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갑사창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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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조선군 기병들과 함께 화살이 튀어나왔다.
양백기 기병들에게 수십 발의 화살이 꽂혔고, 불의의 일격에 잠시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타 조선군이 양백기의 허리를 갈랐다.
"이놈들! 거기 매복해 있었더냐!"
도이격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빨리 전열을 가다듬고 조선 기병을 몰아내야 했지만, 재수없게도 저들이 튀어나올 때 쏜 화살에 어깨를 맞은 터였다.
"구사 어전, 어깨가!"
"이따위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도이격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개같은 조선 놈들이."
청군은 각자가 뛰어난 전사다. 태어나서부터 말을 다루고 칼을 써온 그들은 마상전에서는 따를 자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무력은 허를 찌르고 들어온 기병의 덩어리 앞에선 무의미했다.
급히 창을 찔러들어가려 하나 조선군의 말이 그대로 옆구리를 들이받아버리고, 낙마한 양백기 병사의 머리 위로 편곤이 휘둘러진다.
"제길, 회순왕을 서둘러 구원해야 하는데······!"
도이격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오히려 구원군이랍시고 출동한 양백기가 엉뚱한 곳에서 피해를 입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팔기는 정예다.
행렬의 한중간이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도 붕괴되지 않고 외려 적을 둥글게 둘러싸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저들을 모조리 역으로 박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후퇴하라!"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퍼지는 난전에서도, 환도를 거침없이 휘둘러가는 자가 눈에 띈다.
그자가 지휘관인듯, 청군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미련없이 퇴각을 명령했다.
그들이 튀어나온 숲으로 도망치려 하는 것이다.
"벌써 꽁지를 내빼는가."
영악한 놈이었다.
도이격이 아쉽게 입맛을 다실 때였다. 양홍기에서 차출되어왔다는 병졸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구사 어전, 저자입니다."
두려운 목소리다.
도이격은 순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저자가 어쨌단 말······."
그렇게 되물으려던 도이격은 흠칫했다.
"설마?"
"그렇습니다. 자기가 한을 죽였다고 떠들어대던 놈입니다."
"······!"
도이격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추격해야 하겠습니까?"
기습으로 인해 피해를 받긴 했지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양백기가 우위다.
적들도 그걸 알기에 일격을 먹인 후 미련없이 숲으로 물러난 것일 터.
숲에서 싸우면 수적인 우위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싸우지 않을수도 없는 것이다.
"구사 어전, 놈들이 숲에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릅니다."
"우선 물러나 기주께서 이끌고 오실 추가 병력과 합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멍청한!"
도이격은 우려를 표하는 부하들의 말을 일축했다.
"우리는 서둘러 놈들을 격퇴하고 갑사창을 구원해야 한다. 언제 다시 조선놈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기주를 기다리자고?"
'게다가 한을 시해한 자를 보고도 놓아줄 수는 없다.'
도르곤은 한 시해범을 잡아 명분을 세우기를 원하고 있다.
한시바삐 갑사창을 구하고 놈을 잡으려면 지금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
"조선군을 추격해라!"
===
숲으로 퇴각한 이자원은 병력을 둘로 쪼갰다.
자신이 이끄는 1대와 박철균이 이끄는 2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숲에서 이리저리 치고 빠지면서 게릴라를 펼치던 1대에 주의가 몰린 사이 박철균은 2대를 이끌고 추격을 위해 산개한 청 기병들을 하나하나 격파했다.
결국 도이격은 졌다.
"너에게 맡긴 병력이 1천기가 넘는다. 그런데 고작 조선 기병 3백기에게 당했다고?"
도르곤의 눈썹이 꿈틀했다.
"면목 없습니다, 기주. 부디 죽여주십시오."
도이격은 어깨에 맞은 화살을 채 뽑지도 못하고 도르곤의 앞에 엎드려 말했다.
그 같은 숙장이 이리 당할줄은 몰랐기에 도르곤은 침음성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이겼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적장을 잡아내고 조선군을 격파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도이격은 이를 갈면서도 군사를 물렸다.
첫 기습을 제외하면 인명이라는 면에서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조선군들이 불의의 일격을 먹였다고는 하나 도이격에게 맡긴 병력이 모조리 전멸한 것은 아니다.
도르곤이 한숨을 쉬면서도 다시 나아가려 할 때, 급보가 날아들었다.
"예친왕 전하, 갑사창이 조선군에게 함락당했습니다!"
경중명의 밑에 있던 우전 초하(ujen cooha, 팔기한군의 전신) 병졸이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뭣이?"
아무리 양백기가 구원에 실패했다고 하나 수비군이 8천 명이다.
조선군이 갑사창을 들이친지 고작 두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함락당했단 말인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쿠툴러들이 전의를 잃고 대거 투항했습니다. 그러자 중과부적으로 차마 진영을 지키지 못하고 조선군의 난입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회순왕 전하께서는 끝까지 싸우시다······."
도르곤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하지.'
청은 갑사창을 잃었다.
조선군을 격파해 화의를 이끌어낸다는 전략도 자동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갖고 있는 군량은 열흘치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조선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돌아가는 길 뿐이다.
과연 몇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게 묵던으로 돌아갔을 때, 무너져버린 천명의 잔해에서 일어나는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인가.
도르곤은 자신이 없었다.
이젠 진짜 호거 말대로 조선왕의 무덤이라도 파야하는 것일까.
===
선정릉에서 양백기를 물리친 이자원군은 그대로 갑사창을 들이쳤다.
