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갑사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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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르곤과 호거가 이끄는 좌군이 본군에 합류했다.
아니, 본군이 포위를 풀고 한양으로 물러났으니 서로가 만난 셈이라 해야할까.
도합 4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머무는 군영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태조께서 처음 기의하신 이래로,"
다이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날과 같이 대청이 치욕적인 패배를 겪은 적이 없었소. 모든 것이 나의 탓이오."
다이샨을 필두로 도르곤, 호거, 도도, 쇼토 등 황족들과 구사 어전들이 둘러앉았다.
좌천되고 모든 실권을 빼앗긴 요토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후위대의 지휘관 두두를 제외하면 청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다.
홍타이지가 비명횡사한 지금 이 자리에서 향후의 일을 결정해야했다.
"참패도 그냥 참패가 아니지요. 한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성을 떨어뜨리지 못했고, 조선왕을 사로잡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조선군에게 패해 포위가 뚫렸으니 이번 전쟁은 백부(伯父)께서 반드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숙친왕(肅親王) 호거가 가시 돋힌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본군과 합류하자마자 곧장 피떡이 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다이샨을 맹비난했다.
'탄타이와 바인투에게는 화살을 돌리지 않고, 나만 물고 늘어지는가.'
정황기와 양황기의 구사 어전인 탄타이와 바인투. 그들이야말로 포위만 유지하려던 다이샨에게 강력히 공격을 주장한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호거의 공세는 명백히 다이샨만을 향했다.
이유야 뻔했다.
한의 직속기인 정황기와 양황기는 홍타이지의 죽음으로 머리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흡수할 수 있다면 원래부터 이끌던 정람기와 합쳐 팔기 중 3기가 호거의 손에 들어간다.
차기 황위를 다투어야 하는 호거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을 끌어안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유력한 종친인 다이샨은 반드시 기세를 눌러두어야 할 상대였던 것이다.
"면목이 없구나. 그러나 지금은 차후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다이샨은 싸늘한 투로 말했다.
"예형친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도도가 찬성하고 나서자 호거가 쏘아붙였다.
"일이 이렇게 된데에는 숙부의 책임도 있는게 아니오? 듣자하니 부마(駙馬)가 전사한 것도 숙부가 맡은 싸움에서였다던데?"
숙부라고는 하나 호거는 도르곤과 도도 형제보다 나이가 많다.
면박을 들은 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르하치의 사위였던 양구리는 도도와 함께 광교산에 주둔한 김준룡군을 치러갔다가 전사했다.
승전을 거둔 전라도 근왕군은 쌍령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연계를 위해 북상했고, 이미 남한산성에서 패해 포위망에 구멍이 뚫린 청군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도르곤, 저놈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
호거는 도르곤을 슬쩍 노려보며 생각했다.
다이샨과 도도를 백날 견제해보았자, 진정으로 가장 유력한 경쟁자는 자신과 함께 좌군을 이끌고 있던 도르곤이다.
"지금 서로를 비난해보았자 아무 의미도 없소, 숙친왕. 이미 조선왕을 잡아서 복수를 하든지 전쟁을 끝내든지 하는 목표는 이룰 수 없게 되었으니 빠르게 철군하는 일만 남았소."
반면 도르곤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홍타이지의 죽음에 슬퍼한다든지 패전에 당혹해한다든지 하는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철군이라. 여기까지 몰린 이상 그럴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감히 한을 저격한 대가를, 조선놈들은 치뤄야할 것이오."
호거의 호기로운 말에 도르곤이 눈을 치떴다.
"대가라 함은?"
"이곳, 한양을 불사를 것이오."
호거가 말했다.
그러자 도르곤이 한숨을 쉬었다.
"숙친왕, 우리는 도적떼가 아니오.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약탈을 허용하는 것이라면 모르되, 서둘러 철군해야할 상황에서 쓸데없이 끌 시간 따윈 없소."
약탈은 그 자체로 시간과 노력을 소모케한다.
이미 청 본군이 도착했을 때 이틀에 걸쳐 약탈당한 한양이니 더 뜯어먹을 구석은 없다.
"나는 불사를 것이라 했소, 숙부."
그러나 호거가 말한 것은 약탈이 아니었다.
"조선놈들이 지어놓은 궁궐을 모조리 불사르고 종묘사직을 파괴할 것이오. 능에 묻힌 역대 조선왕의 시체를 파내서 묵던으로 가지고 갈거요. 그정도는 되어야 한의 복수를 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어리석은.'
도르곤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물론 그렇게 하면 호거 본인은 한의 복수를 이뤘다는 명분을 쥐고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조선과의 화의는 물 건너간다.
'저놈이 대청의 미래를 구렁텅이에 처박으려 하고 있구나.'
청나라의 적은 조선만이 아니다. 대릉하 건너의 명군도, 정복한지 겨우 1년이 된 몽골도 신경써야할 판에 조선군에게 물어뜯기며 철군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호거가 엉뚱한 짓을 벌이기 전에 화의를 주선해보아야겠다.'
한이 죽은데다 먼저 화의를 요청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이샨을 비롯한 친왕들을 뒤로 설득해서 화친하고 물러날 것을 권해보자.
한의 복수는······ 다음에 해도 되리라.
도르곤은 호거나 황기 장수들과 달리 복수 그 자체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그의 어머니를 순장시킨 것도 홍타이지였으니.
'양국의 관계를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고, 세폐를 요구하지 않겠다. 이정도면 가능하겠지.'
