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진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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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들에게 원상을 맡긴 것은 알아서 군국사무(軍國事務)를 처리하라는 뜻이었지 상의하러 오라는 뜻은 아니었소만······."
원상들이 임명된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를 찾아오자 세자는 대놓고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례(非禮)인줄은 아오나 이만한 일에 웃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신들이 찾아뵈었나이다."
김류의 말에 세자가 알았다는 투로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이오?"
"저하, 모름지기 임금은 도성에서 즉위하여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하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아야 하는 것이옵니다."
신익성이 결연하게 말했다.
"허나 지금은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때가 아니니 마땅히 행궁 하궐에서 즉위하여야 하지 않겠소?"
뜬금없는 소리에 세자가 묻자 신익성이 말을 이었다.
"저하, 팔도에서 충성스럽고 의기로운 군사들이 몰려들어 그 수효가 6만을 넘으니 이만하면 오랑캐와도 겨루어볼만 하옵니다. 이제 졸곡하시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사오니 서둘러 한번 공격을 가하여 도성을 되찾음이 옳지 않겠나이까?"
"······내가 병략에는 비록 밝지 않으나 공격을 할 때에는 적의 세 배 병력은 마련해놓아야 한다는 말은 들어보았소. 지금은 전시이니 예법이 병략보다 앞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이까?"
세자의 의문에 신익성이 다시 답했다.
"성종대왕께서는 성복(成服)한 후에 즉위하는 전례(前例)를 오히려 물리치고 곧바로 용상에 오르셨으니 이것은 민심을 잡기 위한 권도(權道, 임기응변)라 할만합니다.
다만 저하께서는 이미 지극한 마음으로 상례(喪禮)를 지키고자 하셨으니, 마땅히 즉위도 그에 맞게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어리석은 무리들이 공론(空論)하는 것을 막고 위엄을 세워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기왕이면 도성을 수복하고 즉위해서 정통성을 확실하게 거머쥐는 것이야 세자도 어찌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신익성의 말만 듣고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훈련대장의 생각은 어떠시오?"
구태여 척화파의 의견을 누르고 신경진을 원상에 앉힌 것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신하들은 신경진이 임금의 인척이라 그런 것으로 이해했지만 말이다.
"저하, 신도 어찌 도성을 되찾고 싶은 생각이 없겠사옵니까? 하오나 지금은 때가 아니옵니다. 우선 조정을 추스리고, 삼남의 식량을 조달하고, 군사를 조련시킨 뒤에야 나아갈 수 있사옵니다."
"그때가 되면 이미 청군은 도성을 불태우고 압록강을 넘어 돌아갈 것이오! 승기를 잡은 지금 싸우지 않으면 군부의 치욕을 씻을 기회는 언제가 있겠소? 저하, 오랑캐를 서둘러 몰아쳐 섬멸하고, 개선가를 울리며 환도하심이 가할줄 아뢰옵니다."
신경진과 신익성의 대립에 세자는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영의정 김류를 돌아보았다.
"영상은 말이 없구려. 동양위와 훈련대장, 둘 중 누구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신은 저하의 생각에 따를 뿐이옵니다."
김류가 영혼없이 대답하자 세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야 원상을 세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결국 자신이 결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세자는 골치가 아파왔다.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세 원상을 물린 후에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현실적으로 공격이 어렵다는 신경진의 말을 따르자면 청군이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과연 저들이 우리 백성을 잡아가지 않고 순순히 퇴각할 것이며, 또 아바마마의 원수는 어찌 갚는단 말인가.'
'하지만 신익성은 어떻게 이길지 계획도 없는 상태가 아닌가.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신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군이 참패한다면 그만한 참사가 또 있으랴.'
지존이 된다는 것은 곧 만사(萬事)를 스스로 처리해야한다는 뜻.
자신의 선택에 따라 수천 수만 명이 죽고 사는 일과 종묘사직의 운명이 갈린다.
아직 스물여섯 밖에 되지 않은 세자로서는 그것이 버거웠다.
