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재는 재로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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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은 본래가 무덤덤한 인간이다.
천성이 그랬던지 아니면 그도 모르는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랬다.
그는 감정은 있으되 그것이 풍부하다 할 정도는 못되었고, 쉽게 얼굴에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자원도 지금의 이 상황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하, 전하!"
"눈을 떠보시옵소서!"
국청사에 들어가자 보인 것은 눈을 멍하니 뜬 사내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세자였다.
그 앞에는 신료들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자원이 옆에 허탈하게 퍼질러 앉은 최명길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최명길은 우악스러운 이자원의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자, 자네는 황태극을 죽인 군관······."
"이자원이오이다. 도대체 전하가 왜 저리 되신겝니까?"
최명길은 충격을 받아 채 다 열리지 않는 입으로 더듬더듬 설명해나갔다.
서문으로 향하다가 국청사에서 잠시 머무른 것.
그리고 화약과 무기를 가지러 온 수비군과 마주친 것.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최명길은 잠시 입술을 떨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서문 수비군은 전하를 보고 놀라 곧장 조총을 쏘았고, 전하께서는 가슴팍에 두 발이나 되는 총탄을 맞고 쓰러지셨네."
뒤늦게 총소리를 듣고 깬 세자와 신료들이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이자원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엎드린 수비군들을 바라보며 되뇌였다.
‘인조가 죽었다.’
그것도 아군의 오사로.
'그나마 적 손에 사로잡히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태어나서부터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배우고 자라 임금에 대한 충심이 자동으로 박힌 신하들과 달리 이자원은 인조의 죽음에 슬픔 따윈 느끼지 않았다.
다만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할 뿐이었다.
이자원은 세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나마 세자는 무사하군.’
세자마저 죽었다면 극심한 혼란상에 빠졌을 것이다.
당장 다음으로 왕위를 이어야할 사람도 명확하지 않았다.
강화도에 동생인 두 대군(大君)과 한살배기 원손(元孫)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복잡한 정치적 투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예종이 죽었을 때 적자인 제안대군이 네 살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조카 자을산군, 즉 성종이 대통을 이은 전력이 있으니 두 대군이 계사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연 세자빈인 강씨가 그것을 놓아둘 것인가.
교통정리를 해줘야할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자칫하면 청을 다 몰아내기도 전에 먼저 내부에서 피바람이 몰아닥칠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바마마, 아버님······."
"세자 저하."
이자원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세자는 그저 인조의 싸늘한 몸만 부여잡고 의식을 되찾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자 저하!"
이자원이 목소리를 높여 외치자 그제야 세자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돌아보았다.
"지금 예서 계실 때가 아니옵니다. 근왕군이 성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혹 그 전에 따라붙은 청군이 있을지 모르니 어서 수어사와 합류하십시오."
"저리 가라. 임금을 지키지 못했으니 불충하고,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으니 불효한 내가 어찌 몸을 피한단 말이냐! 전하를 모시고 있겠다!"
그러나 이자원의 말에도 세자는 완강했다.
"저하."
"뭐냐! 전하를 지키지 못한 너희의 탓이라고 할셈이냐!"
세자의 외침에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께서 돌아가신 것은 모두 오랑캐의 탓이옵니다."
"뭐라?"
세자는 순간 이자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물론 인조가 청군에게서 도망치다 죽은 것은 맞지만 총을 쏜 것은 엄연히 같은 조선인이 아니던가.
"전하께서 이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몸을 피하신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그야 청군이 성을 넘어왔기 때문에······."
"총을 쏜 이들 또한 전하를 청군으로 오인하고 두려워 방아쇠를 당긴 것이옵니다."
이자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약 오랑캐가 성을 넘어오지 않았다면, 그 이전에 조선의 강토를 짓밟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어찌 허망하게 목숨을 잃으셨겠사옵니까. 그러니 오랑캐의 탓이 아니겠사옵니까."
"오랑캐의······ 탓······."
폭론(暴論)이다.
그러나 아비를 잃은 죄책감으로 제정신이 아닌 세자는 그것을 반박할 능력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자원으로 인한 비틀림이 아니었다면 인조도 천수를 누렸겠으나 세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저, 저들은 어찌하는가······? 군부(君父)를 시해한 자들이다. 삼족을 멸할 대죄가 아니더냐."
세자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덜덜 떨며 엎드려 있는 수비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자원은 그들을 흘깃 바라보고 말했다.
"급선무는 세자 저하께서 피하는 것이지 저들을 대역의 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가만히 놔두겠다는 말이냐!"
세자가 소리치자 신료들과 병사들이 두려운 얼굴로 머리를 들었다가 다시 땅바닥에 엎드렸다.
"신이 처리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이자원은 그저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명령을 내려주소서. 신이 세자 저하를 대신하여 저들을 참하겠사옵니다. 단,"
이자원은 세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전하께서는 청군의 손에 돌아가신 것이옵니다."
인조가 청군의 불의의 습격에 죽은 것과 조선군의 손에 죽은 것은 엄연히 방관의 무게가 차원이 다르다. 아군의 손에 죽었음을 공표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정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리라.
신료들은 인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관직을 내어놓아야하는 것은 똑같겠지만, 후자는 목까지 바쳐야 할 것이고, 세자는 끊임없는 유언비어와 시비에 시달릴 것이다.
전란의 한가운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신하 중 누군가가 문집 따위에 오늘의 일을 남겨 후일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폭풍이 지나간 뒤의 이야기이리라.
"세자 저하를 위해 신이 그리 만들겠사옵니다."
