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갑사창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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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과 장현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박철균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신경진에게 갔다오는 길이었다.
"별파진 차지천총께서 포의 방열을 모두 마쳤다고 하셨사오이다."
"훈련대장께서는?"
"지금 즉시 이동하라 명하셨사오이다. 서둘러 움직이시지요."
이자원은 박철균의 보고에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파총 나리."
장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따라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군."
"소인이 여진어는 능숙하지 못하여······."
"변명할 것 없다. 방해만 될 뿐이니."
이미 눈도장은 찍어놨으니 충분하다는 말이겠지.
상관없었다. 이자원이 지금부터 가야할 곳은 딱히 통역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자원은 갑사창을 직접 공략하는데는 나서지 않는다.
전체 지휘를 맡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정도 규모의 공세라면 당연히 훈련대장 신경진이 지휘해야 할 터.
그가 맡은 임무는 따로 있었다.
"자, 우리는 매복지로 향한다! 나를 따르라!"
청군 진채로 돌격하지 않고 남은 기병들은 각 군영에서도 가려뽑은 정예였다.
아마 원래 역사에서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정초군(精抄軍)으로 편성되었을 자들도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자원이 이끄는 기병은 전투가 벌어지는 갑사창을 우회해 탄천을 건넜다.
조선군이 갑사창 쪽으로 진격 중이라는 소식이 청군 본영에 들려온 것은 그보다 조금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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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도르곤은 요토를 찾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상 자신의 막사 안에 연금된 요토는 도르곤이 그를 찾자 쓴웃음을 지었다.
"한께서 친히 나를 두고 용맹을 칭찬하셨으나, 지금 나는 휘하에 부릴 전사 하나 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소이다."
"본왕도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
요토는 도르곤보다 열세살이나 많았지만 항렬로는 조카였고 작위도 낮았다. 게다가 이젠 숫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도르곤은 구태여 그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호거 같은 멍청이는 화살을 사방팔방으로 돌려야 자신이 이길 수 있다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그렇지 않다.'
다이샨이나 도도가 자신이 책임을 물 처지가 되면 호거를 과연 지지할 수 있겠는가?
이런 때일수록 사람을 대할 때 허리를 숙여야 했다.
눈 앞의 요토는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런 이치를 생각하면 쓸데없이 하대할 필요는 없었다.
"도로이 버일러의 용맹이야 본왕도 익히 아는 바요.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구려. 도대체 전쟁을 이렇게 꼬이게 만든 자가 누군지."
도르곤의 말에 요토는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예친왕께서도 지금 돌고 있는 헛소문을 믿으시는겝니까?"
"무슨 헛소문 말이오?"
모른 척 하던 도르곤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런 말은 돌더이다. 조선 군관 하나가 쌍령에서는 시르투를 베고, 남한산성에서는 침투한 바야라들을 가로막았는데 그 와중에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더라고."
"······한을 자기가 죽였다는 것 말입니까?"
"그렇소."
"미친놈의 헛소리지요."
요토가 딱 잘라 말하자 도르곤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아니고 말이오?"
"무슨 뜻이외까?"
"그게 사실이라면 버일러는 한의 시해범을 두번이나 놓아줬다는 말이 되니, 당연히 부정하고 싶지 않겠소?"
도르곤은 열세살이나 많은 조카를 압박하듯이 밀어붙이더니, 곧 날카롭게 웃으며 기도(氣度)를 풀었다.
"······전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이까?"
요토는 간신히 화제를 돌렸다.
"조선군이 한양을 향해 진격할 기미를 보이고 있소. 일부가 이미 수십리 밖까지 진출했기에 숙친왕이 병력을 이끌고 치러 나갔소."
도르곤은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예친왕은 왜 그리로 가지 않으셨습니까? 숙친왕이 공을 세우게 생겼군요."
"글쎄······."
도르곤은 말 끝을 흐렸다.
"만약 버일러가 놓친 그 조선 군관이 말이오. 그가 진짜 한을 시해한 장본인이라면,"
다시 그 얘기가 나오자 요토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도르곤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대청(大淸)은 그때부터 그 자에게 계속해서 말려들고 있는 것이오."
요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숫제 스스로 되뇌이는 말.
"그런 자가 꾀를 낸다면, 그냥 한양을 되찾겠다고 대놓고 군사를 일으키진 않을거요. 반드시 허를 찌르러 오겠지."
"갑사창으로 오리라 생각하시는구료."
요토는 어디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깨달았다.
"양도를 끊으면 우리 군은 끝장이니까."
그래서 도르곤은 휘하의 양백기를 거느리고 남았다.
'반드시 그 자는 갑사창으로 직접 온다.'
이것은 일종의 확신이었다.
호거놈은 단지 한양을 불태우고 왕릉이나 파헤쳐 한의 복수를 이뤘다 떠들어댈 심산이겠지만 도르곤은 달랐다.
갑사창에서 조선군을 대파해 화의를 강요하고, 홍타이지 저격범은 직접 잡아 묵던(ᠮᡠᡣᡩᡝᠠ, 심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되면 누가 한의 복수를 이뤘는지, 누가 차기 한에 합당한지 모두가 알게 되리라.