'내가 무엇이든 망설임없이 결단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세자는 그런 인간을 본 적이 있다.
한치의 두려움없이 대전에 나아와 아바마마와 신료들을 설득하고, 사지를 뚫고 성을 나서고, 다시 방해가 될만한 자들은 가차없이 칼로 베어버리는······
마치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있는 듯한 인간.
"이자원."
"예?"
세자의 입에서 문득 그 이름이 새어나왔다.
곁에 있던 내관이 알아듣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세자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너는 가서 훈련도감 파총 이자원을 불러오라."
세자는 그와 상의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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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산 속이 춥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물며 소빙하기(小氷河期)를 겪고 있는 이 시대의 남한산성은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은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으니, 병사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체온을 나눌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있자면 면식이 없는 병사들이라 해도 잡담 몇마디를 나누게 되고, 자연 빠질 수 없는 것이 자기가 겪은 무용담(武勇談)이었다.
"······그렇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몇날며칠을 걸으니까 드디어 오랑캐랑 마주친거라. 내가 비록 촌놈이지만은 호기(胡騎) 무서운줄은 익히 들었는데,"
"들었는데?"
"거 막상 싸워보니까 별거 아니던걸."
"에이, 거짓말 하지 마쇼."
그리고 단연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쌍령에서 청군을 대파하고 가장 먼저 산성에 도달한 영남 근왕군의 무용담이었다.
대구에서 동네 어른을 따라 의병으로 참전했다는 사내는 찬물을 끼얹는 다른 병사의 말에 침을 튀기며 항변했다.
"예끼, 거짓말은? 오랑캐가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지만은 제놈들 몸에는 총탄이 안들어간다던가? 청군 수만 명이 산등성이를 넘어서 진채로 마구 쳐들어오는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몇번을 싸우니 그 길로 절반이 죽고 절반은 도망쳐버리데."
"그래서, 그 뒤는 어찌 됐소?"
"거야 당연히 추격해서 끝내 청나라 장수의 목을 베었지."
"아저씨가요?"
그 말에 잠시 입을 닫았던 사내가 겨우 말을 이었다.
"나는 아니고······ 이자원이랬나 하는 훈련도감 장군님이 벤거지."
"이자원?"
"어휴, 그 양반은 말도 말게."
다른 곳에서 잡담을 나누던 병사 하나가 이자원의 이름을 듣고 이리로 건너오며 말했다.
"정말 도깨비가 따로 없어. 싸우는 와중에 도망치는 놈은 가차없이 목을 쳐버리는데,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오랑캐들이 싸움을 얼마나 잘하는데 그것도 이겨갖고 오는걸 보면 같은 조선인이 맞나 싶다니깐."
경상도 근왕군 두 사내가 한창 떠들고 있을 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경기 속오군 사내가 툭 내뱉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긴 것 아뇨?"
"뭐 그거야······ 그렇지."
흉을 보던 사내들도 그 점은 순순히 인정했다.
"지난밤에도 앞장서서 포위를 뚫었고 듣기로 세자 저하도 그 양반이 구했다던걸."
"아마 전쟁이 끝나면 높은 자리로 가지 않겠는가? 이럴게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수발 들러다니면서 눈도장이라도 찍어놓을까?"
재간둥이의 익살스러운 말에 모여앉은 사내들은 다들 낄낄댔다.
"이놈들! 병기는 점검치 않고 모여앉아 무엇을 쑥덕대는게냐?"
그때 울려퍼진 것은 지나가던 박철균의 호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철균의 상관인 이자원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병사들이 찔끔해서 흩어졌다.
혹시 흠잡을 부분이 있는지 병사들을 노려보며 걸어가는 박철균의 뒤로 사람 한 명이 따라가고 있었다.
"파총 나리께서 계신 곳은 여기외다."
이자원은 막사 뒤편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술을 수련하는 중, 이라기엔 초보적인 투로(套路)다. 그보다는 검을 휘두를 때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박철균은 이자원을 불렀다.