후대의 몇몇 사람들은 소현세자를 안타깝게 꺼져버린 비운의 왕재라고 평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혹은 사실이더라도 청나라에 끌려간 적이 없는 지금의 세자가 원역사의 소현과 같은 사람일 것인지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최소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하라."
세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원은 허락을 받자마자 돌아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 스르릉
칼을 뽑은 채 성큼성큼 다가온 이자원을 보고 그의 의도를 눈치챈 수비군 병졸들의 눈이 커졌다.
"나리, 나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초관 나리, 제발 이분께 뭐라 말씀 좀 해주십시오!"
더러는 이자원에게 매달리고, 또는 제 상관에게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몇은 황급하게 뒤돌아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박철균과 휘하 군사들이 지키고 서있어, 편곤에 머리통이 날아갈 뿐이었다.
그 모습에 수비군 군관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이자원의 칼이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왜 자기는 제외라 생각한건지.'
휘하의 병사들이 인조를 죽였으니 당연히 그도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할 것이 아닌가.
이자원은 인조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임금을 시해한 자들에게 지켜줄 의리도 없었다.
"······!"
신료들은 끔찍한 광경에 눈을 돌리거나 질린 얼굴로 이자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환도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내고 다시 세자에게 가서 보고했다.
"저하. 이로써 불의한 자들은 모두 죽었사옵니다."
"······그래, 잘했다."
세자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이자원은 세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제는 움직여야할 시간이었다.
===
해가 밝아왔다.
성내에 진입한 근왕군들은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청군을 격파했다.
청군들도 끊임없이 유입되었지만 엄연한 대문인 동문으로 들어오는 조선군과 진입 속도에서 겨룰 수는 없었다.
청군의 야습은 실패했다.
이어서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1만 2천 병력이 검복리 일대에 들어서 동문과 통하며 산성과 기각지세를 형성했다.
곧이어 김준룡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 선봉대가 광교산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북상하자 청군의 지휘부는 대단한 혼란에 빠졌다.
"좌군은 어디까지 왔는가?"
"이제 한강에 도달했습니다."
"빌어먹을."
다이샨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성을 공략하면서도 계속해서 좌군에 연락을 취해 도르곤과 호거에게 철군 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그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도르곤은 철군, 호거는 항전이라니.'
도르곤은 우선 군사를 물리자는 입장이었고, 호거는 한의 원수를 갚기 전엔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버일러들이 모두 모여서 논의를 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이었으나······
"예형친왕이시여, 포위망을 더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정홍기 구사 어전 툴어이(杜雷)의 말에 다이샨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도로이 버일러 요토의 직위를 박탈한다. 양홍기는 임시로 버이서 쇼토가 맡도록."
쇼토는 다이샨의 차남이다. 순식간에 동생에게 밀려난 셈이었지만 요토는 아무말 못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왕도, 세자도, 하다못해 한을 죽인 이자원이란 놈도 잡지 못했다. 기주에서 밀려난 것은 단지 시작일 뿐.
다이샨은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물을 것이 뻔했다.
"한양으로 물러난다."
청군이 이제까지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근왕군을 차단하고 성을 함락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모조리 실패한 지금 더이상의 포위는 의미가 없었다.
청군은 후퇴했다.
==
1월 8일.
김준룡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군 선봉대는 승전의 파발을 보내왔고 함경감사 민성회와 함경남병사 서우신이 이끄는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 미원(迷原) 일대에 머무르던 강원도 근왕군의 잔병(殘兵)과 합류했다.
인조가 꿈에 그리던 근왕군들이 속속 도착해 산성을 옹위했으나 정작 인조는 더이상 없었다.
"전하! 상복 하나 지어입을 수 없는 작금의 상황을 부디 애처롭게 여기소서!"
세자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신료들이 전부 눈시울을 붉혔다.
인조가 본래 머물던 상궐이 불타버렸으므로 그 유체(遺體)는 객관으로 쓰던 인화관(人和館)으로 옮겨졌는데 청군이 물러가자마자 급히 강화도에 인조의 죽음을 알리고 상례를 행했다.
인조의 침상을 옮겨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숨진지는 이미 오래였으나 그래도 절차대로 속광(屬纊, 햇솜을 코 밑에 놓아 숨졌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행한 뒤에는 내시 두 사람이 인화관 지붕 위에 올라가 상위복(上位復)을 세번 외치었다.
이어서 지난밤에 용케 살아남아 모습을 드러낸 영의정 김류(金瑬)를 필두로 대신 이하가 곡을 하였으나, 보이지 않은 관리들이 매우 많았다.
청군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들이었다.
그토록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인조가 죽은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굳이 수상한 점을 꼽으라면 훙서의 원인이 총상이라는 점인데, 청에 투항했던 한병(漢兵) 중에선 총을 다룰줄 아는 자가 적지 않으니 대놓고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물론 그 자리에 모였던 이들이 말을 흘릴 가능성도 적었다.
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든 그것이 나라를 위한 결정이라고 믿어서든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저기서 진심으로 통곡하고 있는 최명길조차도 말이다.
대신들과 백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속오군과 의병들의 울음이 산성을 뒤덮었으나 이자원은 겉으로 곡은 해도 별다른 흥미는 없었다.
진정으로 그가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는 것은─
"저하, 국조 고사(國朝故事)에 따라 졸곡(卒哭) 때까지 대신으로 원상(院相)을 삼으셔야 하옵니다."
바로 세자가 익선관을 쓸 때까지 정무를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