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갑사창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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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는 도체찰사를 겸하고 있는 영의정 김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임금을 대리해 국사를 처리하는 중인 특수한 상황이었으니 같은 원상인 신익성, 신경진도 사실상 동등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특히 신경진은 무신으로서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세자가 앉힌 원상이었으므로 더더욱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내가 이번 갑사창 공략을 담당하게 되었네."
휘하 중군(中軍), 천총(千摠), 별장(別將), 파총(把摠) 등이 모두 모인 자리.
신경진은 담담하게 자신이 이번 전투의 설계를 맡게 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대신 도원수의 인선 문제는 김자점을 유임시켜 팔도 도원수의 직을 맡기고, 심기원을 소환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아무래도 원상들의 물밑 협상이 있었던 모양이군.'
파총 이상 장교들이 소집된 상태였으니 당연히 이자원도 배석해 있었다.
'갑사창 공략은 훈련대장에게 맡기는 대신 김류가 김자점을 도원수로 밀어준 것이라면······.'
김자점과 심기원 모두 인조반정의 공신이니 공서로 분류된다. 김류는 무슨 기준으로 그를 간택한걸까?
이자원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신경진의 말은 계속되었다.
"주력은 우리 훈련도감이다. 사영(四營) 중 어영청과 총융청, 수어청은 성을 지켜야 하니 우리 훈국(訓局) 외에는 나설 수 있는 부대가 없다."
"청군 또한 갑사창의 중함을 알 것인데 훈련도감 병력만으로 뚫을 수 있겠사오이까?"
중군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청군은 전격전을 위해 군량을 열흘치만 지참하고 움직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은 갑사창을 털어 군량을 취했기 때문이고, 남한산성에서 격퇴된 지금도 열심히 자기네 본영으로 군량을 옮기고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갑사창에 머무르는 청군은 무려 8천이나 되오이다. 게다가 변고가 생기는 즉시 도성에 머무르는 청군 철기(鐵騎)가 한강을 넘어 지원할 터인데 우리 훈국군은 3천 밖에 되지 않사오이다."
병자호란 직전 5천 명이 넘었던 훈련도감군은 인조의 급박한 남한산성 입보(入保)로 흩어지고 지난 전투로 줄어들어 3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재편이라도 겨우 끝낸 것이 다행이랄까.
"주력은 훈련도감이되 다른 군의 지원이 있을 것입니다."
중군의 우려에 대신해서 대답한 것은 이자원이다.
애초에 세자에게 갑사창의 공략을 진언한 장본인이었으니 작전을 설명하기에 그만큼 적절한 사람은 없었다.
신경진을 제외한 좌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군께서도 모르는 일을 자네가 어찌 아는가?"
천총 하나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자원은 전쟁 전 같으면 감히 이곳에 발도 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랬던 신출내기 초관이 파총이 되어 저리 말하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번 공격을 주장한 사람이 이 파총일세."
신경진이 말했다.
그는 세자에게 갑사창 공략을 진언한 것이 이자원임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후 지휘권을 쥐게 되자 그는 이자원을 불러 세부적인 병력 동원안을 꺼내놓도록 했다.
지금은 그 안에 대해 논의해보는 자리였다.
"각 도에서 올라온 근왕군들은 정예하지 않고, 그나마 대부분이 삼남에서 군량을 올려보내는데 투입되었는데 어느 군이 움직이는 것인가?"
신경진은 이자원에게 설명해보라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전라병사 김준룡 영감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 일부가 남쪽에서 움직이고, 쌍령에서 공을 세웠던 항왜들도 앞장설 것이오이다. 또 각 군영에서도 말 잘타는 자를 뽑아 참전시킬 것이니 병력은 충분하지 않겠사오이까?"
"그러면 얼추 숫자야 맞춰지겠지만······."
천총이 어물거리는 사이 중군이 이어 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갑사창을 지키는 청군 뿐만이 아닐세. 한강이 결빙되어 도성에 머무르는 청군 전체가 언제든지 지원을 보낼 수 있는 바, 여기에 대한 계책은 있는가?"
"도원수가 양평을 떠나 도성을 위협하는 태세를 취하기로 했사오이다. 잠시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하겠지요."
2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얼어붙은 북한강을 건너서 인근에 포진한다.
청군의 뒤통수는 매우 가려울 것이다.
'아무리 동쪽에서 북을 울리더라도 일부 병력은 여전히 갑사창을 보호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겠지만.'
조선군의 과제는 두 가지.
첫째는 갑사창의 청군을 격파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때까지 한강을 넘어올 청군의 지원을 차단하는 것이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세운 계책이 있긴 했지만 어느쪽이나 운이 따라줘야 했다.
'지금쯤 박철균이 한창 사역원(司譯院)을 뒤지고 있겠군.'
자신이 속해있던 별파진(別破陣)의 화포장들도 죄다 끌려나왔을 것이다.
바로 결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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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맑았다.
사흘째 계속되는 화창한 날에 회순왕(懷順王) 경중명(耿仲明)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로군."
군량을 옮기는 일이야 아랫것들이 알아서 한다지만 칼바람과 눈을 맞아가며 활동시키면 자연히 손도 굳고 앓아눕는 자들도 생기는만큼 일이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본영은 철군할 의지를 굳힌 듯했지만, 당장 심양까지 돌아가는 길에 먹을 군량조차도 갑사창에서 꺼내와야 하는 것이 청군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화포 운송을 차질없이 해냈다'는 이유로 낙점되어 8천 명에 달하는 병사와 쿠툴러(kutule, 노예병)들을 데리고 여기서 열심히 군량이나 옮기고 있는게 아닌가.
