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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0화 (10/213)

〈 10화 〉 개싸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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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부산스러운 바깥 소리에 잠을 깼다.

바깥의 내관에게 무슨 일이냐 물을 새도 없이 대전별감(大殿別監)이 후다닥 뛰쳐들어와 외쳤다.

"전하, 어서 기침하시옵소서!"

감히 임금 앞에서 있을 수 없는 무례였으나 그렇기에 인조는 황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란인가?"

"청군, 청군이 성첩을 넘어 쳐들어왔사옵니다!"

청군이라니?

갑작스런 상황에 인조의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오늘밤 포위가 뚫려 근왕군과 연결될 것이고, 자연히 이 지긋지긋한 산성에서도 벗어날 것이라 믿고 잠자리에 들었거늘, 들려온 것은 난데없는 급보였으니 당연했다.

"······도대체 경계를 어찌했기에?"

"별장 이기축이 데리고 출성한 병력 때문에 허점이 생겨 운제가 걸리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저들이 그것을 어찌 알고?"

"전하, 옥체에 손을 대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지금은 얘기할 시간이 없사옵니다!"

인조는 황망하게 되묻자 대전별감이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그를 들쳐매었다. 옆방에서는 또한 세자가 급히 깨어 내관의 부축을 받고 나왔다.

별감의 등에 업힌 인조가 내행전을 나서자 앞뜰에 어쩔줄 모르는 기색으로 모여있는 신료들이 보였다.

"전하!"

"전하, 피하시옵소서! 오랑캐들이 성을 범했나이다!"

그들의 아우성에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웠던 인조는 손을 휘저어 진정시켰다.

"적들은 어디로 들어왔는가? 아는 이가 있는가?"

신료들의 입이 쑥 닫혔다.

그들도 잠들었다 성 안이 온통 난리가 나자 무작정 인조를 찾아온 것이었으니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어있을리 없었다.

"신이 도망치는 병졸들에게 한두마디 듣기로 동북의 암문 두 군데가 뚫렸다고 하옵니다."

그때 대답하고 나선 이는 예조판서 김상헌이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남한산성의 구조를 더듬던 인조가 물었다.

"허면 과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수어사 이시백이 서문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우선 그곳으로 몸을 피하소서."

김상헌이 대답했다.

"그리로 가면 적을 몰아낼 수 있는가?"

"······."

그러나 그로서도 적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쉬이 긍정의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전하, 어심(御心)을 굳게 하셔야 하옵니다. 뒤의 상황이 어찌 될지는 모르오나 일단은 흉수가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하시옵소서."

김상헌이 침묵하자 최명길이 급히 나서서 인조를 설득했다.

"그래, 그래야겠지······. 어서 서문으로 가도록 하자."

혼이 빠져버린 듯한 인조는 최명길의 채근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대전별감은 인조를 업은 채로 바삐 움직였고, 문무백관들도 뒤질세라 그 뒤를 따랐다.

단 한 명을 빼놓고는.

"예판 대감께서는 아니 가십니까?"

움직일 생각을 않고 우두커니 서있던 김상헌은 최명길의 물음에도 그저 눈을 감고 탄식할 뿐이었다.

'오늘로 이백년 종사가 모두 끝이 났구나!'

성에 청군이 쏟아져 들어오는 판이니 아무리 분투한다 하더라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임금과 세자는 적의 포로가 되어, 그들의 손에 생사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추장을 잃어 성이 난 오랑캐가 이 종묘 사직을 그대로 둘 것인가?

금나라는 개봉을 점령한 후 북송 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侯)라는 작위를 내려 능욕했다.

인조와 세자는 더하면 더했지 못한 고초를 겪지는 않을 것이다.

김상헌은 살아서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이판께서는 전하를 호종하시구려. 오랑캐가 두 웃전께 욕을 보이거나 해를 끼치려 하면 모쪼록 힘 닿는데까지 막아주시오."