"파총 나리, 궁에서 세자 저하의 명을 받들고 사람이 오셨소이다."
무려 세자가 보낸 내관이다.
박철균은 자신의 가슴이 다 두근거렸으나 이자원은 예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을 뿐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세자께서 파총을 입궐시키라 명하셨습니다. 바로 채비를 해서 가시지요."
"입궐?"
언젠가는 찾을줄 알았으나 그게 지금이 될줄은 몰랐기에 이자원은 의아했다.
그러나 세자가 부르는데 응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뒤.
도착한 이자원은 세자의 앞에 공손히 엎드렸다.
"신 이자원, 세자 저하를 뵈옵니다."
"그래. 잘왔느니라."
이자원은 이미 들어서기 전에 주위를 살핀 상태였다.
사관이 멀리 자리를 펴고 앉은 것을 보니, 인조의 죽음에 대한 문제는 아닌듯 싶다. 세자가 사관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논할 멍청이는 아닐테니 말이다.
"이 파총. 올해 네 나이가 몇이냐?"
실제로 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 밖의 것이었다.
"황공하옵게도 세자 저하와 동갑이옵니다."
그러나 이자원은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하냐."
세자는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본론을 꺼냈다.
"두 시진 전에 원상들이 다녀갔느니라."
그리고 그들이 꺼내놓은 의견과 근거에 대해 설명이 이어졌다.
"해서, 동양위 신익성은 한양 공격을 주장했고 훈련대장 신경진은 반대했지. 나는 두 의견 모두 타당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나랏일은 중간이 없는 법.
네가 군재와 식견이 있으니 조언을 듣고 싶어 부른 것이니라."
세자의 설명이 끝나자 이자원은 잠깐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신은 그저 일개 군관에 불과하여 세자 저하의 귀를 더럽힐까 두렵사옵니다."
세자가 직접 불러 의견을 묻고, 거기에 답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자원의 존재를 요동치는 정국 속에 끌어들인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그곳에 뛰어 들어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세자가 이자원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뢰하더라도 이자원은 세자를 아직 신뢰하지 못했다.
"이 파총."
그때 세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나는 너를 높이 평가한다."
세자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그러니 겸양하지 말고 말해보라."
이자원은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불경스럽게도 세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세자는 그 날카로운 눈빛에 잠시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선이 맞부딪힌지 몇초가 지났을까,
"신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이자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지금껏 세자 저하의 말씀을 들은 바, 저하께서는 마음으로는 동양위의 안이 기꺼우나 현실적으로 훈련대장이 옳음을 알고 계시옵니다."
"그렇다."
"승산도 승산이지만 한양 공략이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군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우리군도 이런 어려움을 겪거늘 청군은 남의 땅에 들어와 어찌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지 아시옵니까?"
이자원의 말에 세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야 우리 백성들을 수탈하기 때문이 아닌가?"
"약탈만으로는 수만 군사의 군량을 댈 수 없사옵니다. 청군이 배를 곯지 않는 것은 오로지 전쟁 초기에 빼앗은 갑사창(甲士倉) 덕분입니다."
갑사창은 경기 동남부에서 거둬들인 식량을 모은 창고다.
한강의 지류인 탄천 일대에 조성되었는데, 평시에는 수로를 통해 한양에 곡식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전시가 되자 미처 식량을 성으로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청군에게 점령당했다.
그 탓에 인조와 병사들은 성 안에 보관된 식량만으로 47일을 버텨야 했다.
아직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근왕군이 성을 구원한 덕에 세자는 그것을 생각지 못한 듯했다.
"청군은 갑사창의 군량을 열심히 옮기고 있겠으나 이제 포위를 풀고 물러난 마당에 그 수량이 많지는 않겠지요."
"허면, 갑사창을 탈환하면······!"
세자가 흥분에 차서 외쳤다.
"청군은 굶게 되고, 우리군은 도성으로 진격할 군량을 얻게 될 것이옵니다."
반면 이자원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