"제길,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모시던 상관 모문룡이 병부상서 원숭환에게 처형당하자 공유덕(孔有德)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해 청에 항복한 그였다.
당시만 해도 청은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명은 저물어가는 해처럼 보였다.
비록 오랑캐지만 어떠한가. 홍타이지의 눈에 든 덕분에 왕으로까지 책봉되었으니 경중명은 청에 충성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과 열흘 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신을 중용한 홍타이지는 죽었고 청군은 어어하는 사이 패배해 밀려났다. 이젠 어떻게 '잘' 퇴각해야할지 고민하는 꼴이라니!
"빌어먹을!"
이젠 명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두번이나 주인을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경중명이 고심에 잠겨있을 때였다.
황급히 그의 게르로 만주인 병사 하나가 뛰쳐들어왔다.
"대, 대왕!"
"무슨 일이냐?"
경중명이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하고 외쳤다.
"조선군입니다! 조선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경중명은 그렇게 외쳤다.
그는 한번은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본영에서도 전 병력의 2할을 이곳 갑사창에 배치한 것이 아닌가.
군량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느라 쿠툴러들의 비율이 좀 높긴 했지만 충분히 싸워볼만했다.
"군량의 운송을 중단하고 전부 진채를 지키도록 해라!"
조선군의 움직임을 일찍 포착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경중명의 명령에 수레와 말에 군량을 싣고 있던 청군들이 후다닥 목책에 가서 달라붙었다.
사기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정예는 정예. 몸에 각인된 경험이 그들을 곧장 전투 태세에 임하게 만들었다.
"곧 있으면 본영에서 지원을 올 것이다! 여기에서 승전하면 조선놈들의 코가 납작해질 터! 그리되면 놈들도 우리를 뒤쫓지 못해. 힘껏 싸워라! 집으로 돌아가자!"
팔기 병사 하나가 자기 쿠툴러에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예, 어전(주인)!"
쿠툴러는 얼굴이 굳어있었지만 대답은 씩씩했다.
이들 주종(主從)은 든든하게 같은 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경중명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진채 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너머에서부터 새까맣게 조선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조선군 선봉장으로 보이는 장수 한 사람이 말을 몰아 대열의 선두로 나섰다. 그 옆에는 통역인 듯한 청년 하나가 서있었다.
"전투 전에 무어라 엄포를 놓을 모양이지?"
곧 장수가 조선어로 말하면, 통역이 받아서 외치리라.
이쪽에서도 대거리를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좋겠다 싶었던 경중명이 말을 궁리해내고 있을 때였다.
그때 경중명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적의 말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
"항복해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여느 권고와 다를 바없는 진부한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통역의 입에서 울려퍼진 것은 경중명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는 만주어가 아닌, 한어(漢語)로 말하고 있었다.
===
'예? 한어라굽쇼?'
이자원은 사역원에서 한어를 할줄 아는 관원들을 데려오라 명령했을 때 박철균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이자원은 실수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팔기는 정예다. 군량을 나르는 것은 노예, 쿠툴러들의 몫이지. 아마 갑사창에 주둔한 병력의 대부분도 쿠툴러들일 것이다.'
그들은 필요시 전투와 약탈에도 참여할 정도로 쓸만한 수비군이다.
이자원은 아마 적이 팔기 3천에 쿠툴러 5천 정도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리고 노예가 다들 그렇듯이, 쿠툴러들의 구성도 전쟁에서 잡힌 한족 포로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창칼을 내려놓아라! 대명(大明)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항복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너희 오랑캐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이냐!"
"전쟁이 끝나면 너희를 배에 태워 가족들에게 보내주겠다!"
조선군들은 일제히 역관의 통역을 따라 소리쳤다.
서툰 발음이지만 청군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이런······ 개 같은 놈들!"
경중명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청군, 특히 쿠툴러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 주인들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동요에 불길함을 느껴야만 했다.
방금 제 주인에게 씩씩하게 대답했던 그 쿠툴러조차도 조선군이 외치는 소리에 듣고 슬금슬금 눈동자를 굴리고 있지 않은가.
경중명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칼로 베어버렸다.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마라! 너희는 이미 대청의 일원이 되지 않았더냐! 너희의 고향은 요동이고 만주다!"
하지만 청군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청이 잘나갈 때야 약탈이라는 당근과 공포라는 채찍이 쿠툴러들을 충성스러운 청의 신민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잇따른 패전으로 사기를 상실한 상태에서 들려온 조선군의 외침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과 같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이자원이 아니었다.
"기마군! 돌격하라!"
중앙군 4영과 경기 속오군에서 모아들인 기병들이 짓쳐들어갔다. 그 뒤로 항왜와 보병들이 따르고, 그 모습을 본 김준룡군도 남쪽에서부터 공격을 감행했다.
"아직 제 한어가 서투른지라 일이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전장을 관조하는 이자원에게 옆에 서있던 통역 청년이 말했다.
말끔한 얼굴의 미남이었다.
"겸양 떨 것 없다. 보다시피 적들은 충분히 동요한 것 같으니."
그 말고도 사역원에서 파견된 유능한 역관들이 많았다. 실제로 그들은 덜덜 떨면서도 병사들 사이에 서서 한어 통역을 제공했다.
반면 청년은 역관의 아들로서 외국어에 능통할 뿐, 역과에 아직 합격도 하지 않았으니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마지못해 전장에 나온 다른 역관들과는 달리 청년은 통역을 자청했다고 한다.
바로 그, 이자원의 옆에서 통역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이름이 장현(張炫)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파총 나리."
이자원의 말에 청년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만간 한번 얘기를 나누지."
훗날 국중(國中)의 거부(巨富)로 불릴 자가, 과연 무슨 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인지.
그때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