"버일러의 휘하에 그 조선 군관의 얼굴을 아는 자들이 있을거요. 그들의 이름과 소속을 알려주시오. 전투가 시작되면 데리고 나갈 터이니."
요토는 거절할 수 없었다.
만약 도르곤이 한에 오르면 요토의 처우는 그가 결정하게 되니, 이 일로 도르곤의 조그만 호의라도 샀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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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旗主)의 예상대로 조선놈들이 갑사창으로 몰려왔구나!"
양백기 구사 어전 도이격(圖爾格)은 쾌재를 불렀다.
정람기 놈들은 이미 조선군이 한양 인근에 집결하기 전에 각개격파해야 한다며 출격했다. 헌데 자신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도르곤은 도이격에게 우선 상시대기 중이었던 양백기 병력들을 이끌고 갑사창을 구원할 것을 명했다.
대기하고 있던 양백기 병력들은 재빨리 말에 올라타 남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성에서 탄천 일대의 갑사창으로 가려면 한강 본류를 건너야 한다.
이 때문에 본래라면 배가 없으면 이런 신속한 지원은 불가능했지만, 지금 계절은 겨울. 강은 전부 얼었다.
그렇게 양백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내달리려 할 때였다.
- 퍼퍼펑
둔탁하게 건너편에서 화약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포탄들이 날아왔다.
일부 보병들과 포병들이 먼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놈들이 화포를 쐈다!"
포탄에 주군 홍타이지도 맞아죽는 불상사가 생겼다 보니 내달리던 기병들도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조선군 포수들의 실력은 실로 엉망이었다.
이쪽 청군들은 채 맞추지도 못하고, 탄착군도 엉성하여 포탄은 강 여기저기 꼬라박힐 뿐이었다.
도이격은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조선군이 화약을 낭비하고 싶어 안달이구나. 우리 군은 얼음 구덩이를 피해서 달리면 그만이다. 자, 놈들이 다시 포를 쏘기 전에 휩쓸어버려라!"
도이격의 명령에 양백기 기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때였다.
- 퍼석
"으악!"
선두를 달리던 기병 하나가 포탄에 맞아 난 얼음구멍을 피해 달리고 있을 때, 밑의 얼음이 무너져 내리며 그대로 차가운 한강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뭐냐!"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어 달리던 기병들이 말발굽을 내딛자 기우뚱하며 몸체가 기울어지는 것이다.
황급히 그들은 뒤돌아 어이없게 쳐다보고 있는 도이격에게로 복귀했다.
"허 참······."
도이격은 그제서야 조선군이 한강에 포격을 가한 이유를 깨달았다.
사흘씩이나 지속된 더운 날씨는 한강의 얼음마저 바꿔놓았다.
한파로 인해 홍타이지의 수만 군대도 너끈히 건너보내던 열흘 전과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여기에 포탄으로 인한 충격이 이곳저곳 감행되자 이 일대는 전반적인 균열로 인해 감히 말발굽을 내딛기가 두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멍청한 조선놈들. 이런 식으로 나와봤자 시간도 얼마 끌지 못할텐데."
도이격은 그러나 황당해할 뿐, 근심하지는 않았다.
포탄이 맞은 범위는 요 근방에 불과하니 조금 옆으로 돌아서 한강을 건너면 그만이다.
도이격이 봤을 때는 화약 낭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귀찮게 되었군.'
군데군데 금간 얼음을 건너 굳이 조선군을 칠 이유는 없었다.
저들을 분쇄하는데도 시간이 걸릴테니 말이다.
"그냥 조선놈들 포가 안닿는 곳에서 강을 건너자! 포가 말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 아니냐!"
도이격이 말했다.
그의 생각대로 조선군 포병은 청군의 뒤를 쫓지도 않았고, 청군이 뚝섬 일대를 지나 강을 건널 동안 얼음에 균열이 가는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원이 노리고 있던 것은 그것이었다.
===
조선에서 왕의 능묘가 지어지면 근방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
민가와 무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수목을 심으며, 벌채는 엄중히 금지된다. 왕릉의 위엄 때문이다.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에도 일부 숲이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이 시대에는 그 면적이 더욱 크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 이자원이 이끌고 있는 기병 수백기가 충분히 매복할 수 있을 만큼.
"청군이 과연 이쪽 길로 넘어오고 있사오이다!"
도성에서 출발한 청군이 갑사창을 구원하기 위해 최단거리를 택한다면 현대의 잠실대교 근처를 따라 넘어올 것이다.
그러나 미리 훈련도감 별파진이 그 너머에 진을 치고 있다.
얼음에도 균열을 내놨고 포를 호위하기 위해 소수나마 병력을 두었으니 굳이 그곳을 건너기엔 부담스러울 터.
따라서 청군이 넘어올만한 곳은 청담대교 인근 쯤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서부터 탄천을 따라 내려간다면, 지금 선정릉 일대에 매복 중인 이자원군이 물어뜯기 좋도록 목을 내보이는 형세가 된다.
"파총 나리."
"그래."
박철균의 부름에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군을 쓸어버려라!"
이자원이 환도를 뽑아들고 말을 달리고, 그 뒤로 조선 기병들이 따랐다.
정면을 향해 내달리던 양백기들의 옆구리에 조선군이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