한때 최명길을 매국노라 비난했던 김상헌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잠시 김상헌을 쳐다보던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

"치욕을 넘어야만 삶이 있고, 삶이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 길이 보이는 법이지요."

"······."

"병판 대감이 가옥과 개천을 끼고 시간을 벌어보겠다 하니 어가는 수어사와 충분히 합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판께서도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서문으로 오십시오."

최명길은 그 말을 남기고 바삐 인조의 뒤를 쫓았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김상헌은, 이윽고 반대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

청군의 포위를 뚫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산성군의 출성을 예측하고 있던 청군은 근왕군이 구원하러 오지 못하도록 미리 이쪽 방향에 목책과 많은 병력을 배치해둔 상태였다.

반면 자다깬 근왕군으로서는 동원할 수 있는 부대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나절만 있으면 본영의 대군이 오는데······!"

선세강의 한탄대로 여주에서 출발한 1만 2천 병력은 이미 지척에 와있었다.

민영과 허완의 선봉대와 합쳐 2만 병력이니, 충분히 시간을 들여 한쪽 포위를 뚫어내고 청군을 밀어내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탄해봤자 적들이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찌되었든 일점(一点)을 뚫어내고 산성군을 구원하는 것이 급선무이오이다."

민영과 허완 또한 얼마나 판이 급박하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마필을 있는대로 내어주십시오!"

좌병영과 우병영을 막론하고 모든 말들이 끌어내지고 기수들이 차출되었다. 이자원이 지휘를 맡고 박철균이 보좌했다.

포수와 사수들이라고 노는 것은 아니었다.

"파총 나리, 지금 상황에서는 적을 정확히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상관없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비추었으나 아무래도 조준하여 목표를 맞추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공격을 한번 퍼붓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은 화약과 궁시를 아낄 때가 아니다! 전원 발사하라!"

군관의 외침에 수도 없는 총탄과 화살이 청군을 향해 날아갔다.

그 무시무시한 투사체의 향연에 청군들이 위축되어 있을 때, 이자원과 박철균이 이끄는 기병들이 목책을 직격했다.

한번 기병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항왜들이 뛰어들어 칼질을 해댔고, 그 뒤로 살수들이 줄지어 돌격했다.

그러나 청군들은 괜히 정예가 아닌지 저항이 완강했다. 결국 포위망을 뚫은 것은 이자원을 비롯한 일부 병력에 불과했다.

"근왕군이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

이자원은 동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초입에 들어서고 나서야 어째서 포위망의 돌파가 가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매복에 당한 조선군의 저항이 강했는지 상당히 많은 수의 청군이 이곳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무수한 조선군의 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를 들면 어영별장 이기축이라든지.

총 지휘관이면서도 직접 칼을 들고 분전했는지 환도를 단단히 쥐고, 가슴에 화살 여러 대를 맞은채 죽은 그의 눈은 한스럽게도 부릅떠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철균은 침통한 얼굴로 눈을 감겨주었다.

그뿐, 근왕군에게 시체를 수습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산성을 향해 달린다! 남은 청군은 뒤쪽의 아군에게 맡겨라!"

이때쯤엔 이미 돌아가는 상황이 대충 파악이 된 이자원이었다.

지금 급선무는 인조와 세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성 내에 진입한 청군을 몰아내는 것.

"나는 훈련도감 좌부중사 파총 이자원이다! 성을 구원하러 왔으니 문을 열어라!"

피를 뒤집어쓴 이자원과 휘하 기병들의 모습은 실로 섬뜩했으나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문이 열리자 근왕군은 조금도 쉴새없이 말을 타고 달렸다.

동문 근처에는 아직까지 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성의 중앙부로 달리자, 곧 이자원이 뚫고 온 것 이상의 혈겁이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병판 대감!"

이자원의 외침에 활에 화살을 재던 신경진이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네는······!"

"소관 이자원이오이다!"

