이오.”
조선 임금을 죽인 것을 사죄하고, 요토 이하 장수들을 보내는 것이야 위신이 매우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단지 그것만으로 화의를 맺어준단 말인가?
“하지만 퇴로를 열어준다는 말을 순순히 믿을 수가 있겠소?”
조선군 말만 믿고 도성에서 물러나 북상한다 해도 약속을 안지키면 그만.
“그에 대비하여 왕제(王弟)를 길잡이로 붙여주겠다 하였습니다. 청천강 쯤에서 조선군에게 돌려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말이 길잡이지 사실상 퇴로를 보장해주겠다는 담보다.
“왕제를? 혹 가짜를 보낼 속셈은 아니겠지?”
도르곤은 이걸 조선이 먼저 제의하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실제로 가짜 왕족을 보내는 것은 전조 고려 때부터 이어진 유구한 사기 수법이었으니 말이다. 당장 홍타이지도 당할뻔했다.
“듣기로 죽은 조선왕의 동생이 남한산성에 있다고 하니, 그 자를 집어 요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도도의 말이었다.
“우리가 본국으로 끌고 간다는 것도 아니고, 퇴로길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잠시 왕제와 동행하는 것이니 진짜 왕제가 나오지 않으면 전부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조선은 정묘호란 당시 원창부령(原昌副令) 이구를, 남한산성 농성 초기에는 능봉수(綾峯守) 이칭을 군에 봉해 인조의 동생으로 속여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조선왕의 친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을 보내라 하십시오."
도도는 그 집에서 잡아온 하인들의 증언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친왕들께선 조선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청은 병자호란에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이 한양 도성에 모인 4만.
이 병력이 날아가면 청은 끝장이다.
다이샨은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요토는 어차피 한을 죽인 시해범을 보고도 놓쳤을 뿐만 아니라, 일을 이렇게 만든 죄인이다. 조선에 보내도 아쉬울 것이 없다."
아비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냉정한 말이었다.
"침략과 조선왕의 죽음을 사죄하는 서한은······."
"내가 쓰겠다."
다이샨이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여러 친왕들은 수결만 하라."
정치적 책임을 자기가 걸머지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차기 한 경쟁에서 그는 사실상 완전히 배제된거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상처입은 다이샨으로서는 섣불리 경쟁에 나섰다가 패전의 책임을 죄다 뒤집어쓰고 숙청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 편이 낫다고 여겼다.
"예형친왕의 어려운 결단을 우리 모두 잊지 않을 것입니다."
도르곤이 말하고, 호거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수결이야 여기 있는 황위 경쟁자들이 다 같이 하는 것이고, 다이샨이 대표를 맡아주겠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어쩌다가 대청이 이렇게 되었는가······!"
누군가가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한이 죽었는데도 치욕적인 사죄문까지 써서 바쳐야 하는, 개국 이래 유례가 없는 치욕이 개탄스러웠지만 당장 일을 수습하는 것이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