혹시라도 거절당하면 어쩔까 싶었지만 도르곤은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누구보다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건 조선일 것이다.
만약 조선이 화의를 거부한다면······ 글쎄, 그건 조선왕이 전쟁에서 죽은 경우 정도 아닐까.
===
"갑사창을 공격해야겠소."
세자의 말에 원상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분명 어제의 화두는 도성을 되찾느냐 아니냐 아니었던가.
당연히 세자가 양자 중 하나를 택할 것이라 생각했던 세 사람이었으나,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선 것은 역시 무신인 신경진이었다.
"신도 적의 양도(糧道)를 끊는 방안을 궁리해보고 있었으나 역시 갑사창 외에는 노릴 곳이 없사옵니다. 저하의 헤아림이 깊으신데, 혹 스스로 생각하신 바입니까?"
신경진도 동의하지만 이걸 과연 세자 혼자 떠올린건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내가 병법을 배우지 않았으니 어찌 스스로 방도를 마련하겠소? 아는 무관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았소."
"그 자가 혹 누구이옵니까?"
김류의 물음에 세자가 말했다.
"지금은 갑사창을 어찌 공략할지가 중요하지, 머리를 빌려준 사람은 중요하지 않소."
세자가 이렇게 딱 잘라 나오니 김류도 할말이 없었다.
"갑사창이 중함은 청군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방비를 든든히 하고 있을 터인데 어찌 공략해야 하오리까?"
"훈련대장의 생각은 어떠시오?"
신경진의 물음에 세자가 역으로 물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을 써야 할 것이옵니다. 미원(迷原)에 주둔한 도원수에게 일러, 북한강을 건너 진군해서 좋은 지세를 찾아 포진케하면 필경 적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리겠지요."
신경진은 세자에게 그리 대답을 마쳤지만,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허나 이것은 그 무관이 이미 세자 저하께 일러준 방략 중 하나일듯 한데, 아니 그렇사옵니까?"
"맞소."
세자는 긍정했다.
이것도 이자원이 내놓은 전략의 일부였다.
"다만 미원에 머무르는 도원수 두 사람이 각자 병권을 나누어갖고 있으니 이를 우선 정리해야 대계를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경진이 간했다.
"양서 도원수 김자점, 삼남강원 도원수 심기원 중 하나가 도원수가 되고, 다른 하나가 부원수가 된다면 앙심을 품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면 한 명을 조정으로 불러들여야 할 듯한데······."
그러자 신익성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원상들이 살펴 결정하시오. 원래 상중의 정무는 내가 아니라 원상들의 몫이 아니오?"
세자가 뼈있는 말을 던졌다.
너희가 스스로 일을 처리 못해 나한테 가져온 것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원상들은 고개 숙여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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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명령을 받들며 나오는 김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원수 중 누구를 불러들이냐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보다 신경쓰이는 것이 있었다.
"알아보았느냐?"
김류가 앞에 공손히 꿇어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어젯밤 훈련도감 파총 이자원이 입궐해 저하를 뵈었다 하옵니다."
"허, 그자였나······."
이자원.
청나라 한을 날려버리고 쌍령에서도 큰 공을 세웠으며, 남한산성에서 청군의 야습도 막아낸 자.
아무래도 세자는 그가 마음에 든 듯했다.
아니, 어디 세자 뿐일까.
척화파는 아예 홍타이지의 목을 따버린 그를 사모하는 수준이었다.
'마침 잘되었다.'
김류는 차분히 그를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해보았다.
작금의 정국은 그에게는 그리 좋게 돌아가지 않았다.
반정 이후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나뉜 서인이다.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김류·신경진·이귀·최명길 등이 공서요, 비공신 세력인 김상헌·김장생 등이 청서다.
그 뒤로 북인 남이공의 등용을 둘러싸고 다시 공서의 분열상이 있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공서가 주화(主和)의 입장을 취하고 청서가 척화(斥和)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문제는 전황의 반전과 인조의 죽음으로 주화파가 책임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음(靑陰). 단 하룻밤만 버텼다면 그대가 조선의 권병(權柄)을 쥐었을 것을."
하기야 절의를 꺾는다면 김상헌이 아니리라.
김류, 그 자신도 청군이 성을 넘었을 때는 사직이 망하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이제 없고, 척화파는 우두머리를 잃었다.
동양위 신익성은 부마이니 정사에 간여할 수 없다.
대사헌 김수현은 칠십 넘은 노인에 기력도 쇠했으니 금방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이조참판 정온 정도일까.
공서에 몸담았다고는 하나 스스로 당색이 옅다고 여기던 김류는 이참에 청서와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어차피 원상이 끝나면 위협도 안될 신익성을 천거했고, 척화파는 김류 그가 원상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화답했다.
'허나 청서와 수도 없이 다투어온 내가 쉬이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영상 자리를 계속 쥘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바보다.
하지만 세자의 관심을 받는데다 척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자원을 밑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기껏해야 폐주 시절에 별장 벼슬이나 지낸 집안의 얼자라지만······ 그만하면 대우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비록 선왕이 이자원에게 자진출두를 시키려할 때, 그걸 옆에서 '약간' 거든 적은 있지만 그런 것이야 정치에 몸담은 사람에겐 흔한 일이 아닌가.
이 나라의 영의정이 '사세가 급박해서 그랬다'라고 살짝 고개를 숙여주면 족히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고 김류의 꿍꿍이 속과는 별개로, 갑사창 공략을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