초장부터 싸울 마음을 잃었던 쿠툴러들이 줄줄이 항복하면서 이미 전투는 조선쪽으로 기울어 가는 형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조선군이 얼어붙은 탄천을 건너 등 뒤를 들이치자 청군은 급격하게 붕괴했다.
"항복해라! 무기를 버리는 자는 살려주겠다!"
"대국인은 대국으로 돌려보내준다! 항복해라!"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한어에 다들 창칼을 버리고 엎드렸다.
갑사창 전투는 그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이자원은 경중명의 목을 들어올렸다.
전투가 끝난 후에야 휘하 기병 하나가 취한 이 수급이 회순왕 경중명의 것이라 알게 된 그였다.
"천자께 바칠 선물이 생겼군."
신경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경중명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구원이 오리라 믿었던 듯 했다.
조선군이 완전히 진채를 뚫고 창고로 육박하던 그때에야 군량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결을 시도했으니 말이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군량을 태워버리면 청군 입장에선 답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너무 늦게 내린 명령 탓에 불이 제대로 옮겨 붙기도 전에 조선군은 갑사창을 확보했다.
자결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가슴을 찌른 그가 채 숨을 거두기 전에 이자원군이 들이닥쳤고, 그대로 목이 잘렸다.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똑같았겠지만 말이다.
"자네가 노추 황태극도 저격하였고, 청장(淸將)의 수급도 얻었지만 대국의 역도는 또 경우가 다르지 않나? 기왕이면 사로잡았으면 좋았겠지만 말일세."
"소관이 직접 죽인 것은 아니오이다. 게다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진해 죽어가던 상태였다 하더이다."
경중명은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청의 앞잡이로 전향한 역적 중의 역적이다.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 거열 정도인 조선과는 달리, 뼈와 살을 발라내는 능지형이나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형 따위의 혹형이 아직 존재하는 명나라다.
경중명도 아마 사로잡혀 명으로 압송되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자결을 시도했고, 끝내 비교적 평안한 죽음을 맞는데 성공했다.
'이 자의 손자가 훗날 오삼계와 손잡고 난을 일으키던가.'
왕작을 물려줘야 할 할아버지가 별다른 공도 못세우고 비명횡사했으니, 아마 손자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번부(藩部)를 세우고 그 땅을 다스리는 위치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다.
어찌보면 청에서 일어날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준 셈이 아닐까?
삼번의 난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강희제 같은 경우는 이자원에게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것이다.
강희제 역시 이자원 때문에 그 존재가 통째로 삭제되어 버렸으니 별 의미 없는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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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조야(朝野) 또한 대승에 잔치 분위기였다. 명색이 국상 중이니 티를 내며 흥겨워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갑사창 점령 이전에는 삼남에서 군량을 끌어올리는 수고도 보통 만만한 것이 아니거니와, 군량을 채 모으기도 전에 청군이 퇴각하면 길어지는 보급로 때문에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군량 걱정을 해야할 쪽은 청군이었다.
"갑사창을 점령했으니 청군은 끝장이옵니다. 이젠 화포고 병기고 다 내버린 뒤 몸만 챙겨서 도망갈 일만 남았사옵니다."
행궁 하궐.
승전 직후 부름을 받고 입궐한 신경진이 세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퇴각 또한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청군은 우리나라를 침공할 때 직도(直道)하느라 후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사옵니다."
도르곤과 호거의 좌군이 후발대로 내려오며 김자점을 토산에서 격파하는 등 뒷정리를 조금 하긴 했지만 여전히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 의주부윤 임경업 등이 이끄는 조선군이 남아있다.
그들은 전선을 형성해 퇴로를 막을 것이고, 청군의 발이 묶인 사이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청군을 따라잡아 섬멸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었다.
"나는 도성에서 싸움을 벌이는 짓은 되도록 피하고 싶소."
"군량이 없는 청군은 내일이라도 퇴각할테니 도성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즉위도 도성에서 하실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신경진은 동양위 신익성이 도성을 되찾아야 한다며 했던 주장에 빗대 말했다.
그러나 세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허나 저들이 도성을 분풀이로 불태우고 갈 수는 있지 않겠소?"
"저하, 어심을 굳건히 하소서."
신경진도 그럴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양을 인질로 잡고 화친을 강요한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조가 오랑캐의 손에 죽었으니까.
"도성에는 열성조들의 능역이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소. 나도 오랑캐와의 화친은 절대 불가하다고 생각하나, 혹시라도 피해없이 수복할 수 있는 계책은 없을까 묻는 것이오."
"······죽여주시옵소서."
신경진이 이어 말했다.
"선조대왕 때에도 왜적들이 감히 능역을 범했사오나 사직은 굳건히 보전되었사옵니다. 혹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들이 우행(愚行)을 벌인다면 압록강을 넘기 전에 모두 쓸어버리는 것으로 치죄하소서."
굳이 우행을 벌이지 않아도 죄다 쓸어버려야 하는게 맞지만 말이다.
"이자원이 이번 싸움에도 공을 세웠다고 들었소."
"그렇사옵니다."
전투를 기획한 것이 이자원 본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지원오는 양백기를 차단하고 비록 이미 대세가 기운 상태였지만 경중명의 목도 얻었다.
"조선이 천하의 동방에 있는 작은 나라라 하지만 그와 같은 인재도 있구려."
세자는 작게 감탄하며 말했다.
"이자원의 덕으로 국난을 극복한 적이 여러번이니 이번에도 그의 꾀를 빌리고 싶은데······ 그에게서 별다른 말이 없었소?"
"예, 저하."
이자원이라고 딱히 무슨 계책이 있겠는가.
신경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도성은 피를 볼 수 밖에 없다.
화친을 하지 않는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