신경진은 병조판서이면서도 훈련대장을 겸하고 있다보니 이자원의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옛날에는 이자원 같은 말단 군관이야 신경쓰지도 않았고, 그가 홍타이지를 잡은 뒤엔 곧장 성을 나갔으니 별다른 교감을 나눈 적도 없었지만 신경진은 이순간 어느 누구보다 그가 반가웠다.

"자네가 왔는가!"

가옥들이 밀집해있는 중앙부에서 시가전을 벌이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백병전 실력에 있어 명백히 열세인 조선군들이었으나 건물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다니다 어느 순간 벽 뒤에서 튀어나가 공격하며 시간을 벌었다.

"동문 쪽 청군 병력들이 정리되고 나면 근왕군이 진입할 것이고, 내일 오전에는 경상 감사 대감이 이끄는 본영이 도착할 것입니다. 조금만 버티면 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경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잠시 뒤 암문을 통해 꾸역꾸역 들어온 청군 부대들이 속속 이리로 당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군은 이제 몇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했다.

===

"조금, 조금 쉬었다 가자꾸나."

행궁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상당한 오르막이다.

청군을 피해 쉬지 않고 걷던 신하와 내관들은 모두 지쳐버렸고, 별감의 등에 업혀 가던 인조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쉴만한 건물이 보이자 인조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에 들어섰다.

"여기는 무엇하는 곳이냐?"

"국청사(國淸寺)라는 절로 십 년쯤 전에 승군들이 지은 곳입니다. 난리를 대비하여 화약과 군기(軍器) 등을 숨겨놓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냐?"

주위를 둘러보던 인조는 별안간 중얼거렸다.

"하필 청군이 우리가 공격에 나선 날 성을 넘었으니 어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

임금의 혼잣말에 침묵이 깊게 내려앉았다.

세자와 신하들은 산행에 지쳐 맞장구도 치지 못했다.

그때 최명길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전하, 서문이 바로 눈 앞에 보입니다. 고되더라도 조금만 더 가시지요."

최명길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이미 몹시 지쳐있던 인조는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생각해보니 서문 밖에도 청군들이 우글거리지 않느냐? 불과 오늘 아침에도 적들이 홍이포로 성벽을 두들겨 댔으니, 어가가 머물만한 곳이 아니다. 차라리 수어사에게 이곳으로 호위할 군사를 조금 보내도록 이름이 어떻겠는가?"

"수어사가 가진 한줌 병력으로는 적이 서문을 타넘는 것을 막는데도 모자람이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의 옥체를 보중하는 것 또한 중요하나,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서문으로 가셔야 하옵니다."

최명길의 설득에도 인조는 한참을 머뭇대더니 말했다.

"······그렇더라도 여러 조신들은 근본이 대부(大夫)로서 노숙해본 일이 없으니 성첩에 몸을 뉘이는 것은 가혹한 듯 싶다. 국청사는 비록 한뼘 절간이나 잠시 바람과 추위를 피하기에 알맞은 듯 하니, 조금만 눈을 붙였다 가자."

지칠대로 지친 신하들은 이미 될대로 돼라는 식으로 벽에 기대 졸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데다 인조의 태도도 완강하니 최명길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내관은 냉수를 한잔 떠오라."

정작 인조는 지쳤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 크게 놀라 그런 것이리라 생각하며,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툇마루에 앉아 냉수를 청했다.

===

그러나 인조와 신하들이 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이 국청사는 화약과 군기를 저장해놓는 장소라는 것.

수어사 이시백은 성 안에 난리가 나자 우선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군사 몇을 국청사로 보냈다.

청군이 성 안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군사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혹 어둠 속에서 청군과 마주칠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려가며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영(人影)을 발견했다.

"누, 누구냐!"

군관이 그래도 상관이랍시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자, 툇마루에 앉아있던 인영이 이쪽을 바라보고 벌떡 일어섰다.

그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별다른 이상행동은 아니었으나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군사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것이다.

"오랑캐다!"

군관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제풀에 놀란 군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조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 투다당!

날아간 총탄에 맞은 인영이 풀썩 쓰러졌고, 그것으로 그들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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